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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23화 (223/250)

223화

해질 무렵, 마뇌가 세 대의 수레에 술과 곡식을 싣고 양을 몇 마리 몰고 왔다.

“소천주께 드리는 성의입니다.”

마뇌는 광풍대에 곡식과 양을 전하고, 정작 찾기는 무한을 찾았다.

“무슨 일이오?”

“천하방이 북진하고 있더군요.”

운객을 보낸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벌써 북진 소식이 왔다면 소소와 남궁우, 형소가 독자적 판단으로 올라오는 것이리라.

‘마천의 주력이 여기 모여 있다는 걸 들은 모양이구나.’

손발이 맞는 동료가 있다는 건 꽤나 든든한 일이다.

“천하방은 정천맹 패잔병과 난주무림을 규합하여 세를 불려가며 올라오고 있습니다. 곧 난주를 탈환하겠더군요.”

“…….”

“역시 천하방 무력대는 명불허전이더군요. 정천맹과는 차원이 다른 모양입니다.”

마뇌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주를 잃는 건 뼈아픈 손실이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십이가문이 전력 손실을 보겠지만 어차피 천하의 운명은 이 자리에서 결판이 날 겁니다.”

무한은 마뇌가 왜 이런 소식을 전하는지 이유를 알았다.

“여기를 벗어나지 말아달라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혹, 궁금한 게 있으면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소.”

마뇌가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하고 돌아갔다.

혈랑이 식량과 양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웃기는 놈이네. 식량을 가져오다니. 독이라도 탄 건가?”

성채에 있는 이들은 건량으로 끼니를 때우는 중이다. 술과 곡식을 보자 반가워하였다.

그날 밤, 각기 양을 잡아 술판을 벌였다.

무한은 고벽후와 소마, 혈랑과 함께 자리하였다.

참으로 기묘한 자리였다. 네 사람은 말없이 양고기를 뜯으며 술을 비웠다.

기어이 먼저 입을 연 건 혈랑이었다.

“소천주, 천마를 죽이고 나서 뭘 할 거요?”

“네가 알 바 아니다. 그리고 천마보다 네가 먼저 죽을 것이다.”

“그럴 일은 없을 거요.”

혈랑이 자신의 새로운 혈랑아를 툭툭, 치며 살기를 뿜었다.

“죽더라도 천마의 멱은 따고 죽을 것이오. 그러니 소천주는 마천도들을 데리고 천산으로 돌아가시오. 여기는 내 땅이오.”

“건방진 놈.”

소마가 코웃음 쳤다.

“천마가 천마지경을 넘어 천마지체(天魔之體)를 이뤘다면 불사(不死)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네 사람이 합공해도 죽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천마지체? 그건 또 뭐요?”

“마신이라는 뜻이지. 천주는 교활한 자이다. 천마지체를 이뤘기에 천하제일인 비무행에 나선 것이지.”

“…….”

이 자리에 있는 이는 모두 절대고수의 반열에 오른 자들이다. 소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그렇다면 소천주는 굳이 죽으러 여기에 온 것이요?”

“…….”

소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천마지체든 뭐든 심장이 뜯기고 목이 잘리면 죽지.”

고벽후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쾌활한 어조로 분위기를 돌렸다.

“혈랑, 너야말로 언제까지 마적질을 할 거냐?”

“이미 그만둔 지 오래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내가 난주 흑도의 수장이라는 걸 잊었소?”

소마가 무한에게 말했다.

“그날 왜 나를 살린 것이냐?”

“사람을 살리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

각자 한마디씩 하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무한이 고원의 밤하늘을 보았다.

‘천마지체…….’

어떤 경지인지 대략 짐작이 갔다.

***

형소와 소소, 남궁우가 높은 언덕에서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천하방의 북진을 막던 마천도들이 연전연패하자 십이호교가문의 주력이 급히 모여 길을 틀어막았다.

대략 팔천에 이르는 대군이 난주로 가는 길목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마천의 대군과 대치하고 있는 천하방 십이무력대는 조금도 눌리는 기세가 없었다.

천하방 십이무력대 일천이백 명에 형일천이 규합한 정천맹 잔여 무인 팔백 명이 정면에서 대치하고 있다.

