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모우극은 정천맹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한때 도천부의 핵심 지지 세력이었던 모 장로파가 정천맹에서 은근히 배척당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바람을 막아주던 부친 모공연마저 죽은 뒤 모우극은 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천하방 복귀를 간청하려 했는데…….
“네가 어디 있더라도 우리는 천무관 동문이고 한때 천하방 형제였어. 그걸 잊지 마라.”
“…….”
“모공연 장로가 선봉대를 맡아 분사하였어. 장로의 신분으로 그러기는 힘들지. 정천맹은 이를 잊지 않을 거다. 부친은 죽음으로 네 앞길을 열어준 거야. 이를 저버리지 마라.”
“…….”
“선대는 음덕을 베풀었다. 이제 홀로 서야 할 것이야.”
“크읍.”
모우극이 끝내 눈물을 흘렸다.
형일천이 정천맹을 이끌고 공동을 떠났다.
그날 밤 달이 뜨자 무한이 공동으로 올라갔다.
고벽후와 비무를 하던 그때처럼 공동 위 뚫린 공간으로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무한은 그 달빛에서 완월보법을 펼치던 고벽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자 절로 감흥이 일었다.
무한이 경천신검을 뽑아 달빛 아래서 검무를 추었다.
경천십이식이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가고 기운이 이끄는 대로 검이 따라갔다. 검식을 잊은 지 이미 오래다.
검과 자신이 일체를 이루다 끝내 한 자루 검만 남았다. 그렇게 무한은 만물유기(萬物有氣)를 넘어 기의 본질에 들어섰다.
만물에 기가 있는 게 아니라, 만물이 기 그 자체로 이뤄져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달빛 아래 찬연히 빛나던 경천신검이 파팟, 하는 기음과 함께 은빛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 자리에 무한이 좌정하고 있었다.
은빛 가루가 무한의 정수리 위에 모여 다시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가 안개처럼 스러졌다.
은은한 검심(劍心)이 천천히 무한의 정수리로 빨려 들어갔다.
무한은 마치 석상이 된 듯하였다. 달빛이 그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
중원에 놀라운 비보가 전해졌다.
정천맹의 대패 소식과 함께 마천주의 천하제일인 비무행이 중원을 뒤집었다.
도왕과 권왕에 이어 소림 성승과 무당의 현청자가 천마와의 비무에서 패해 스러졌다. 화산의 전대 고인 구화도인도, 종남의 진청검객도 마천주의 손아래 무릎을 꿇었다.
천산파의 위명은 강호를 진동시키고, 십대고수들은 자취를 감췄다.
흑천의 신임 천주 피전격은 마천주를 피해 광서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천산파에 가담한 문파들이 득세하고, 수많은 백도 문파가 스러지거나 봉문을 하였다.
그 와중에 천하방이 출병하였다. 십이무력대와 청의단이 북상하였다.
천하방 무력대의 행보에 중원이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들이 중원 무림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서안 신검산장에서 이백 무인이 조용히 움직였다.
***
공동 한가운데 석상처럼 앉아 있던 무한의 눈이 뜨였다.
깊고 서늘한 눈빛은 마치 세상을 내려다보는 월광과도 같았다.
무한이 일어나 공동 밖으로 나갔다.
공동은 절벽 중턱에 있었기에 멀리 고원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무한의 눈에 포진하고 있는 마천도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한을 성채에 가둬 두고자 하는 형세였다. 수천 명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는데 빈틈이 없었다. 진의 대가가 지휘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무한의 머릿속에 형일천에게 들은 마뇌란 자가 스쳤다.
문요가 그와 내통했다면 분명 손우자의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휙.
무한의 신형이 선 자리에서 그대로 사라졌다.
잠시 후.
무한이 마천의 진영 한 곳에 나타났다.
진의 중심, 본진이었다.
