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218화 (218/250)

218화

‘마음이 동하면 기어이 취하고, 흩어지면 있는 줄 모르고 살리라.’

이는 태평성대가 되면 백성이 황제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산다는 옛말에 빗대어, 무한이 제 뜻을 밝힌 것이다.

여기서 취한다는 건 사황자의 목숨이다.

다른 한편으로 거슬리지 않으면 모르는 척 지낼 것이라는 뜻도 담겼다.

실로 오만방자한 말이나 지금 사황자에게는 더없이 무서운 말이기도 했다.

방금 한 수를 보니 자신을 죽이고 유유히 이 저택을 떠날 수 있는 자다.

무한이 담담히 웃으며 기운을 풀었다.

“본 방주는 황자 간의 보위 다툼에 간여하려는 게 아닙니다.”

“…….”

“황제의 권력 뒤에 숨어 천하를 조종하려는 자를 제거하기 위함이지요.”

사황자가 흠칫, 놀랐다.

그는 고수를 보내 남궁문유를 제거하려 했는데 소식이 없었다. 알아본 결과, 뜻밖에도 강호 천하방 방주가 남궁문유의 저택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득남 연회를 구실로 남궁문유와 천하방주를 초청하여 속을 떠보고,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사람으로 들일까 했는데 오히려 협박을 받았다.

‘절대지경의 강자라더니…….’

무한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신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자였다.

그리고 지금 꺼낸 말에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겼다.

‘황권 다툼에 누군가 개입했다는 뜻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천하방주의 말이니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사황자가 진중하게 물었다.

“나와 태자 간의 경쟁 뒤에 누가 있다는 뜻인가?”

“사람들이 아주 잘 아는 고사가 있지요. 사마귀가 매미를 노리는데 참새가 지켜보고 있다. 이는 삼척동자도 압니다. 그런데 강호에는 그런 우를 범하는 자가 참으로 많더군요.”

사황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육황자를 말하는 건가? 그는 아직 어리네.”

“어린 황제를 보위에 올리고 천하를 주무른 간신은 역사에 많습니다.”

사황자의 안색이 확, 굳었다.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사황자가 허허, 하고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설마…… 생각지도 못했군.”

“전하께서 아예 상대로 생각조차 안 했다면 더 무서운 적이겠군요.”

한 마디 한 마디가 정곡을 찔렀다. 사황자가 낯빛을 고치고는 말했다.

“오늘 다소 불쾌한 일도 있었지만 괘념치 않겠네. 조정에서 강호의 복잡한 사정까지 들여다보는 일은 없을 걸세.”

무한이 사황자를 주시하였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한 안색이다.

‘진퇴가 무척 빠르군.’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제 일을 마치면 황도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겁니다.”

***

“황자 전하께서 오 선생의 고견을 듣고 무척 만족하셨습니다. 사흘 후에 입궁해달라셨지요.”

사황자가 내성 사가에 사는 것과 달리 육황자는 황궁에 살고 있었다. 외인을 들일 수 없기에 내성에 있는 사가의 별채에 손우자를 들였다.

“대단한 의견도 아닌데 유 사부의 체면을 세워주신 듯합니다. 말씀하신 날에 입궁하겠습니다.”

손우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유고가 예를 취하고 간 뒤 전음이 들려왔다.

- 예상하신 대로 남궁문유의 집에 천하방주가 있었습니다.

손우자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수하는 몇이나 대동했느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전음이 이어졌다.

- 호위 네 명과 심복, 그리고 남궁우입니다. 제거할까요?

손우자가 탄식을 하였다.

“그는 절대경지에 올랐다. 상대할 자는 마천주뿐이다.”

- 저희 두 사람에게 십독(十毒)과 십이술사를 붙여주시면 절대고수도 잡을 수 있습니다.

손우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는 곧 돌아가야 할 게다.”

그러고는 물었다.

“마뇌에게서는 소식이 없나?”

-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만 가봐라.”

손우자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가 탄식을 하였다.

