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얼마 전 식량과 양떼를 몰고서 무한을 찾았을 때 몇 마디 나눈 후, 마뇌는 마지막에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갔다.
- 천주는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마저도 믿지 않지요. 그래서 끊임없이 정진하고 계십니다.
당시는 천마의 비무행을 두고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화의 마지막에 뜬금없이 흘렸기에 의아하게 여겼다.
성벽에 앉아 천마와의 일전을 준비할 때 무한은 불현듯 마뇌의 말을 떠올렸다.
‘자기 자신마저도 믿지 않는다.’
그 한 마디가 오늘의 승부를 가른 셈이다.
천주는 강했다. 그러나 자신의 강함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스스로 천마의 자리에 올랐다고 공언한 것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함이었다.
무한의 비도는 천주의 자신에 대한 의심을 파고들었다.
‘믿는다. 스스로를 믿는다.’
무한의 비도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반드시 생사를 가르리라.
확신과 의심.
그게 실력의 차이를 넘어 생사를 갈랐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천주가 스스로 목숨을 내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주!”
천주의 사대수신호위가 일제히 몸을 날려 왔다.
마룡과 혈조, 풍호와 흑귀는 천주가 길러낸 절대의 경지를 넘보는 고수들이었다.
“너희는 내가 처리해주마.”
졸지에 크나큰 상대가 쓰러지자 혈랑이 허탈과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고함을 지르며 혈랑아를 앞세워 날아들었다.
고벽후와 소마, 피전격 역시 몸을 날렸다.
천주를 쓰러뜨린 뒤 멍하니 마천 진영 쪽을 보고 있는 무한이 위험해 보였던 것이다.
실제로 무한은 내면의 세계에 침잠되어 있었다.
자신의 믿음이 천주의 의심을 갈랐다는 것에서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런데 천주가 죽어가며 쏘아본 잿빛 눈이 환영처럼 머릿속에 박혔다.
그건 천주가 죽기 직전 깨달은 무언가였으며, 무한의 의식을 어두운 심연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무한은 천주가 남긴 죽음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멍하니 마천 진영을 보고 있는 듯 보였을 뿐이다.
“…….”
무한의 상태가 이상하자 운객과 무흔이 조용히 무한 옆으로 서고, 남궁무룡과 황산여음 역시 가까이 다가와 기운을 퍼뜨려 무한의 주위를 보호하였다.
채챙!
사대수신호위가 절대의 경지를 넘본다지만 고벽후 등은 이미 벽을 넘어선 자들이다. 고수일수록 미세한 격차가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쾅!
“크윽.”
사대수신호위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갔다.
심군하가 선 채로 죽은 천주와 쓰러지는 사대수신호위를 보며 탄식하였다.
싸움이 끝나자 진소향이 무한에게 다가갔다.
진소향이 가볍게 무한의 손을 쥐었다.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쥐어보는 손이다.
순간, 무한이 깨어났다.
‘어머니?’
동시에 무한이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하마터면 심마의 세계로 빠져들 뻔했는데 공교롭게도 진소향이 깨운 셈이다.
그리고 무한이 깨어나는 순간 천주의 시신이 뒤로 넘어갔다.
쿵!
진소향이 쓰러진 천주의 시신을 흘깃 보고는 아들의 손을 이끌었다.
“이제 돌아가자.”
무한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채지 못한 진소향이 잔잔하게 말했다.
무한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어렸다.
흑선수사가 눈에 댔던 기나긴 통을 뗐다.
앞뒤로 유리가 박힌 낯선 물건은 멀리까지 내다보는 천리경이다.
“천주가 죽었소! 천하방주가 이겼소!”
“와아!”
흑선수사의 말에 흑월도가 소란을 떨었다.
상황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구대문파연합 방각과 청운이 흥분하였다.
“모두 출진을 준비하라!”
천주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용기백배한 구대문파연합 무인들이 진형을 이뤄 마천도들을 향하려 했다.
그때, 남궁우가 앞을 가로막았다.
“멈추세요.”
방각이 남궁우를 보고 두터운 눈살을 찌푸렸다.
“천하방주의 명입니다. 누가 이기든 마천도와의 접전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천마가 쓰러졌소. 지금이야말로 탕마멸사의 호기요.”
