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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30화 (230/250)

230화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해도 참 심하게 하시네요. 아직 몸도 성치 않은 제가 죽음을 무릅쓰고 기방을 다닌 건 모두 손우자의 동정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고요.”

죽음을 무릅쓰고 기방을 다녀?

무한은 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사이 방주께서는 천하방을 말아 드셨더군요. 기껏 방주에 올라서 하신 일이 방을 해체하는 거라뇨. 그 소식을 듣고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요.”

귀영은 연신 투덜거리면서 무한의 여기저기를 살폈다. 다친 곳이 없나 보는 것이다.

무한이 양손을 벌리며 말했다.

“누구처럼 칼 맞고 다니지는 않습니다만.”

“천주가 소문보다 약했나보군요. 그 대결을 못 보다니…….”

귀영은 진정으로 아쉬워하였다.

“기방 소식이나 들어보죠.”

그 말에 귀영이 무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그리 보는 겁니까?”

“많이 바뀌셨습니다.”

귀영만큼 무한을 아는 이는 없다. 그러니 무한의 변화를 바로 느꼈다.

무한은 늘 무겁고 진지했다. 유일하게 가벼운 농담을 나누는 이는 귀영이었다. 그래도 표정에 진중함이 있어 어색했는데 지금은 표정 자체가 바뀌었다.

실제로 무한은 천하방을 해체한 이후 무척이나 홀가분한 상태였다. 손우자를 처리하는 일만 아니면 강호 유람이라도 떠났을 것이다.

“태자당과 사황자 간의 다툼이 겉으로는 잠잠해졌으나 물밑으로는 더욱 치열해지고 있더군요. 서로의 세력을 불리느라 혈안입니다. 그리고 관가에 조만간 황제가 세상을 떠날 거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퍼뜨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소문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육황자부에서 나온 듯합니다.”

육황자부라면 손우자가 배후에 있다는 뜻이다.

“태자당과 사황자 간의 암투를 전면전으로 끌어올리려는 수작이군요.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압박하는 거죠.”

“한 가지, 아직 확실치는 않은데 황제가 태자의 폐위를 결심한 듯합니다. 측근들이 폐위 명분을 마련하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한이 꽤나 놀랐다.

귀영이 정말 기방에서 열심히 첩보 활동을 한 모양이다. 귀영이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도에서는 많은 일들이 기방에서 이뤄지더군요.”

무한이 잠시 생각하곤 말했다.

“황제가 자기 목숨을 앞당기는군요. 폐위를 지시하는 순간 황제는 죽을 겁니다.”

그래야 혼란이 극대화될 테니까.

황제가 폐위를 명했는데 절차가 완료되지 않은 채 죽는다면 태자는 승복하지 않을 것이고, 사황자 또한 폐위 결정을 한 황명을 명분으로 태자를 공격할 것이다.

“스스로 자기 목을 치는 거로군요. 황제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황제가 사실을 알면 일적과 손우자의 목을 칠 텐데요.”

귀영의 말에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자기 운명입니다.”

무한은 굳이 황제의 운명에 간여할 생각이 없다. 원래대로라면 벌써 죽었을 사람이다.

또한, 사황자와 서로 개입하지 않기로 묵계를 한 바도 있다. 사황자는 병권을 받았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출병을 미뤘고, 그사이 마천이 물러갔다.

그때, 밖에서 남궁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주, 대학사께서 보자고 하셔.”

무한이 귀영의 방을 나와 남궁문유에게 갔다.

“동 대학사에게 들었네. 권력을 놓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데 어찌 그 나이에 그럴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하군. 이 나이에 조당에서 아귀다툼을 하고 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네.”

“황제에 따라 백성의 삶도 달라질 수 있으니 책임이 무거우실 겁니다.”

“명분은 천하의 안녕을 내세우고 있지만 갈수록 진흙탕 싸움이 되고 있네. 이제 와서 발을 뺄 수도 없는 형편이지.”