“삭초제근을 하지 못한 화가 끝내 발목을 잡는구나.”

심무한이 공손승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언제고 자신을 찾아오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왔다. 천하방 신임방주 축하연도 끝나지 않았는데 황도에 나타나다니.

‘갈수록 심계도 늘고 있어.’

골치가 아픈지 뒷목을 잡고 몇 번 문지르던 손우자가 서랍에서 하얀 약첩을 들었다.

손우자가 가루약을 입에 털어놓고 좌정하였다.

잠시 후 손우자의 미간에 짙푸른 기운이 어렸다. 실내에는 짙은 약향이 맴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깥에서 들리는 인기척 소리에 손우자가 눈을 떴다. 두 눈에 푸른 빛이 어렸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손우자가 휙, 손을 젓자 짙은 약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저택을 살피는 자가 있습니다.

“연못으로 가 있을 터이니 잡아와라.”

손우자가 정원을 산책하였다.

별채는 따로 담을 둘렀는데 손우자가 조용히 있고 싶다 하여 하인들이 들락거리지 않았다.

손우자가 연못가에 이르자 한 사람이 정자에 누워 있었다.

마혈이 짚인 자는 당황하여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손우자가 허리를 숙여 사내의 미간을 찔렀다.

“큭!”

사내의 눈이 뒤집어지고 흰자위만 드러났다.

잠시 후, 손우자가 물었다.

“누가 보냈느냐?”

“사황자부에서 왔다.”

“누구를 찾으러 온 게냐?”

“육황자 주위에 책사가 있는지 조사 중이다.”

손우자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돌아서 갔다.

잠시 후, 사내가 깨어나더니 어리둥절해 하였다.

“내가 왜 여기 누워 있는 거지?”

사내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바깥에서 하인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

“육황자 사가에 새로 오 선생이라는 객경이 들었대. 그가 손우자일 거야.”

남궁우가 물어온 소식을 전했다.

‘역시 육황자에게 붙었구나.’

무한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곤 물었다.

“육황자 사가라면 내성에 있겠지?”

“내성 황실 종친들이 모여 사는 거리에 있어.”

마음만 먹으면 들어가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손우자가 가만 앉아서 당할 자가 아니다. 분명 뭔가 대책을 마련하였을 것이다.

그러다 내성 경비를 맡은 금군과 부딪히기라도 하면 조정이 뒤집힐 것이다.

‘어쩌면 그걸 바랄지도 모르지.’

조정과 천하방의 대립은 손우자가 원하는 그림일 것이다.

그때, 염량이 들어왔다.

“긴급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전서지를 건넸다.

암어로 쓰인 전서지의 내용은 길지 않았다.

- 정천맹, 감숙에서 대패. 권왕 사(死).

남궁우의 안색이 확, 굳었다.

“기어이 적진까지 들어갔구나. 형소가 있었다면 이러진 않았을 텐데.”

형소는 아직 정천맹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신검산장에서 뒷마무리 중이다.

“아니야. 이상해.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도 지략이 뛰어난 자가 많아.”

무한의 안색도 침중했다.

정천맹의 패배는 예상했던 바다. 권왕은 너무 성급하게 출정했다.

그러나 권왕의 죽음까지는 예상치 못했다.

권왕은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런 그가 죽을 정도라면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일 것이다.

“정천맹 출정 인원이 몇이었지?”

“삼천.”

황제의 밀명을 받고 간 삼천 무인이 죽었다면 황제가 군을 동원한다 해도 막을 명분이 없다.

‘마천주도 그런 상황을 알 텐데…… 마천주가 직접 나섰을까?’

그러자 도왕의 안위도 궁금했다. 도왕은 마천주와 겨루고자 감숙으로 먼저 떠났다.

전서지는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없기에 궁금한 것 투성이였다.

남궁우가 근심 어린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소가주는 어찌 됐을까?”

남궁세가 소가주 남궁악이 일백무인과 함께 참전했는데 권왕이 죽는 대패라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이 일어섰다.