마천의 진영 동쪽에는 남궁우가 끌고 온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인 일천여 명이 포진하고 있었다.

남궁우는 정천맹이 대패했으나 전멸을 하지 않았으리라 여기고 천하방 전령을 급파하여 대파와 세가의 패잔병을 공동파로 유도하였다.

이렇게 규합한 대파와 세가의 무인들에 난주 무림인들까지 더하자 일천여 명에 이르렀다.

어이없는 대패로 사형제를 잃고 사문의 명예를 잃은 대파와 세가의 무인들은 독기만 남았다.

대파와 세가의 선두에는 남궁악과 남궁호 형제가 보였고, 정천맹의 대패 소식에 급하게 달려온 독왕과 대파의 고수들이 서 있었다.

마천 진영 서쪽엔 이백 무인이 서 있었다. 선두에 선 이들은 담철조와 공곤, 하기주였다.

그 뒤로 악가박과 강문평 그리고 신검산장의 신임 책사 궁여직이 섰다. 궁여직의 호위는 오산사걸이 맡았다.

하기주는 강문평에게 아직 성취가 부족하다 하였으나, 강하보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말에 말릴 수가 없었다.

신검대와 무적대의 규모는 가장 작았으나 기세는 가장 맹렬하였다.

결전을 앞둔 고원에는 침묵만 흘렀다.

형소가 정천맹의 선두에 선 아버지 형일천을 보았다. 마침 형일천도 아들을 보는 중이었다.

형일천이 준비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형소가 말했다.

“소소, 시작하자.”

소소가 굳은 얼굴로 천하방의 깃발을 들었다.

그러자 천하방 십이무력대가 밀물처럼 마천의 진영을 향해 돌진하였다.

함성도 없었다. 그야말로 나는 듯이 소리도 없이 돌진하였다.

이천 대 팔천.

중과부적이라 하기에 충분한 차이였으나 천하방 십이무력대는 거침없었다. 오히려 마천의 진영에서 주춤하는 기색이었다.

형소가 재차 남궁우를 쳐다보았다.

남궁우가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깃발을 들었다. 그러자 대파와 세가 일천 무인이 일제히 마천의 측면을 향해 돌진하였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정면대결을 꾀한 것은 형소의 결단이었다.

마천의 진영에 이른 천하방 십이무력대가 돌연 열두 갈래로 갈라지며 정면충돌 하였다.

“크아악!”

고원은 순식간에 비명과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찼다.

천하방 십이무력대가 마천의 진영을 갈라 치며 돌진하자, 그 뒤로 형일천이 정천맹 무력대를 끌고 진영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마천도들을 공격하였다.

대파와 세가는 정점에 고수들을 밀집시키고 쐐기 모양으로 마천의 진영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남쪽과 동쪽에서 공격을 받자 마천의 진영이 자연스레 양쪽으로 집중되었다.

마천의 본진에는 십이호교가문의 수장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전황을 살피며 수시로 전령을 보내 전세를 지휘하였다.

“적들은 수적으로 열세다. 고립시켜 전멸시켜라!”

누군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마천 진영의 북쪽에서 수천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삼천에 이르는 무인들 선두에 피전격과 오사가 있었다.

뒤에서 기습을 받자 십이호교가문의 수장들이 크게 당황하였다.

남쪽과 동쪽의 후방에서 병력을 빼내 북쪽의 방어선을 강화하고자 했으나 이미 늦었다.

피전격은 이 시대 또 한 명의 절대고수다. 피전격이 손을 휘두르자 묵빛 기운이 쭈욱, 뻗어나가며 마천도를 휩쓸었다.

콰쾅!

연달아 강기가 터지며 마천의 본진까지 길이 열렸다.

피전격의 음험한 목소리가 고원의 하늘을 울렸다.

“내가 오늘을 위해 천마를 피해 달아났다는 치욕스런 말까지 들었다! 아예 싸그리 죽여주마!”

궁여직은 신검산장으로 가기 전에 난주 곳곳에 정보망을 구축했다.

도왕의 죽음과 정천맹의 대패를 가장 먼저 접한 자도 궁여직이었다.

천마의 천하제일인 비무행 소식을 듣자마자 궁여직은 형소에게 피전격과 손을 잡기를 청했다.

