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해가 지는 황량한 고원에 한 필의 말이 나타났다. 등에 검을 맨 무인이 타고 있었다.
검은 망사를 두른 챙이 넓은 모자에 피풍의를 두른 무인은 급할 것 없다는 듯 천천히 말을 달려왔다.
한바탕 먼지바람이 불고 난 뒤 무인이 말을 세웠다. 훌쩍, 내려서더니 옆구리에 달린 물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이어 얼굴 하관을 가린 두건을 벗고 물을 마셨다.
무한이다.
물 냄새를 맡은 말이 머리를 들이댄다. 무한이 말 등에 달린 바가지에 물을 부어 말에게도 먹였다. 말이 생기를 되찾고 투레질을 하였다.
잠시 말이 쉬는 동안 무한이 멀리 높은 언덕 쪽을 보았다.
말굽 모양의 절벽 앞을 막은 성벽이 보인다.
천무행 당시 반쯤 허물어진 성벽이 말끔하게 단장된 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소마가 주둔했다더니.’
수하들이 수리한 모양이다.
대문이 활짝 열린 성벽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깃대는 부러지고 갈가리 찢긴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버려진 성채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원래 이곳은 척박한 데다 물도 부족한 곳이라 지부가 들어설 만한 곳이 아니었다.
감숙에서 국지전을 벌일 때 전초기지 역할을 하던 곳인데, 고원의 맹약에 따라 경계선이 그어지며 그나마 작은 우물이라도 있다는 이유로 지부가 되었다.
잠시 후 다시 말에 오른 무한이 천천히 성채로 향했다.
“……!”
어느 순간 무한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성채 부근에서 희미하게 사람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무한의 시선이 고벽후와 비무를 하던 공동으로 향했다. 기운은 그곳에서 흘러나왔다.
무한이 말을 몰아 천천히 다가가자 공동에서 몇 사람이 나와 성벽에 섰다.
눈에 익은 복장이다.
‘정천맹?’
성벽에 버티고 선 자가 외쳤다.
“멈춰라! 누군지 신원을 밝혀라!”
무한이 챙모자의 망사를 걷고 하관을 가린 두건을 벗었다.
“나는 천하방주다. 정천맹인가?”
나직한 목소리가 귀에 꽂히자 성벽 위의 무인들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한 사람이 공동으로 빠르게 올라가고 나머지는 무한을 지켜보았다.
무한은 열린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의 흙집들도 말끔히 수리되어 있었다. 형태는 그대로였고, 말을 매는 자리도 같은 자리였다.
무한이 구유 앞에 말을 매어두고 내성 쪽으로 들어갔다. 그날, 양을 통으로 구워 먹던 자리를 지나 대청 앞 돌계단에 앉았다.
칼을 갈고 있던 연추산의 자리다. 이 자리에 앉으니 내성 성문을 통해 외성 밖까지 한눈에 보인다. 당시 연추산은 칼을 갈면서 밖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무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이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갔다.
거칠지만 세심한 연추산, 냉랭한 듯하면서도 다혈질인 오상, 투덜대면서도 궂은일은 도맡아 하는 장초, 그런 장초의 뒤를 받쳐주는 홍염.
그리고 자신을 진정한 무인의 세계로 이끌어준 고벽후.
회상에 잠긴 무한의 시야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머리와 어깨와 허벅지를 붕대로 칭칭 감은 거구의 사내는 형일천이었다.
형일천이 침통한 표정으로 내성 문을 지나 무한 앞에 섰다.
머리 위부터 왼쪽 눈까지 붕대로 감고서 나머지 한쪽 눈으로 무한을 주시하던 형일천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천맹은 끝났네. 이제 천하방 차례일세.”
“어찌된 일입니까? 삼천 무인이면 천하를 노려볼 만한 힘입니다.”
“모래알 같더군.”
형일천이 회한에 찬 한마디를 내뱉고 입을 닫았다.
무한은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했다.
급하게 결성된 정벌대다. 자존심이 강한 대파와 세가를 융화시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너무 성급했다.