남궁문유가 탄식을 하였다.

“조만간 결판이 날 듯합니다.”

“……?”

“황제가 곧 세상을 뜰 것 같습니다.”

“자네가 그걸 어찌 아나? 이제 천기도 읽나?”

무한이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남궁문유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러잖아도 폐위를 도모한다는 소문에 태자가 분노하고 있는데…… 그런 내막이 있었다니.”

남궁문유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자네가 황실이나 조당의 일에 간여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아네. 허나 여러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만큼 한 가지만 도와주면 좋겠네.”

“…….”

“일적이라는 도사를 제거해줄 수 있겠나?”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를 제거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뿌리를 치지 않으면 가지는 또 자라게 마련이지요.”

“……”

“제가 온 것은 손우자를 처리하기 위함입니다.”

“그를 죽일 생각인가? 그는 육황자의 사가에 있다네. 아무리 자네가 절대고수라 하더라도 내성 육황자 사가의 철통같은 경비는 뚫을 수 없을 것이네.”

“…….”

무한은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차를 마셨다.

강유를 통해 받은 천기자의 서찰.

거기에는 할 수만 있다면 손우자의 목숨만은 붙여달라고 적혀 있었다.

천기자는 과거 오가촌의 참화가 자신의 무리한 작전 때문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오가촌을 거점으로 천하방 무력대가 버틴 덕분에 마천의 선봉을 꺾을 수 있었고, 정마대전의 반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앙심을 품은 마천이 오가촌을 피로 씻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천기자가 오가촌의 유일한 생존자 오경연을 제자로 받아들인 데는 뛰어난 오성도 있었지만 이런 자책감도 한몫하였다.

‘하지만 똑같은 경우를 당한 다른 사람은 정도를 걷고 있다. 손우자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기주 역시 비슷한 경우로 일가를 모두 잃었다. 그 역시 하가보를 미끼로 쓴 천하방과 정도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손우자와는 다른 행보를 걸었다.

그렇다고 천기자의 부탁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손우자에게 한 번의 기회를 줄 생각이다.

무한이 생각을 마치고 일어나며 말했다.

“그가 죽고 사는 건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어떤 경우든 그는 황도에서 사라질 겁니다. 이후의 일은 황실과 조당 사람들 몫입니다.”

***

손우자가 목욕재계를 하고 우의관을 갖춘 후 점을 쳤다. 점괘를 살펴본 손우자의 얼굴은 실로 무표정하였다.

‘화수미제(火水未濟)…….’

주역의 마지막 괘다.

잠시 후 손우자가 바깥을 향해 말했다.

“일적에게 전해라. 바로 거행하라고. 그리고 마차를 대기시켜라.”

바깥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손우자는 마차를 타고 육황자의 사가를 나와 내성을 벗어났다.

원단을 앞두고 외성의 번화가는 사람들로 분주하였다.

창밖으로 오가는 사람을 지켜보던 손우자는 갑작스런 두통에 품에서 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곤 중얼거렸다.

‘저렇게 살 수 있었는데…… 모두 허망하게 죽었지.’

천하방이 마을에 들어오고, 이어 마천이 쳐들어와서 접전이 이는 가운데 오가촌 수백 생명이 죽고 집은 불타버렸다.

폐허가 된 오가촌을 보며 남은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원한을 갚겠다고 맹세했다.

기회는 곧바로 찾아왔다. 무림의 기인으로 보이는 자가 만독곡의 후인을 찾아온 것이다.

손우자, 아니 당시는 오경연이었던 영악한 아이는 기인이 오가촌 참화 당시 죽은 표무를 찾아왔음을 알았다.

표무는 외가 쪽 친척인 오가의 한 집안에 맡겨져 있었고, 오경연 역시 어려서부터 어울려 지낸 그를 잘 알았다.

