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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31화 (231/250)

231화

“오경연은 이미 수십 년 전 오가촌에서 죽었다. 남은 것은 복수를 위한 원귀일 뿐이지.”

손우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조종(弔鐘)을 들었는지 모르겠군.”

“…….”

무한도 황제의 죽음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손우자를 보는 순간 자신이 황제의 죽음을 앞당겼음을 깨달았다.

손우자는 남궁문유의 집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한이 황도에 나타나자마자 황제를 죽이고 도관으로 온 것이다.

“지금쯤 황도에 피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태자당도 사황자도 상대를 압도하지 못하지. 그 둘의 세력을 엇비슷하게 맞추느라 고생을 좀 했지. 아마도 둘은 동귀어진 할 것이다.”

즐거운 상상이라도 하듯 손우자의 비틀린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육황자는 자신이 어부지리를 얻을 것이라 여기고 있지. 하지만 그 역시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할 것이다. 빈손으로 아비의 뒤를 따라가겠지.”

무한의 미간이 꿈틀하였다.

손우자는 황위 계승자들을 다 죽일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누구를 황제로 세워야 하느냐로 종친 간에 알력이 일겠지? 그에 대한 대비도 해두었다. 끊임없이 죽고 죽이는 암투가 지루하게 이어질 것이다. 권력욕은 그 누구도 떨치지 못하지. 그 점에 있어서만은 너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겠군. 정말 천하방을 해체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

무한은 묵묵히 손우자를 보며 듣기만 했다.

무한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손우자도 맥이 빠졌는지 탄식을 하며 말했다.

“황도에 혈풍이 부는 동안 천하가 도탄에 빠질 것이다.”

비로소 무한이 입을 열었다.

“그게 오가촌을 위한 복수인가?”

“…….”

“마지막 유언치고는 참으로 옹색하군.”

이번에는 손우자가 침묵을 지켰다.

“마뇌는 원한을 버렸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를 아는가?”

“…….”

“듣지 못했나 보군. 마뇌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오가촌에서 잃었던 가족을 그는 스스로 다시 꾸렸다.”

순간, 손우자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천하가 도탄에 빠질 것이라고 했나? 원래 세상은 흔들리며 나아가는 법. 한때 흔들리더라도 어느 순간 자리를 잡을 것이다. 손우자, 당신이 아니더라도 황실의 권력다툼은 늘 있어 왔고, 천하는 흔들리며 여기까지 왔다.”

무한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오늘 당신의 목숨을 거두는 건, 천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다.”

무한이 확고부동하게 죽일 의사를 표명하자 손우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말이 떨어진 순간 죽음이 곁에 앉아서 목을 겨누고 있는 듯했다.

순간, 손우자의 눈빛이 뱀처럼 빛났다. 동공에서 청광이 쏟아져 나왔다.

무한의 눈앞에 갑자기 삼도봉에서 본 세상 풍경이 펼쳐졌다.

하늘에서는 뇌전이 번뜩이고 우레가 쳤으며, 지상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죽고 죽이며 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

무한이 무심히 이를 바라보자 풍광이 다시 바뀌더니 천주가 심상으로 일으킨 팔비천마가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팔비천마의 여덟 팔이 무한을 향해 뻗어왔고, 무저갱 같은 입 깊숙한 곳에서 원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한이 조용히 마음의 검을 내리긋자 팔비천마가 사라지고, 이번에는 할아버지 검신 심양조가 나타났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고통으로 신음하며 말했다.

- 무인의 길은 죽음의 길이다. 죽어라. 그러면 살 길이 열린 것이다.

무한이 담담히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다 마음으로 답했다.

- 불인의 길.

심양조가 생각한 무인의 길을 되뇌자 허상이 씻은 듯 사라졌다.

다시 도관 암자의 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무한이 깨는 순간.

“쿨럭!”

손우자가 코에서 피를 쏟았다.

무한이 이를 보고 탄식하듯 짤막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천령개혼술.”

