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마천의 진영이 크게 흔들리며 물길이 열리듯 갈라졌다.
그 사이로 한 사람이 말을 달려 질주해왔다.
마치 광풍이 몰아치듯 달려오는 기세에 감히 막는 자가 없었다.
무한은 성벽에 서서 수천 마천도가 이룬 진영을 뚫고 들어온 고벽후를 지켜보았다.
지난날 마적의 수급을 베어 말달려 오던 고벽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철혈의 매가 아니라 고원의 용이라 해야겠구나.’
고벽후가 성문 앞에 당도할 즈음 무한이 내려가 기다렸다.
“오셨습니까?”
“천하방주가 여기서 천마를 기다린다는 소문이 감숙에 파다하게 퍼졌는데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나?”
무한이 난주에서 자신의 행적을 알린 건 고벽후를 의식해서였다.
“방주 취임식에 가지 못해서 아쉬웠네.”
고벽후는 마치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내처럼 보였다. 체격은 여전히 건장했지만 이전처럼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한은 천마와의 싸움 이후 고벽후 역시 한걸음 더 나아갔음을 느꼈다.
고수는 하수와 아무리 접전을 벌여도 한계치에 이르기 어렵다.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고수와의 생사결이야말로 무공에 대한 깨달음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고벽후의 놀라움은 더 컸다.
“천마에게 생사결을 청했다기에 걱정이 되어 왔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군.”
“천마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충분히 걱정할 상황입니다.”
무한이 반쯤은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소마는 만나셨습니까?”
“서녕 산간지대에 숨어들었다고 하는데 종적을 찾을 길이 없었네.”
그러면서 저 멀리 서쪽을 바라보았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멸마대 형제들이 올 텐데, 마천도가 이리 몰려 있을 줄 몰랐군. 아무래도 마중 나가야 할 것 같네.”
“그럴 필요는 없을 겁니다. 저들은 안으로 들어오는 이는 막지 않습니다.”
얼마 후, 마천 진영 후방으로 멸마대가 나타났다.
멸마대가 수많은 마천도를 보고 주춤하는데 마천도들이 길을 열어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내주었다.
연추산이 선두에 서서 말을 달려 들어왔다.
고벽후가 이를 보고 중얼거렸다.
“호오? 방주 말대로군. 이상한 일이야. 저놈들이 개명하더니 개심했나?”
“지금 저들을 지휘하는 이가 마뇌란 자입니다. 그자는 여기를 봉쇄하는 데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마뇌? 그런 자가 있었던가?”
“천산을 살필 때 못 들어보셨습니까?”
고벽후가 고개를 저었다.
마뇌가 얼마나 철저히 자신을 숨겨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자가 마천의 손우자였습니다. 두 사람이 천하를 뒤집어 놓은 셈이지요.”
무한이 자신의 추측을 전하자 고벽후가 인상을 썼다.
“화근을 당장 뽑지 그냥 두었나?”
“어쩌면 그자가 이 겁난의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무한의 말에 고벽후는 더 말하지 않았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무한이 얼마나 신중한지는 그도 잘 안다.
잠시 후 연추산을 비롯한 멸마대가 성채로 들어왔다.
“하하하. 마천 녀석들이 아주 깨끗하게 보수를 해놨군. 비운 보람이 있네.”
장초가 들어오며 복원된 성채를 보고 크게 웃었다.
무한이 웃으며 반겼다.
“사지(死地)로 들어오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요.”
“사지? 천하제일을 다투는 고수가 둘이나 있는데 여기를 사지라고 부를 수 있나?”
외눈박이 오상이 말했다.
멸마대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원래 자신들의 터전이었던 만큼 익숙하게 경계조를 편성하고, 말과 장비를 정비하였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밤이 되었다.
고벽후가 공동을 보다 말했다.
“오랜만에 비무를 해볼까?”
“좋지요.”
두 사람이 공동으로 올라갔다.
“내공은 쓰지 않기로 하지.”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내공을 써가며 겨뤘다간 공동이 무너질 테니까.
