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담철조와 공곤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무한이 천하방을 해체하는 진정한 이유가 무력대를 없애고자 하는 데 있음을 알고 있었다.
신검대와 무적대 역시 무력대였고, 그들의 뿌리이기도 했다.
“신검대와 무적대도 해체하실 생각이십니까?”
“방주의 행보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애매한 신분이었다. 검천부의 호법이었으나 신검산장의 장로로 위촉되었다. 그리고 신검대와 무적대의 정신적인 지주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무한의 성품으로 보아 신검산장의 행보를 유추할 수 있었다. 무력대라는 존재가 거추장스러울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 없습니다.”
무한의 말에 두 사람이 흠칫, 놀랐다. 무한이 가볍게 탄식을 하며 말했다.
“한번 세상에 나온 것을 인위적으로 없앨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필요하지요. 먼저 칼을 내려놓으면 상대도 내려놓을 거란 생각을 했다면 신검산장을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무한의 말에 두 사람이 격동하였다. 그들은 무인이었고, 평생 무인으로 살아갈 자들이었다. 무인에게는 무인의 길이 있다.
“천하방 무력대를 해체했지만 대부분은 정천맹으로 갈 겁니다. 그들은 이미 무력대에 익숙한 무인들이니까요.”
“그러면 굳이 천하방을 해체할 이유가 없지 않았습니까?”
공곤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는 정천맹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고, 천하방 무력대의 힘이 옮겨가는 걸 마뜩잖아 했다.
그러니 무한이 천하방을 해체한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내손에 든 걸 남에게 쥐어주는 셈이니까.
무한이 두 사람을 잠시 보았다.
두 사람은 천하방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천하방 해체의 진정한 이유를 들을 권리가 있었다.
무한이 담담히 말했다.
“천하방을 해체한 가장 큰 이유가 끊임없이 적을 만들고 그 가운데 존재의 정당성을 가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천하방은 강호의 분쟁을 조정한다는 명분 아래 계속 전투를 해왔습니다. 심지어 적이 될 수 있다 예상하고 미리 토벌하기도 했지요.”
공곤이 무적대를 끌고 운남까지 들어간 이유가 그것이었다. 운남 무림이 향후 중원 무림에 위해가 될 거라 판단한 군사부가 출정을 의뢰한 것이다.
“이대로 가면 대파와 세가와도 충돌할 게 분명합니다. 대파와 세가가 이미 천하방을 경계하는데, 천하방이 없는 적을 만들어서라도 존재하다 보면 반드시 그리되겠지요. 그러면 중원 무림은 혼란에 빠질 겁니다.”
담철조나 공곤이 내심 감탄하였다.
천하방 해체에 이런 깊은 뜻이 담겨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무한은 중원 무림의 속성까지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한이 담철조와 공곤에게 말했다.
“두 분은 신검대와 무적대를 이끌고 산장으로 먼저 가시지요. 그리고 신검무적대를 그 어느 무력대보다 강한 검으로 조련해주시기 바랍니다. 칼은 쓰지 않더라도 늘 닦아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칼이 녹슬면 무인의 정신도 스러지지요.”
평생 무력대주로 살아온 공곤이 씨익, 웃었다.
“아주 단단히 담금질을 해놓겠습니다.”
***
천하방 해산 소식을 듣고 천기자와 함께 낙향했던 강유가 찾아왔다.
텅 빈 전각만 남은 천하방 내성을 본 강유가 탄식하였다.
“기어이 천하방을 해체하였구나.”
“아버지가 아쉬워할 줄은 몰랐네요.”
옆에 있던 소소가 그런 강유를 보고 의외라는 듯 말했다.
“나는 천하방의 취지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권력을 쥐고자 혈안이 된 무리가 못마땅했지.”
강유가 딸에게 말하곤 신기한 물건을 보듯 무한을 보며 말했다.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을 놓을 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
그러면서 무한에게 서찰을 건넸다.
“아버님이 네게 보내신 것이다.”
무한이 강유가 내민 서찰을 꺼내 읽었다. 다 읽고서 강유에게 말했다.
“천기자 어르신의 뜻은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한 번의 기회를 줄 것입니다. 그러나 결말이 어찌될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소소는 서찰의 내용이 궁금했으나 무한은 말해주지 않았다.
강유가 탄식을 하며 말했다.
“그가 선택하기 나름이겠지.”
강유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폐허만 남은 곳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구나. 외성 객잔에 머물란다.”
***
이윽고.
천하방 해산을 맡았던 군사부 사람들마저 떠나자 내성은 전각을 관리하는 사람들만 남았다.
무한은 남궁우, 소소와 함께 마지막으로 내성을 떠났다.
쿠쿵!
무한이 나가자 내성 문이 닫혔다.
내성 문 앞에는 천하방주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온 이들이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무한이 천하제일인이었다.
무한이 운집한 사람들을 일별하고는 발을 내디뎠다.
사람들이 양옆으로 물러서며 길이 열렸다.
무한은 사람들이 내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스스로 천하제일인의 자리에서 내려온 무한을 경외감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장내에는 침묵만 흘렀다.
성밖마을에도 수많은 인파가 도열하고 있었다. 그들은 배웅을 하듯 말없이 무한의 뒤를 따랐다.
무한의 걸음이 성밖마을 앞에 서 멈췄다.
뒤를 따르던 이들이 무한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무한이 거대한 돌비석을 올려다보았다.
천하제일방.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직접 새긴 거대한 돌비석.
무한이 천천히 손을 들어 휘저었다.
그러자 돌비석의 전면이 스러지며 천하제일방이라는 글귀가 사라졌다.
이를 지켜보는 수많은 이들은 한 시대가 종언을 고했음을 깨달았다.