그러자 손우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동생 마뇌에게 천뇌심공이라 일러준 심공의 원래 명칭이 천령개혼술이다.

무한이 말을 이었다.

“내게는 소용없다.”

“……!”

“마지막 유언치고는 제법 길게 말할 때부터 수상했다. 말과 말 사이에 숨어 있는 교묘한 속삭임…… 그게 천령개혼술의 힘인가?”

손우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준비한 최후의 수가 무위로 돌아갔다.

“그동안 궁금한 게 있었지. 어찌하여 도왕이 당신을 죽이지 않았을까? 어째서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따를까? 공손승이나 문요 같은 자는 마치 주인처럼 섬기더군.”

“사부가 말해주었군.”

손우자가 원독에 찬 눈빛으로 뇌까렸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왜 천기자 어르신을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이유를 물었다.”

예전에 직접 물었을 때 천기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서찰에 그 이유를 적었다.

어쩌면 천령개혼술을 익혔을지도 모른다고.

“천기자 어르신은 되도록 네 목숨을 붙여달라고 했다. 다만, 천령개혼술을 익혔다면 내 판단에 맡기겠다고 했지.”

천령개혼술.

천문을 열어 영으로 상대의 혼에 간섭하는 술법으로, 존재 여부를 아는 이조차 없다.

무한은 천기자의 서찰을 보고 손우자의 언변에 사람들이 쉽게 넘어가고 명을 따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천령개혼술은 대화를 하면서 영으로 상대의 혼에 간섭하여 자신의 말을 따르거나 인정하게 하는 사악한 술법이다.

과거 기천부의 비밀서고에서 이를 발견한 손우자가 익히고자 하는 걸 천기자가 막았다. 그리고 이를 어기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복수에 눈이 먼 손우자는 이를 무시하였다.

천령개혼술을 익히면 순간적으로 뱀의 눈처럼 동공이 옆으로 축소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물론 당하는 상대는 이를 모른다.

손우자는 천기자의 경고를 잊지 않았다. 천기자가 손우자를 보면 대번 천령개혼술을 익혔음을 알아차릴 것이라 여겨 그를 피해왔다.

손우자는 천령개혼술을 꾸준히 수련하여 대성하였고, 이제는 부작용도 거의 제거한 경지다.

그랬기에 최후를 맞이하는 것처럼 꾸미고 무한에게 시도를 하였다. 그런데 먹히지 않았다.

손우자가 탄식을 하였다.

“나도 이상하다 생각을 했지. 왜 너에게는 천령개혼술이 통하지 않을까? 이건 무공의 고하와 상관이 없는데 말이다.”

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천심공이나 천목투심술을 거론할 이유가 없었다.

“그건 너도 같은 걸 익히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군.”

손우자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무한이 손을 휘저었다.

손우자는 자신의 심맥 어딘가가 제압당했음을 느꼈다.

“당신에게 한 달의 시간을 주겠다. 천산으로 가서 동생과 회포를 풀고 죽든, 황도에서 아귀다툼을 하다 죽든, 명의를 찾아 목숨을 보존하는 길을 찾든 당신의 선택이다.”

그러면서 무한이 뒤돌아섰다.

“오늘 죽어간 자에게는 한 달이라는 시간도 무척 간절할 것이다.”

무한의 신형이 사라졌다.

손우자는 코에서 줄줄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조차 못했다. 천령혈이 깨지며 천령개혼술의 능력 또한 사라졌다.

손우자의 안광은 더 이상 형형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칙칙한 눈빛만 흐를 뿐이다.

***

무한이 손우자를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은 것은 천기자의 부탁도 있었지만 마뇌에 대한 마음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래서 굳이 천산으로 가서 형제의 회포를 풀라고 한 것이다. 그걸 손우자가 받아들일지는 무한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천령혈이 파괴되었으니 그의 능력도 대부분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황도 남궁문유의 집으로 향하는데 곳곳에 군사들이 움직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누구냐?”