고벽후가 반월도를 꺼내들며 무한을 보았다.
“경천신검은?”
무한이 말없이 손을 내밀자 강기로 이뤄진 경천신검이 손에 잡혔다.
고벽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검을 버렸다는 말은 들었어도 몸에 담고 다닌다는 말은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건 뭐, 사기라고 해야겠군.”
이어 두 사람이 초식을 겨뤘다.
이미 초식을 버린 그들이 완월도법과 경천십이식의 초식을 펼치니 그게 곧 길이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달빛이 내릴 때쯤 고벽후가 반월도를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이 자리에서 내게 두들겨 맞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내가 배우는군.”
고벽후의 얼굴에는 경탄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러고는 달빛이 내린 그 자리에 가서 좌정을 하고 운기조식을 하였다.
무한과의 초식 싸움에서 그는 느끼는 바가 있었고, 이를 정리하고자 하였다.
무한은 공동 밖으로 나가 멀리 밤의 고원을 바라보았다.
마천도들은 여기저기 불을 피워놓고 떠들썩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무한이나 멸마대가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는지 긴장감조차 없었다.
이들을 바라보는 무한의 눈빛은 무척이나 서늘하였다.
***
이튿날.
마천의 진영이 다시 열렸다.
열린 공간으로 한 무리의 마적떼가 달려 들어왔다.
앞에 있는 이는 붉은 옷을 입은 혈랑이었다.
성벽을 지키는 멸마대가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이거 막아야 해, 말아야 해?”
마천의 공격 이후 멸마대와 혈랑은 공조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성채에 다다른 혈랑이 말을 멈추자 성문이 열렸다. 혈랑은 곧장 문으로 들어왔다.
고벽후가 소리쳤다.
“겁도 없이 멸마대 진영으로 들어오다니. 일전의 부상으로 머리가 이상해진 거냐?”
“고 대주야말로 남의 집에서 뭐하는 거야?”
“남의 집이라니?”
“소마에게 패하여 내준 걸 다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는 거냐?”
혈랑이 말에서 내려 내성으로 들어왔다.
“천하방주가 여기를 무덤자리로 잡았다지?”
무한이 혈랑을 맞이하며 웃었다.
“천마의 무덤 자리치고 조촐하기는 하지요?”
혈랑의 눈빛 또한 지난번 마천주와의 결전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고벽후가 물었다.
“대막혈사께서는 안녕하신가? 천마가 중원을 휘젓고 다니니 이제야말로 명실공히 새외제일인이신데.”
혈랑이 퉁명스레 말했다.
“돌아가셨다. 그 노인네, 오래도 살았지.”
“……?”
대막혈사는 중상을 입은 혈랑을 데리고 버려진 폐성 유리고성으로 들어갔다.
대막혈사는 혈랑을 구하기 위해 천마와 접전을 벌이며 치명적인 내상을 입었다.
이미 천수를 다해가는 그는 혈랑을 살리기 위해 격체전공(隔體傳功)으로 자신의 내공을 전하고 숨을 거뒀다.
혈랑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지만 눈에서는 짙은 분노가 흘러나왔다.
“천마는 내 꺼야. 일단 내가 잡아보고 안 되면 넘기마.”
“그런 거라면야 언제든 양보하지. 네가 죽으면 장례를 후하게 치러주마.”
고벽후가 농으로 받았다.
무한이 혈랑과 고벽후가 티격태격하는 걸 지켜보는데 세 사람이 와서 포권을 하였다.
“방주를 뵙습니다.”
언젠가 무한이 구해준 막적 막부 막흉 삼형제였다.
혈랑이 이끌고 온 혈랑대는 오십여 명에 이르렀다.
원래 감숙지부였고, 수백 명이 묵을 수 있는 곳이었기에 멸마대와 혈랑대가 함께 있어도 부족함이 없었다.
멸마대와 혈랑대는 각기 구역을 정하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다음 날.
다시 한 무리가 마천의 진영 뒤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마천의 진영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앞에 선 자가 일장을 휘두르자 막고 있던 선두가 삽시간에 날아가며 길이 열렸다.