“권왕께서 타계한 건 의외였습니다.”
형일천의 눈에 아주 잠깐 공포의 빛이 스쳤다. 이윽고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끼어들 수조차 없었네.”
그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방주…… 절대로 혼자 상대하지 말게. 그는 이미 마신의 경지에 이르렀네.”
“…….”
“권왕은 화경을 넘어 현경의 경지에 들어섰지. 그러나 그런 그도 십 초를 버티지 못했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경을 넘어선 고수들의 싸움은 단 일초에 승부가 갈릴 수도 있다. 같은 현경이라도 미세한 차이가 곧바로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마천주는 이미 생사경을 넘어섰다. 그러니 권왕이 십 초를 버틴 게 아니라 마천주가 십 초를 허락한 것이다.
무한은 남궁악과 당가의 안위가 궁금했다.
“삼천 무인이 전멸한 겁니까?”
“기습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네. 기가 막히더군. 구파가 그럴 줄이야.”
“무슨 말입니까?”
“구파의 정예는 확실히 뛰어나더군. 그러나 전장에 선 경험이 없었네. 마천도들이 동귀어진을 할 듯 달려들자 곧바로 몸을 빼는 바람에 전선이 무너지고 말았네. 구파보다는 끝까지 싸운 세가들이 큰 타격을 입었지.”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삼십 년 봉문하다시피 한 구파일방이다. 무인을 키웠으나 그들이 곧 전사일 수는 없다.
무한이 우려한 바가 현실로 드러났다.
“남궁세가와 당가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
형일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수치와 모멸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천맹은 세 갈래로 북상했지. 구파는 화산 매화신검이 이끌었고, 오대세가는 남궁세가 소가주 남궁악이 통솔했네. 정천맹자체 무력대는 내가 지휘했지. 그런데 세 갈래로 진군한 우리가 집결지에 모인 바로 그날 밤, 기습을 받았네.”
“…….”
“마천주가 단신으로 권왕의 막사에 나타났지. 그리고 마치 손안의 물건을 취하듯 권왕의 목숨을 가져갔네. 곧바로 마천도들이 사방에서 몰려왔지.”
“…….”
“결국 사방으로 흩어지고, 나는… 내가 이끄는 본대를 끌고 이리로 왔네.”
형일천은 확실히 지략가였다.
정천맹 패잔병이 남하하리란 예측을 뒤집고 오히려 북상한 것이다. 소마가 떠나고 버려진 성채는 누구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무한이 당시 정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말했다.
“정천맹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군요.”
“문요!”
형일천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무한은 권왕에게 손우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는데 끝내 듣지 않은 것이다.
“그놈은 내 손에 죽었네. 곱게 죽지 못했지.”
“…….”
“마천에 마뇌라는 자가 있다더군. 마천주의 숨은 책사라고 하네. 그자와 문요 그놈이 내통하고 있었네.”
“마뇌?”
무한의 머릿속이 소용돌이 쳤다.
‘손우자, 숨겨둔 수가 이것이었나?’
천하방의 손우자.
마천의 마뇌.
둘 사이가 연계되어 있다면 지금 천하의 혈난은 그 두 사람이 배후에 있는 셈이다.
무한이 말했다.
“일이 공교롭게 되었습니다. 본 방주는 여기를 마천주와의 일전 장소로 잡았습니다. 조만간 그가 올 것입니다.”
“……?”
“마천주는 지금 천하의 고수를 찾아 천하제일인임을 입증하기 위해 비무행을 하고 있습니다. 천하방주도 그의 비무 대상에 들어 있겠지요.”
“그래서 이리로 불렀다는 말인가?”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형일천이 이를 갈았다.
“잘됐네. 정천맹 본대는 아직 오백여 명이 남았네. 이 성채와 주위 마을에 흩어져 있지. 그들을 규합하겠네.”
형일천이 무한과 함께 싸울 생각을 밝혔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시잖습니까. 마천주에게는 오백이 아니라 일천 무인도 의미가 없습니다.”
“…….”