대로에 설치한 검문소를 지키던 군사 하나가 무한을 향해 소리쳤다.

“통행금지령이 내렸는데 오가다니. 수상한 자로군. 그대로 엎드려라.”

그러나 무한의 신형이 사라졌다.

‘정말 천하 유람이라도 떠나야 할 모양이구나.’

한시바삐 황도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다.

***

황제가 죽자 손우자의 말대로 황도에 피바람이 불었다. 다만, 손우자의 예측과 달리 미풍에 그쳤다.

태자는 황제가 죽자마자 사황자가 아닌 풍도관으로 진입해서 일적진인을 생포하였다.

일적진인 역시 고수였으나 금의위 고수들을 감당하지 못했고, 독한 고문에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태자는 이 같은 사실을 조당 대신에게 고하고, 사황자를 회유하였다.

대세가 기울자 사황자도 한발 물러섰다. 진북왕으로 책봉된 사황자는 산해관으로 떠났다.

무한의 조언을 들은 남궁문유의 활약이 컸다. 그는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덕분에 남궁세가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육황자는 약을 잘못 복용하여 죽었다. 손우자의 마지막 독수는 자신을 무시한 육황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황제가 바뀌는 사이 무림의 판도 또한 크게 바뀌었다.

흑천의 세력권이 크게 확장되어 사천 남부까지 진출하였고, 중원을 떠돌던 흑월이 절강에 안착하였다.

절강은 이민족이 많고 바닷가에 해적이 자주 출몰하여 큰 도시를 제외하고는 치안이 좋지 않았기에 흑월은 수월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무림맹은 천하방 자리에 들어섰으나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알력에 조만간 깨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실제로 대파와 세가는 자신들의 세력권을 강화하려 하였고 무림맹주 형일천은 이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천하방이 사라지고 무림맹은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흑천과 흑월의 세력인 나날이 강해지니 무림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가 됐다.

***

봄이다.

누런 흙먼지가 한차례 관도를 쓸고 갔다.

쭉 뻗은 관도에 세 사람이 나타났다.

세 사람은 챙이 넓은 모자에 망사를 드리우고 피풍의를 뒤집어썼는데 몸에 흙먼지가 자욱했다.

미친 듯 천지를 휘젓는 봄바람에 옷자락을 흩날리며 걷는데 제법 먼 길을 걸어온 듯했다.

한 사람이 모자챙을 들어 앞을 보고는 투덜거렸다.

“방주 자리에서 내려왔다고 말을 살 돈도 없는 겁니까? 꼭 이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가야 하는 겁니까?”

볼멘소리를 하는 이는 귀영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 귀 호위에게 줄 월봉도 없군요. 이달까지만 수고하고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할 겁니다.”

무한의 말에 귀영이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궁우가 말했다.

“귀 호위, 내가 고용해줄까?”

“됐거든? 너는 왜 자꾸 따라다니는 거지? 이제 천하방 군사도 아닌데.”

“나? 신검산장의 책사잖아.”

“산장에 책사가 있을 이유가 뭐 있어?”

“그보다 천하제일인에게 호위가 있을 필요가 없지.”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야트막한 고개를 넘었고 꽤 커다란 현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너머 구불구불 도도하게 흐르는 강이 보였다.

장강이다.

“가자, 어서 가자. 오늘은 더 못 가. 저기 가서 좀 씻자. 장주, 먼저 가서 객잔을 잡겠습니다.”

귀영이 우다다다 고개를 뛰어 내려갔다.

무한과 남궁우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갔다.

남궁우가 석양빛을 받아 번뜩이는 장강을 보며 말했다.

“내가 천하를 주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거든.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랬었나봐.”

무한이 발걸음을 멈추고 금빛으로 물든 장강을 보았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석양의 장강을 보았다.

이윽고, 남궁우가 내내 궁금했던 물음을 던졌다.

“손우자, 어떻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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