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마천의 정예가 천산으로 돌아가자 중원에 스며들었던 마천, 천산파의 세력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
신검무적대와 십이무력대는 별다른 접전 없이 천하방으로 귀환하였다.
“천하대전을 소집하겠소.”
무한은 천하방으로 귀환하자마자 천하대전을 소집하였다.
방주가 천마를 잡고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에 각파의 수장들까지 모두 천하방으로 달려왔다.
천하방 무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경쟁 방파였던 정천맹의 대패를 단숨에 뒤집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몰려든 문파의 수장들이 무한을 보고자 청했다. 그간 나이 어린 방주의 취임에 고까워하던 이들까지 무한 앞에 줄을 섰다.
그러나 무한은 천하대전이 열리는 날까지 칩거하였다.
이윽고 천하대전의 날이 밝았다.
무한은 천하대전으로 가기 전에 앞서 검천전을 들렀다.
천하방에 와서 처음 할아버지를 만났던 집무실과 무수한 밤을 밝혔던 서재, 그리고 밤마다 찾았던 비밀연공실 등…….
‘할아버지, 그날이 왔습니다.’
할아버지 심양조에게 천하방을 해체하겠노라고 말했던 그날을 떠올리며 무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눈앞의 이 모든 걸 놓아야 한다.
그러나 무한은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두웅!
오시를 알리는 큰 북소리에 무한이 천하대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하대전 광장은 무수한 인파로 뒤덮였다. 십 년래 천하대전에 이리 많은 이들이 모인 건 처음이었다.
무한이 정문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쭉 갈라서며 일제히 무한을 향해 읍을 하였다.
무한이 정중하게 예를 취하고 사람들이 열어놓은 길을 따라 대전으로 올라갔다.
대전 안에도 인파가 빽빽하였다.
장로들과 군사부, 집법당, 만재당, 감찰단 등 집행기관의 장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여기에 각 문파의 수뇌부들까지 모두 참석하였으니 너른 대청이 꽉 찼다.
무한이 가운데 난 길로 걸어가 단상에 올랐다.
단상에 서니 대전과 열린 문 너머 광장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대전 한쪽 수뇌부들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일선문의 우곽이 눈에 들어왔다.
우곽은 십이무력대의 대주로 참전하여 감숙에서의 싸움에서 약간의 부상을 입었다. 흰 붕대로 팔을 칭칭 감고 있는 우곽이 형형한 눈빛으로 무한을 쳐다보았다.
모두가 무한만 주시하였다.
이윽고 무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마천도들은 천산으로 돌아갔소.”
나직하고 담담한 한마디였으나 대전은 물론 광장에 있는 이들까지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와아!”
광장에서 함성이 일었다.
무한은 잠시 함성을 듣다가 손을 들었다.
함성이 잦아들고 모두가 다시 무한을 주시하였다. 무한의 표정으로 보아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걸 알고 기대하였다.
그 모두의 눈빛을 받은 무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천과의 전쟁을 끝으로 천하방은 해산할 것이오!”
순간 장내에 고요가 흘렀다.
자기가 뭘 잘못 들었는지 의아한 나머지 옆 사람을 쳐다보는 이도 있었다.
그러다 광장부터 점차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방을 해체한다고? 왜?”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나도 그렇게 들은 거 같은데?”
수군거림이 대전까지 퍼졌다.
“방을 해체할 수도 있나?”
누군가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무한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중원 무림에 천하방이라는 명칭은 사라질 것이오.”
“방주, 그게 무슨 말씀이오?”
대장로 갈천경이 흥분하여 물었다.
“들으신 대로요. 천하방은 사라졌으니 각자의 문파로 돌아가시기 바라오.”
“아니, 그럴 수 없소! 아무리 방주라도 방을 마음대로 해산할 권리는 없소!”
장로들이 일제히 일어나 항변하였다.
장로들뿐만이 아니었다. 참관하고 있던 군사부와 감찰단 등 주요 집행기관과 각 문파의 수뇌부들까지 반대하였다.