구대문파연합 진영에서 누군가 외쳤다.
“천하방주가 졌다면 마천도가 우리를 그냥 놔두었겠소? 아니, 천마가 죽었는데 마천도들이 복수하려 할 게 아니오?”
그러나 남궁우의 뒤로 신검무적대가 서고, 이어 천하방 십이무력대가 서자 구대문파연합도 주춤하고 나아가지 못했다.
담철조가 말했다.
“천하방주의 명이다!”
짧고 묵직한 한마디가 구대문파연합의 기세를 압도하였다.
그러자 남궁세가 소가주 남궁악이 말했다.
“천하방주의 명이라면 남궁가는 빠지겠소.”
그러면서 무력대를 한쪽으로 뺐다.
“소가주! 무슨 짓인가? 일치단결해도 모자라는 판에…….”
청운이 눈살을 찌푸리고 뭐라 하는데, 흑선수사가 한마디 하였다.
“다 이긴 싸움에 숟가락 얹는 구태의연한 정파의 행태를 여기서 또 보는군.”
그러자 흑천의 우사가 끼어들었다.
“구대문파연합이 삼천 정예라지만 저쪽은 마천의 정예 오천이니…… 동귀어진하면 우리야 좋지. 말리긴 왜 말려.”
흑천도 흑월도 발을 뺄 생각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자 난주 무림의 대표 격인 동사철도 한발 물러섰다.
무한을 따르는 세력이 연이어 물러나자 오로지 구대문파연합의 힘만으로 마천도를 상대해야 하는 형국이 됐다.
방각이 탄식을 하였다.
“마의 근본을 뽑지 못하다니 향후 두고두고 우환거리가 될 것이오.”
그러자 독왕이 말했다.
“방장, 그 걱정은 후대가 하게 놔두시오. 세상이 열린 후 이제까지 마가 뿌리 뽑힌 적도 없고, 정파가 무너진 적도 없소.”
당가마저 빠지겠다고 하니 방각과 청운도 더는 우길 수 없었다.
“퇴각한다.”
방각과 청운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구대문파연합과 함께 돌아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소소가 형소에게 말했다.
“천주를 쓰러뜨렸는데 치하할 마음이 일도 없나보네. 저리 오만한 대파들이 득실대는 정천맹으로 가겠다고?”
어지간하면 그냥 신검산장에 눌러앉는 게 좋잖아, 라고 덧붙이려는데 형소가 먼저 말했다.
“나 혼자는 힘들지. 네가 도와준다면 몰라도.”
“어?”
자존심 강한 형소가 도움을 요청하니 소소가 내심 놀랐다. 그러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아니면 누가 널 돕겠어. 우리는 동문이잖아?”
옆에서 듣고 있던 남궁우가 구시렁댔다.
“쳇! 동문 없는 사람 서러워 살겠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누님, 동문은 아니지만 전우가 옆에 있잖소.”
“뭐? 누님?”
남궁우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당전수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누가 네 누님이란 말이냐? 아니…….”
“언제까지 남장을 하고 돌아다닐 거요. 남궁지낭이 여자라는 게 온 무림에 파다하게 퍼졌는데. 그러다 시집가기 어렵지. 그러니 이제부터 나는 누님이라 부르기로 했소.”
“너…….”
남궁우가 소매를 걷어붙이는데 독왕이 한마디 하였다.
“계집애야, 말조심해라. 당가의 가주다.”
“아니, 어르신까지?”
남궁우는 감히 독왕에게 맞서지 못하고 벌건 얼굴로 씩씩거리기만 하였다.
사대수신호위마저 쓰러지자 천주의 친위대가 동요하였다. 죽기를 각오하고 돌진하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외쳤다.
“멈춰라! 그분이 이제 마천의 천주시다.”
모두 돌아보니 마뇌가 두 대의 마차를 몰고 오고 있었다.
친위대를 지나 성채 앞에 당도한 마뇌가 쓰러진 천주를 보곤 탄식하였다.
“천마께서 귀의하셨다. 육신을 모셔라.”
친위대들이 천주의 시신을 마차에 수습하였다.