형소는 단신으로 흑수애를 찾아가 피전격에게 흑백 연합을 제의했다.

피전격은 사천 남부를 흑천의 영역으로 넘길 것을 요구했고, 형소는 독왕과 당전수를 설득하여 결국 협의를 이끌어냈다.

피전격은 천마의 비무행을 피해 달아났다는 오명을 받으면서도 은밀하게 삼천 흑도를 감숙으로 집결시켰다.

삼면에서 공격을 받자 마천의 진영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신검산장 신검대와 무적대는 미동도 하지 않고 마천 진영을 노려보기만 하였다.

피전격이 등장하자 십이호교가문의 고수들이 속속 몸을 날려 앞을 막았다.

본진의 고수들이 점차 전선에 투입되자 형소가 깃발을 들었다.

이를 본 궁여직이 외쳤다.

“본진까지 돌파합니다!”

신검대와 무적대가 일제히 몸을 날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류고수였는데 조를 이뤄 돌진하니 마천도들이 추풍낙엽처럼 흩어졌다.

신검대와 무적대는 서로 일정거리를 두며 마천의 진영을 달렸다.

십이호교가문의 가주들이 일제히 나와 신검대와 무적대를 막아섰다.

그때, 놀랍게도 가주 한 사람의 머리가 쿵, 하고 굴러 떨어졌다. 운객의 모습이 잠시 드러났다가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이어, 다시 한 명의 머리가 굴러 떨어졌다. 이번에는 무흔이 잠시 보였다가 자취를 감췄다.

“자객이다! 조심해라!”

십이호교가문의 가주들이 크게 당황하여 흩어졌다.

그사이 신검대와 무적대가 본진에 도착하여 진영을 휩쓸었다.

본진은 전장을 지휘하는 곳이었다. 십이호교가문의 가주들이 흩어지고, 책사와 전령들이 죽어 나가자 통제기능을 상실하였다.

마천도들도 기를 쓰고 싸웠다. 무인 팔천이라는 병력은 실로 대단하여 전선은 팽팽한 접전을 이뤘다.

쐐기를 박은 것은 흑월의 등장이었다.

흑선수사와 연이설을 필두로 일천 흑월도가 대파와 세가의 뒤로 나타나더니 곧바로 마천의 진영을 가르며 본진을 향해 짓쳐들어왔다.

수적 우위마저 사라지자 십이호교가문의 수장들이 일제히 퇴각 명령을 내렸다.

마천도들이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을 하였다.

그러자 언덕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형소가 힘껏 나팔을 불었다.

뿌우우웅!

그러자 흑백 연합이 고립된 마천도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형소가 크게 외쳤다.

“너희에게 살길을 열어주라는 천하방주의 명이다. 천산으로 돌아가 다시는 중원을 넘보지 마라!”

형소의 외침을 들은 마천도들은 더는 싸울 마음이 없었다.

피전격이 쳇, 하고 투덜거렸다.

“마천을 박멸할 기회를 그냥 버리다니.”

그러자 옆에 있던 우사가 말했다.

“저들을 다 죽이려면 우리도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대파와 세가가 겨우 일백 무인만 보냈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구대문파 놈들이 혹시 흑수애를 치는 게 아닌지 몰라.”

역시 마지막은 쓸데없는 걱정으로 끝나는 우사다.

반 시진 남짓 짧은 싸움이었으나 마천은 이천여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승리하기는 했으나 흑백 연합도 일천여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남궁우가 삼천여 사상자가 널린 고원을 보며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짧은 사이에…… 무력대 간의 싸움은 정말 처절하구나.”

남궁우는 무한이 왜 천하방을 해체하고 무력대를 해산하려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피전격과 흑선수사는 멀리서 서로를 노려보다 슬그머니 사라졌다.

흑백 연합이 끝나기 전까지 서로 간에 휴전협정을 맺었기에 그저 눈싸움만 하고 물러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형소가 말했다.

“당분간 흑천은 걱정 안 해도 되겠어.”

흑천과 흑월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다.

***

성채에 새로운 손님이 왔다.

“흥! 내가 천마 따위를 두려워할 자였더냐?”

피전격이 오사와 일백 무력대를 끌고 왔다.

무한이 그런 피전격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이 사람은 여전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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