오경연은 환사 앞에서 표무 행세를 했다. 환사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만독곡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오경연을 받아들였다.

오경연은 만독곡 오로에게 독술과 고술 그리고 무공을 전수받았다.

오성이 뛰어난 오경연은 독술과 고술 등 잡학의 성취는 빨랐으나 무공은 머리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무공으로는 천하의 고수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오경연은 이내 독술과 고술 그리고 귀계에 치중하였다.

환노는 오경연이 무공을 포기하자 약간의 수작을 부려 천하방 천기자의 문하로 들였다. 천기자는 천하방과 마천의 접전으로 일가족을 모두 잃은 오경연을 외면할 수 없었다.

천하방에 들어가며 오경연은 손우자라고 자신의 별호를 짓고, 이름을 대신하였다. 오가촌의 복수를 이루는 날까지 본래 이름을 쓰지 않을 결심이었다.

천기자의 밑에서 수학하며 손우자는 대계를 설계하였다.

우선, 간신히 살려낸 동생 오경환을 마천으로 보내 마천의 책사가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만독곡의 잔여세력을 모으고 약물을 이용해 무자비한 괴인들을 길러냈다. 동시에 천하사패에게 고술을 펼쳤고, 기어이 천하제일인을 쓰러뜨렸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천하방 수뇌부와 장로들은 권력욕에 취해 손우자의 손바닥에서 놀아났다.

그랬기에 그도 방심을 했을지 모른다.

심무한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성장할 줄 알았다면 고강후가 아무리 반대했더라도 제거했을 것이다.

어쩌면 사부 천기자의 경고 때문에 주저했을 수도 있다.

제자가 독수를 쓴 걸 알면서도 사부는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한 마디 경고를 했을 뿐이다.

- 심무한을 죽이는 순간 너도 죽을 것이다.

그는 사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사부 천기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기에 두려워했다.

그리고 결국 발목을 잡혔다. 동생이 배신을 하고, 마천은 패퇴하였다.

예상대로라면 그 자리에서 마천과 천하방, 정파가 사생결단을 하여 고원을 피로 물들여야 했다.

손우자는 동생의 선택을 원망하지 않았다.

어려서 헤어진 후 한 번도 보지 못한 동생이다.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린 데는 오가촌의 복수보다 더 소중한,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손우자가 다시 창밖 거리를 보았다. 새 옷을 입은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부인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내게 지켜야 할 게 있던가?’

손우자의 마차는 외성을 벗어나 한때 그가 머물렀던 도관으로 향했다.

도관 암자에 당도한 손우자는 마차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을 호위했던 그림자들마저 떠나보냈다.

그들이 있어봐야 무한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손우자다.

천주가 죽은 이상 당금 천하제일인은 무한이다. 십만대군으로도 그를 막을 수 없다.

손우자가 암자에 정좌한 채 무한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심무한이 천하방을 해체했다.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행보였다.

마천과의 전쟁으로 몰락한 건 아니지만 그가 평생 원한을 품은 천하방의 해체 소식은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가 천하방의 주인이었어.’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주인만이 자기 집을 정리할 수 있는 법이다.

그날 저녁.

도관에 조종이 울렸다.

도사 하나가 찾아와 고했다.

“황제께서 승천하셨다고 합니다. 잠시 시끄럽더라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손우자는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패를 던졌다. 자신이 귀결을 지을 수 있는 패가 아니다.

화수미제.

만사가 완성된 듯하나 결국 미제로 끝나고, 주역 육십사괘는 순환한다.

밤이 깊어 삼경이 지날 무렵.

차디찬 겨울 공기가 깨어지는 듯 흔들리더니 무한의 신형이 암자에 나타났다.

끼이익.

암자의 문이 열리며 방안에 단정히 앉아 있는 손우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방안의 손우자와 마당의 무한이 서로를 바라봤다.

무한이 말했다.

“준비는 되었소?”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냐는 질문에 손우자의 눈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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