마뇌가 다가오더니 소마를 향해 읍을 하였다.
“천주를 모시겠습니다.”
소마가 의외라는 듯 마뇌를 보았다.
“십이호교가문의 팔천대군이 대패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이를 다시 천산으로 모을 분은 천주뿐입니다.”
마뇌의 말에 소마가 굳은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늘 웃던 얼굴이 진중해지니 그가 얼마나 격동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무한이 다가가 말했다.
“천산에 새 하늘이 열리겠군요.”
소마가 시선을 내려 무한을 보았다.
“내 손으로 차지한 자리가 아니니 버겁군.”
“아닙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있었기에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었습니다. 혁련후는 여기 모든 이들을 상대한 셈이지요.”
소마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천산의 하늘을 보러 오지 않겠나?”
“반드시 가겠습니다. 그때는 천하방주가 아닐 겁니다.”
소마가 무슨 뜻인지 알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벽후와 혈랑도 다가왔다. 혈랑이 부러운 듯 중얼거렸다.
“평생 소천주만 하다 끝나는 줄 알았는데 마천의 천주라니.”
“천주, 자리 잡으면 한번 오시오. 나는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오.”
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이어 소마가 자신을 지켜보는 심군하와 남궁무룡, 황산여음을 바라봤다.
“…….”
사룡삼봉의 일원들은 서로 말없이 눈빛만 오갔다.
이윽고 소마가 심군하에게 말했다.
“심 형, 그 일을 막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렸소. 이렇게 무사하니 다행이오.”
심군하는 담담하게 웃을 뿐이었다.
소마가 언급한 그 일이 천주가 불망객을 보내 심군하를 죽이려 한 것임을 아는 이들만 알아들었다.
소마가 멀리 백 리 밖에 포진한 광풍사천대를 향하여 소리쳤다.
“형제들아, 집으로 가자!”
***
소마가 마천도를 데리고 떠난 뒤 남은 이들이 성채로 들어갔다.
백 리 밖에 떨어져 있던 이들이 몰려와 양과 돼지를 잡고 곳곳에 모여 술판을 벌였다.
무한도 고벽후와 혈랑과 함께 자리하였다.
“고 마귀, 정말 여기서 지낼 거야?”
“네놈이 다시 마적질을 하는지 감시해야 하지 않겠냐?”
“나는 고 마귀가 마적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천하방주가 천하방을 해산할 거라며? 그럼 누가 지원을 해주지? 배고픈 데는 장사가 없어. 결국 상단을 노리게 될 거야. 다, 그렇게 해서 마적이 되는 거라고.”
“하하. 든든한 후원자가 생겼으니 걱정 마라. 이제 여기는 정천맹 감숙지부다.”
“엉? 정천맹이 왜 여기서 나와?”
혈랑이 어이없어 하며 무한을 보았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난주 흑도의 수장은 조심해야 할 거요. 정천맹은 천하방과 달리 흑도에게 아주 가혹하다오.”
“흥! 건방지게 굴면 중원으로 달려가 깨버리지.”
혈랑이 호언을 하며 술을 벌컥, 들이마셨다.
무한은 담담히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심군하와 진소향, 피전격과 남궁무룡, 황산여음 등 사룡삼봉의 일원들은 따로 술자리를 가졌다.
기파로 주위를 감싸고 있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외에 멸마대, 신검무적대, 천하방 십이무력대, 남궁세가와 당가, 난주무림과 흑천도까지 성채 안팎에서 먹고 마시는 중이다.
흑선수사와 흑월도들만 슬그머니 사라졌다. 아무래도 피전격과의 관계가 껄끄러우니 빠진 것이다.
“하하하!”
“그냥 마시다 죽자!”
마천도들이 사라진 지금 술자리는 며칠 전과 사뭇 달리 흥이 넘쳤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무한이 밤하늘을 보았다.
무수한 별들이 고원을 비추고 있었다. 다른 별보다 유난히 밝은 별이 있는가 하면 희미한 별도 있었다.
그런 별 하나 하나가 무리를 지어 은하수를 이룬 밤하늘은 보석으로 수를 놓은 듯했다.
‘전쟁이 끝났어.’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
‘손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