무한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마천 진영에 긴장감이 흘렀다. 일제히 병기를 뽑는 소리와 함께 진세를 이루기 위해 움직이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뒤이어 연계된 진영에서도 움직임이 일었다. 진과 진 사이에서 솟구치는 살기가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무한이 담담한 시선으로 진영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진의 중심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나와 이야기 할 자가 있는가?”
무한의 목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진영의 한가운데가 열리고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손우자?’
분명 용모는 달랐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손우자를 연상시켰다. 나이는 손우자보다 약간 어려 보였다.
동시에 깨달았다.
‘오가촌의 생존자가 둘이었구나.’
환노나 독노도 언급을 하지 않았으니, 그들도 몰랐던 사실이다.
오가촌에서 생존한 두 형제가 복수를 위해 천하를 도탄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중년 사내가 읍을 하며 말했다.
“마천의 마뇌, 천하방주를 뵙소.”
“마천에 군사가 있었군?”
“위대하신 천마께 어떤 군사가 필요하단 말이오? 나는 그저 그분의 종일 뿐이오.”
마천의 천주는 완전무결한 자이다. 그러기에 군사라는 직제 자체가 아예 없다. 하지만 그와 같은 기능이 아예 없을 수는 없지 않나. 마뇌는 자신을 종으로 자처하였다.
무한이 그를 바라보다 한마디 하였다.
“주인을 사지로 모는 종이 다 있었군.”
의미심장한 무한의 말에 마뇌는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무한은 마뇌가 죽음을 각오했음을 알았다.
지금 이 자리에 수천의 마천도가 있지만 무한이 자신의 목숨을 취하려면 언제든 취할 수 있음을 알고도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무한은 그의 생사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탄식을 할 뿐이다.
“한(恨)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집착을 하고 있구나.”
의미 모를 한마디를 흘렸는데 마뇌의 낯빛이 굳었다.
무한의 목소리가 마음 깊은 곳을 치는 듯했다.
불타는 마을, 끊임없이 들리는 비명, 그리고 죽어가는 가족…….
형은 자신을 마른 우물에 숨겼다. 우물 속에서 사흘을 기다렸다.
이윽고 돌아온 형이 말했다.
자신은 멀리 떠날 거라고. 데려가 달라고 했는데 형은 냉정하게 거절하곤 자신을 산촌 마을에 맡겼다.
일 년여 뒤 형이 한 사람을 데리고 찾아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따라가라고, 가서 힘을 기르라고 했다.
어린 그에게는 너무나 머나먼 길이었다. 그 끝에 당도한 곳이 천산이었다. 그를 데려온 사내가 형의 말을 전했다.
- 마천주의 밑으로 들어가라.
어린 나이에도 마천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고 있었다.
가족은 물론 마을을 불태운 마인들…….
마뇌는 자신의 원수들 속에서 자랐다. 불안과 증오, 그리고 복수심으로 형이 준 심공을 연마했다.
천뇌심공.
내공을 쌓는 심공이 아니라 두뇌를 여는 심공이었다. 덕분에 그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마천주의 숨은 책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천뇌심공의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이 수시로 밀려왔고, 형이 보내오는 약에 의지해야 했다.
이제 그도 한계에 이르렀다. 약도 듣지 않았다.
그런데 형이 천뇌심공의 부작용을 제거하는 법을 완성했다고 알려왔다.
그리고 이제 천하 무림인들의 멸망대계가 마무리되어 간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천산의 사람이 되었다.
천뇌심공의 부작용으로 어릴 적 기억은 희미해지고 광활한 산천에 원한이 씻겨 나갔다. 천산에서 수십 년을 보내며 자기도 모르게 천산에 동화되었다.
이번 출정에서 그는 다시금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불타는 마을, 외마디 비명, 절규…….
동시에 말 없는 천산이 그리워졌다. 어릴 적 헤어진 형보다 천산 높은 봉우리의 흰 눈이 보고 싶었다.
거기에 그의 가족이 있다.
마뇌는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일면식도 없었던 무한이 첫 대면에 바로 언급하자 소름이 끼쳤다.