형일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한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천맹의 무사들이 일류라지만, 그가 본 마천주의 무위라면 개미 밟듯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도 남지.”
이번에도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형소가 곧 정천맹으로 갈 것입니다.”
“……?”
“맹주가 세상을 떠났으니 부맹주가 뒤를 잇는 건 당연하지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산동 복호가와 부맹주와는 인연이 끊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복호가의 가신이 아니지요.”
“…….”
형일천이 굳은 얼굴로 무한을 보았다.
“형소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나보군.”
“형소에게는 혼란스러운 중원을 안정시킬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맹주의 위에 오르셔서 그를 정천맹의 책사로 삼으셔야 합니다.”
“수많은 목숨을 이 황량한 땅에 묻었네. 내가 어찌 그들의 가족을 보며, 어찌 정천맹주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전쟁은 권왕의 결정이었습니다.”
“…….”
형일천이 두 눈을 감았다.
악양에서 무한을 만난 이후 형일천은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정천맹의 출병을 극구 말렸으나 권왕과 대파는 듣지 않았다.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맡으셔야 합니다. 그들의 남은 가족을 돌보고, 불안과 혼란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 역할은 이미 천하방이 하고 있네. 그리고 나는 자네와 맞서고 싶은 생각이 없네.”
“천하방은 이번 마천의 겁난이 사라지면 해산할 겁니다.”
형일천의 굵은 눈썹이 꿈틀하였다.
“천하제일인께서 승천하셨을 때 천하방은 해체되었어야 했습니다.”
묵직한 무한의 말에 형일천의 낯빛이 붉게 물들었다.
천하제일인 심양조에게 헌사한 방명이 천하방이다. 그가 사라졌으니 당연히 명칭을 바꾸든 해산을 하든 했어야 했다.
그러나 권력을 놓고 싶지 않은 이들은 온갖 명분을 내세워 천하방을 유지하려 했다.
형일천 또한 권왕을 도와 천하방의 권력을 잡고자 암투를 벌여왔다.
“…….”
“마천주가 오기 전에 남하하시기 바랍니다. 감숙 접경에서 형소가 기다릴 겁니다.”
무한은 난주에 머물 때 천하방 소소와 신검산장 형소에게 무력대를 이끌고 감숙 접경 지역으로 오라고 했다.
형일천이 뭐라 하려다 입을 닫았다. 무한의 말이 현실적으로 맞았으니까.
“알겠네.”
결국 받아들이고 내성을 나갔다.
형일천이 간 뒤. 누군가 내성 밖에 서서 무한을 보고 있었다.
“모우극?”
천무행 당시 같은 조에 편성되어 무던히 속을 썩인 모우극이었다.
모우극이 다가왔다. 그 역시 격전을 치렀는지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었다.
“네가 왜 정천맹에 있는 거지?”
“…….”
천하방 장로 모공연은 도천부가 해산되면서 천하방을 탈퇴하였다. 천하방 장로 출신이니 한 자리를 기대하고 정천맹으로 간 모양이다.
모우극의 안색은 극히 어두웠다.
“모 장로는?”
“전사하셨어.”
모우극의 눈에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모공연의 외아들로 부족함 없이 자란 모우극은 심약한 면이 있었다.
“권왕이 장로 자리를 제의하며 전공을 세우라고 했지. 선봉대를 맡으셨는데…….”
“…….”
모우극이 갑자기 정중하게 포권을 하였다.
“방주께 청원합니다. 천무관 출신 모우극, 천하방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무한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지 마라. 우리는 동문이잖아. 그리고 그 청은 들어줄 수 없어.”
모우극의 안색이 처참하게 굳었다.
“부디 지난날의 앙금은 잊어주십시오.”
무한이 일어나 모우극에게 다가갔다. 포권을 한 손을 직접 풀어주며 말했다.
“우극아. 천하방은 이제 사라질 거야. 정천맹의 시대가 오는 거지. 그 앞에 형소가 있을 거야. 네가 그 뒤를 받쳐줄 수 있겠어?”
무한의 말에 모우극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