“방의 체계를 일신하고 새롭게 서려는 이때 방을 해체한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무한은 잠시 그들이 할 말을 하게 놔두었다.
“…….”
무한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반론이 점차 수그러들었다.
대전이 침묵하자 광장의 술렁거림도 잦아들었다.
무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두 자신의 문파로, 집으로 돌아가시오.”
나직하지만 설득도 타협도 없는 단호한 한마디였다.
거역할 수 없는 묵직함이 모두의 가슴을 짓눌렀다. 마음속에서는 안 된다는 갖가지 항변이 일었으나 이내 스러져갔다.
무한의 한마디는 듣는 이마다 다르게 다가왔다.
그간의 행태에 대한 질책으로 듣는 이도 있었고, 왠지 모를 족쇄를 풀어주는 희망으로 듣는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그동안 누렸던 이권이 사라지는 안타까움과 절망을 느꼈고, 또 다른 이는 새로운 삶이 눈앞에 펼쳐지는 걸 보았다.
그야말로 광장에 모인 사람 수만큼 각기 다른 감정들이 교차하였다.
모두가 말문을 잃고 무한의 한마디를 감당하고 있을 때, 갑자기 대전 한쪽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 짝! 짝!
모두가 바라보니 천무관주 동중용이 노구를 이끌고 박수를 치며 들어오고 있었다.
노인이 외로운 박수를 그치고 창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회자정리(會者定離)!”
동중용이 정색을 하고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방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가? 자네들이 붙잡고 있는 터럭만 한 것을 그리도 지키고 싶은가? 방주가 무엇을 놓았는지 정녕 모르겠는가?”
동중용의 선기에 찬 일침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깨달았다.
천하방을 붙잡고 있는 건 자신들의 욕망이었다는 것을.
협으로 의를 세우고, 의로써 세상을 구한다는 천하방의 이념을 명분으로 자신들의 안녕을 도모해왔다는 것을.
지금 이 자리, 무한이 해산 선언을 외치기 전까지도 논공행상을 바랐던 이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감찰단 은진언이 앞으로 나서더니 무한을 향해 읍을 하였다.
“방주의 마지막 명을 받아 노부 은진언,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러자 혼원문주 홍주해도 나섰다.
“너무 오랫동안 문을 비웠소. 이제 내가 혼원문 사람인지 천하방 사람인지조차 헛갈리오. 나는 혼원문도였고, 앞으로도 혼원문도일 것이오.”
이어 무한을 따르는 방파의 수장들이 일제히 예를 취하며 외쳤다.
“초죽문은 방주의 명을 따르겠소. 다만, 언제든 필요할 때 초죽문을 불러주시오.”
“숭양검문은…….”
줄줄이 이어지는 수장들의 선언에 장로들과 집행기관 수장 몇몇이 당황하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천하방은 문파들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었다는 걸.
그런데도 장로전과 집행기관은 문파들 위에 군림해왔다.
한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절감한 대장로 갈천경이 탄식하였다.
‘이로써 끝인가?’
무한이 대전과 광장의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정중히 예를 취했다.
“모두, 무사히 돌아가시오.”
***
천하방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해산 선언에 반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여러 문파가 탈퇴를 선언했으니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남궁우가 기가 막혀했다.
“이걸 염두에 두고 체제를 개편한 걸까?”
무한은 공들여 체제까지 개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하방을 해산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게 신의 한 수였다. 기존의 체계를 유지했더라면 기득권을 지닌 장들이 일사불란하게 반발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새로이 개편된 체제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권한이 집중된 자가 없으니 구심점 역할을 할 이가 없었던 것이다.
체제 개편으로 기득권층을 한번 뒤흔들고, 이어 치명타를 먹인 셈이다.
무한은 천하방의 재산을 정리하여 각 문파에게 규모에 따라 공평하게 넘길 것을 명했다.
형소가 정천맹으로 넘어갔기에 남궁우와 소소가 만재당과 함께 모든 일을 떠맡았다.