‘저 나이에 저 경지…… 천지를 꿰뚫어보는 혜안까지 갖추다니.’
형이 그를 조심하라고 한 이유를 절감했다.
‘천마가 왜 비무행의 마지막 상대로 정했는지도 알 것 같구나.’
마뇌는 마천주의 유일한 적수가 무한이라는 걸 깨달았다.
마뇌는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하는 무언가를 느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생각만 해도 불경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신 무한을 향해 외쳤다.
“천마께서 말씀하셨소. 천하방주는 이 자리에서 비무행을 기다리시오.”
“천마는 어디 있나?”
“하늘은 그 어디에나 있으니 감히 어디 있다 할 수 있겠소?”
“천마의 비무행이 끝나지 않았군. 이제까지 그가 상대한 자가 누구였더냐?”
“소림 성승과 무당 현청자, 화산 구화도인, 종남 진청검객, 점창 사일신검이오.”
무한이 잠시 생각하더니 마뇌를 주시하였다.
삼십여 장 거리였으나 마뇌는 무한이 자신의 심연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에 절로 몸을 떨었다.
“…….”
말없이 마뇌를 주시하던 무한이 말없이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날아올라 사라졌다.
무한의 신형이 성채로 들어가자 마뇌가 휘청하였다. 무릎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그만큼 긴장했던 것이다.
성채로 들어온 무한이 내성 대청에 앉아 좌정하였다.
이대로 천마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까?
자신의 의사를 전했는데 천마는 무시하고 비무행을 계속하고 있다.
도왕과 권왕을 쓰러뜨렸다면 그 이상의 비무는 의미가 없다. 당금 무림에서 도왕과 권왕 명성에 비견되는 자는 없다.
그럼에도 천마는 구파를 찾아 최고수를 제거하고 있다. 중원 무림에 천마의 위상을 확실히 알리고, 구대문파를 무릎 꿇릴 생각이다.
동시에 자신을 최후의 비무 상대로 여기고 있음을 알았다. 천하제일인의 후계자라는 천하방주를 쓰러뜨림으로써 천하제일인 비무행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운객.”
“…….”
“도착한 걸 알고 있소.”
무한이 황도에서 감숙까지 질주하는 바람에 운객은 종적을 놓쳤다.
그 역시 죽자고 신법을 펼쳐 쫓았으나 도저히 무한을 따를 수 없었다.
결국, 뒤늦게 종적을 쫓아 난주를 거쳐 며칠 전 감숙지부 성채까지 왔다.
자신을 버리고(?) 간 무한에게 운객은 약간 심통이 나 있었다. 그래서 말도 없이 스며들었다.
사실 운객은 암중호위 한다는 명분으로 실제로는 무한을 상대로 무공을 연마 중이다. 무한의 무공을 견식하며 깨달음을 높여가고 있다.
운객은 은신술을 극성으로 펼쳐 무한 주위에 잠입하곤, 만족해하는 중이었다.
무한이 그를 감지하지 못한 채 수련에만 몰두하는 걸 보고 이번에는 무한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그의 은신술은 이제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부해도 좋다.
그러니 무한이 그를 불렀을 때 내심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쳇.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는 체를 안 한 거로군.’
운객이 은신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오?”
“소소에게 난주까지 들어오라 전해주시오.”
난주는 마천, 천산파의 소굴이다. 그럼에도 운객은 가타부타 말없이 사라졌다.
그의 머릿속은 귀식대법까지 펼쳐도 발각이 된다면 은신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사람들이 들었으면 기함할 일이다. 귀식대법을 펼치면 일정 시간 의식마저 멈춘다. 완벽한 은신술이지만, 그만큼 위험할 수도 있다.
운객은 의식을 지닌 귀식대법을 연마 중이다.
‘의식의 작용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이 없을까?’
운객은 고민을 하며 고원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다음 날, 무한이 은연중 기다리고 있던 이가 찾아왔다.
고벽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