“소마로군. 왜 안 오나 했다.”
혈랑이 성벽에 서서 달려오는 광풍대와 사천대를 보았다.
“저들도 꽤나 질기군. 마천의 천리추격에도 절반이 넘게 살아 있었네.”
고벽후가 광풍대와 사천대의 인원을 살펴보곤 말했다.
소마가 성채 앞으로 와서 서더니 닫힌 문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놈들이 남의 집을 무단 점거하고 있는 것이냐?”
성벽 위에 고벽후와 혈랑, 무한이 서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소마가 으르렁 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잠시 빌려준 것뿐인데. 세입자가 비웠으니 주인이 다시 오는 게 마땅하지.”
“허튼 소리!”
소마가 좌우에 있는 사추선과 광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게 수리할 필요 없다고 했지? 땀은 너희가 흘리고 저놈들이 편히 먹고 지내고 있지 않느냐?”
광포가 억울하다는 듯 고벽후를 향해 소리쳤다.
“고 대주, 내려와라! 성채를 되찾아가려면 나와 한판 붙자.”
그러자 소마가 광포의 뒤통수를 쳤다.
“아예 성채를 내주겠다고 해라. 네가 저놈 상대가 될 것 같으냐? 들이댈 데를 들이대야지.”
그러더니 말에 앉은 채 그대로 곧장 날아올라 성벽에 섰다.
“이 고원의 문제아들이 다 여기 모여 있었군.”
소마의 시선이 고벽후와 혈랑을 거쳐 무한에 이르더니 한참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고벽후를 향해 말했다.
“말해봐라. 심씨 핏줄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거냐?”
“그게 무슨 소리요?”
“너는 부끄럽지도 않으냐? 이 년 전 저 밑바닥에 있던 놈이 이제 머리 꼭대기에 올라섰는데 그간 뭐했냐?”
고벽후가 크게 웃고는 말했다.
“그놈을 애초에 무인으로 끌어올린 주역이 바로 나요.”
무한 역시 소마를 보고 놀라고 있는 중이다.
소마는 탈마의 경지 끝자락에 선 게 분명했다. 마천의 무공체계에서 탈마라면 정파에서 이르는 생사경에 해당한다.
이제 한순간의 깨침으로 소마는 탈마를 벗어나 그들이 말하는 천마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소마가 무한이 자신의 무공 내력을 파악했음을 눈치채고 웃으며 말했다.
“심득의 마지막 한 구절을 얻기 위해서 왔다.”
말은 운치 있었지만 뜻하는 바는 무거웠다.
그 한 구절을 얻기 위해서는 죽음의 문턱을 다시 한번 넘어야 할 것이다.
소마가 고벽후와 혈랑을 보고는 인상을 썼다.
“네놈들이 이리 몰려 있으면 천마가 겁나서 올 수 있겠냐?”
“그러면 내가 잡아 오지.”
혈랑이 큰소리쳤다.
소마와 광풍사천대 일백여 명까지 오자 감숙지부도 이제는 북적거렸다.
사추선이 침을 튀겨가며 자신들이 이 성채를 복원했음을 강조하고는 내성 안쪽의 건물들을 차지했다.
무한은 성벽에서 북적거리는 감숙지부를 내려다보았다.
서로 구역을 정하고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서로를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이를 보며 왠지 모를 감회가 일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 매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철혈의 매!’
이제는 절지에서 논밭을 일구며 살고 있을 아버지가 원하던 고원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정도, 사도, 마도가 아닌 그저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고원.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은 천마라는 강적을 상대하기 위해 모였지만, 언젠가는 서로 상생하며 살아갈 날이 있겠지.’
무한의 시선이 멀리 포진한 마천의 진영을 향했다.
‘저들 또한 이처럼 같이 공존할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날은 생각보다 이르게 올 수도 있다.
‘천마…… 당신이 사라진 자리에 평화가 피어날 것이오.’
무한의 주먹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끄아아악!
비명 같은 매의 울음이 해가 지는 고원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