이윽고, 남궁우와 소소가 무한에게 재산배분안을 가져왔다.
무한이 이를 살피다 의아하여 물었다.
“동 관주께는 왜 배분이 없지?”
“본인이 거절하셨어. 천무관주로 잘 먹고 잘 살았는데 무슨 돈을 또 받느냐며 그냥 떠나셨어.”
천하방의 해산이 본격화되자 하나둘 떠나는 이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천무관주 동중용이 떠났고, 이어 감찰단주 은진언이 낙향하였다.
무한은 문파가 없이 천하방에 소속된 자들에게도 일정한 몫을 챙겨 주었다.
“그런데 내성은 어찌할 거지? 일일이 쪼개서 팔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
천하방 외성은 이미 외지인들에게 배분하였다. 하지만 내성 또한 천하사패가 동시에 거주하고 천하방 주요기관이 모두 들어찰 만큼 넓었다.
“살 사람이 있을지도 의문이야. 천하방도 없는데 여기 와서 누가 지내려 할까?”
그러자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저기 사줄 사람이 오고 있잖아.”
남궁우와 소소가 보니 형소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형소?”
“정천맹에게 넘기게?”
남궁우와 소소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무한을 보았다.
“대파와 세가에게서 이번에 한몫 단단히 뜯어내야지. 그간 천하방 덕에 편히 살았잖아?”
무한이 말했다.
그사이 형소가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잠깐, 천하방을 내다판다며? 내성, 내성은 어찌할 거야?”
천하방을 해산하고 재산 정리를 한다는 소식에 형소가 불철주야 달려온 것이다.
정천맹의 소재지를 군산에 정한 것은 권왕이었다.
군산은 사방이 호수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랄 수 있었으나 동시에 왕래가 불편하기도 했다.
게다가 정천맹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전각이며 시설이 완비되지 않았다.
형소가 천하방 내성을 눈독 들이는 건 당연했다.
형소의 물음에 남궁우가 정색을 하고는 말했다.
“흑천이 팔라더라. 어마어마한 금액을 제시해왔지. 너는 얼마 부를래?”
벙찐 형소를 보며 남궁우와 소소가 웃음을 터뜨렸다.
무한이 천하방 재산배분안에 수결을 하였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매각하는 것뿐인가?”
천하방은 본방뿐만 아니라 각지에 지부가 있고, 지역 문파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에 한순간에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천하상단과 백가상단, 그리고 남궁세가의 방계가 운영하는 휘주상단 세 곳에 의뢰하여 정리를 맡기기로 하였다.
재산배분안이 장로회의에서 통과하자 문파들도 하나둘 천하방을 떠났다.
떠나는 문파의 수장들은 일일이 무한을 찾아와 예를 취했다.
일선문의 우곽이 찾아왔다.
“방주께 받은 은혜를 갚지 못하고 떠남을 용서하시오.”
“은혜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일선문이 다시 강호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방주 덕분이오. 언제든 불러 주시오. 일선문이 선봉에 서겠소.”
우곽이 읍을 하고는 떠나는 뒷모습을 무한은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는 한 사람이었지만 마지막으로 떠나는 문파이기도 했다.
이로써 천하방이 해산한 것이다.
그날 저녁.
무한이 무흔과 운객을 불러들였다. 정리한 재산의 일부를 내놓으며 말했다.
“두 분도 그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나, 나보고 어디로 가란 말이오.”
오갈 데가 없는 운객이 당황하였다.
무한이 대답 않고 무흔에게 먼저 말했다.
“이제 흑월에 가보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흑월에도 주인이 필요합니다.”
무흔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어서서 예를 취했다.
“그동안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낭을 챙겨 방을 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무한을 보다 한마디 하였다.
“잘 자라 주셔서 감사하오.”
어릴 적부터 지켜본 무흔으로서 꼭 남기고 싶었던 말이다.
무흔이 사라지자 무한이 운객을 향해 말했다.
“신검산장에 구름이 노닐 만한 연못이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