***
천하방의 해체가 중원 무림에 알려지자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천하방 지부가 하나둘 정리되는 걸 보고 사실임을 깨달은 이들은 혼란에 빠졌다.
천하방은 무림인들의 머릿속에 드높은 곳에서 군림하며 중원 무림의 질서를 지키는 존재였다.
폐해가 존재하나 이는 권력을 쥔 자의 당연한 행태라 여겼고, 그 또한 천하방 자체로 자정해 나갈 것이라 믿었다.
그러기에 천하방은 좋든 싫든 중원 무림의 상징이었고, 분쟁이 생기면 으레 천하방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 정신적 지주가 사라지는 셈이다.
최근 천하방이 감숙에서 대승을 거두고 마천을 몰아냈다는 낭보가 퍼지던 시기였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정천맹은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감숙에서 대패하고 권왕을 잃은 정천맹은 무림맹으로 개칭하였다. 이는 천하 무림을 관장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무림맹은 천하방 본방이 있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 초대 맹주로 패왕 형일천이 올랐다. 이어 무림의 명숙과 고수를 초빙하여 맹의 규모를 차근차근 키워나갔다.
무림맹은 무림의 뜨거운 화제로 부상하였다.
무림맹의 행보는 천하방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천하방이 소속 문파의 연합적인 성격이 강했다면, 무림맹은 맹원 자체를 중시했다.
무림맹은 대파와 세가는 물론이고 모든 문파로부터 독립적인 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맹원으로 가입하는 무인들에게 유사시 출신 문파보다 맹의 임무를 우선하겠다는 서약을 받았다.
이는 무림맹이 대파와 세가를 견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당연히 대파와 세가는 반발하였다.
반면, 그동안 대파와 세가로부터 설움을 받았던 중소문파 출신 무인들은 환호하였다.
그러면서 자파의 무인들을 맹원으로 집어넣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아무리 독립적이라지만 자파 출신의 무인이 요직에 있으면 도움이 될 것이란 계산에서였다.
더욱이 무림맹이 출신은 따지지 않고 능력 위주로 대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실제로 한때 천하방 문지기였던 우곽이란 자가 무력대주가 됐다.
우곽은 천하방이 해산되자 일선문 재건에 나섰으나 옛 일선문이 있던 자리는 이미 여러 문파가 진출하여 자리를 잡기 어려웠다.
그때, 무림맹이 천하방의 마지막 전투, 감숙 대접전에서 세운 우곽의 전공을 인정하여 무력대주로 초빙하였다.
우곽은 무림맹 인근에 일선문을 세우는 조건으로 무림맹 무력대주로 들어갔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낭인들 사이에는 문지기도 실력만 인정받으면 무력대주가 될 수 있는 곳이란 소문이 퍼졌고, 천하의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
육황자의 눈빛이 번뜩였다.
“오 선생의 대계가 생각보다 시일이 걸리는구려?”
질책성이 담긴 물음이었다.
당장이라도 혈전을 벌일 것 같던 태자당과 사황자가 이상하리만치 조용히 지내고 있다.
아직 어린 육황자이지만 황제 외에 무릎을 꿇을 일이 없이 자라왔기에 절로 흘러나오는 오만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손우자는 내심 속이 뒤틀렸으나 담담하게 말했다.
“시일이 예상보다 길어진다는 건 두 황자가 신중하게 움직인다는 뜻이지요. 아마도 일합으로 승부가 날 겁니다.”
손우자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육황자도 더 질책하지 못했다. 그러나 낯빛은 처음 손우자를 대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귀한 선물인줄 알고 받았는데 별게 아니라는 걸 알고 흥미를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육황자의 홀대에도 손우자는 내색하지 않았다. 정중하게 예를 취하고 물러나왔다.
조만간 황제가 죽을 것이다. 그러면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태자당과 사황자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황실의 파국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
손우자의 관심은 육황자가 아니라 무림에 있었다.
천주의 죽음과 마천의 갑작스런 퇴진은 그로서는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더욱이 마뇌가 자신을 저버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천려일실.
수천 가지를 돌아봐도 하나를 놓치면 결국 일을 그르치게 된다는 뜻이다.
어린 심무한을 제거하지 못한 것에 이어 친혈육인 마뇌의 심기를 살피지 못한 게 대계를 그르쳤다.
예상대로라면 천주와 심무한이 동귀어진하고 마천과 천하방이 동시에 몰락했어야 했다.
실제로 무한이 막지 않았다면 구대문파연합과 마천의 정예가 충돌했을 것이고, 그러면 천하방 또한 외면하지 못하고 싸움에 말려들어갔을 것이다.
결국 심무한이란 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게 패인이었다.
게다가 놈은 천하방을 해산해버렸다. 오랜 세월 천하방과 마천의 동귀어진을 계획해왔는데 천하방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손우자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오가촌 수백 생명은 이제 어디 가서 핏값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냐?’
***
귀영은 대학사 남궁문유의 저택에서 이단아로 핍박 받았다.
점잖은 문가의 기풍에 어울리지 않는 행보 때문이었다. 툭하면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오고, 낮에는 퍼질러 잤다.
그럼에도 감히 누구 하나 제지하지 못했다. 귀히 대하라는 남궁문유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오시가 되도록 퍼질러 자고 있는데 왠지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벼락같이 일어나 비수를 뽑자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정양을 하라고 놔두었더니 술독에 빠져 지냈더군요.”
무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귀영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말했다.
“얼마나 퍼마셨으면 아직도 술 냄새가 나는 겁니까?”
“그러게 왜 저를 버리고 가신 겁니까? 마천과의 대전을 함께 하지 못하다니…… 평생 원망할 겁니다.”
귀영이 퉁명스레 말했다.
“그래서 황도의 색주가를 평정하고 다녔다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