손우자를 제거하는 것도 시급하지만 감숙에서의 변고에 대처하는 것도 중요했다.

“감숙으로 가봐야겠다.”

사황자는 병부를 받는다 해도 강호를 건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조정과 강호 간에 상호불가침이 지켜지면 황실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여할 바가 아니다.

사황자가 육황자를 주시하기 시작했으니 손우자도 함부로 처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한이 남궁우에게 말했다.

“너는 천하방으로 가서 소소하고 마천과의 전면전을 검토해줘. 귀 호위는 회복될 때까지 여기 머물게 해주고.”

이어 염량에게 일렀다.

“강 군사에게 출정 준비를 하라고 전서를 보내시고…… 남궁 군사를 잘 부탁합니다.”

말미에 특별히 호위를 당부하자 남궁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나 그렇게 약하지 않아.”

“알아. 하지만 지금은 혼란스러운 상황이니 조심해야 해.”

이윽고, 무한의 신형이 사라졌다.

***

고원에 모래바람이 불었다.

마천과 정천맹의 접전지를 찾았으나 부러진 병장기만 흩어져 있었다.

무한은 접전지를 살피고 곧장 난주로 향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감숙에 와서 들은 바에 의하면 정천맹은 집결지에서 기습을 받았다.

십이가신 가문이 한밤중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대패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마천도들이 추격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집결지는 수뇌부들만 알고 있을 텐데, 마천이 알고 있었다는 건 정천맹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거겠지.’

이런 결과를 가장 원한 건 손우자다.

공손승이나 문요를 보냈을 때 내심 뭔가 수작을 부릴 것이라 짐작은 했다.

하지만 형일천이 신중한 자이고, 대파와 세가에도 인재가 많으니 이렇게 맥없이 당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무한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 것은 도왕과 권왕의 죽음이다.

아직 중원까지 퍼지지 않았지만 감숙 변방에는 마천주가 천하제일인 비무행에 나섰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도왕이 마천주를 찾아 생사결을 벌였고, 격전 끝에 도왕의 목을 벤 마천주가 스스로를 천하제일인이라 자처하며 자신과 비교할 만한 절대고수를 모두 척살하겠다고 선언했다 한다.

그 첫 번째 희생자가 권왕이라는 것이다.

마천주가 과거 마교에서 실전된 북명신공을 복원했다는 말도 돌았다.

북명신공은 사람의 정기를 흡수하는 마공이다. 이 때문에 결국 마교라 낙인이 찍히고, 중원에서 축출되었는데, 마교에서도 폐해가 커서 아예 비급을 불태웠다고 전해왔다.

실제로 마천주가 북명신공을 복원한 것인지, 아니면 도왕과 권왕을 연달아 격파한 무위가 과장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무한은 마천주와 겨뤄봤기에 대략 그의 무위를 파악하고 있다. 그때 도왕보다 한 수 위이기는 했다.

하지만 도왕은 천하방주를 내려놓으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랬으니 마천주와 동수를 이루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마천주가 연달아 도왕과 권왕을 격파했다면, 그가 생사경을 확실하게 넘어섰다고 봐야 한다.

무한은 이제 무공의 단계라는 게 무의미한 경지다. 생사경이니, 그 이후 경지를 뭐라 부르던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 이후를 누가 얼마나 갔는지, 어떻게 갔는지 알 수가 없다. 무얼 어떻게 수련하는지 조차 스스로 결정하고 가야 한다.

하지만 그런 절대지경의 고수 간에도 격차가 있을 것이고, 실낱같은 미세한 차이에 생사가 오갈 것이다.

마천주가 무한을 천하제일인 비무행의 상대로 선정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무한은 마천주를 제거할 생각이다.

손우자와 마천주 두 사람만 제거하면 무림을 어지럽히는 화근을 뽑는 셈이다.

혹시 마천주와 동귀어진 할 수도 있어 손우자를 먼저 제거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면 이번 난주행이 마지막 길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