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태자는 핍박하고 사황자는 부추기면 두 세력은 자연 충돌하게 된다.
‘지병을 오래 앓았던 황제가 일어나자마자 이런 수를 낼 수는 없지. 일적진인의 훈수가 있었을 것이고, 여기에 손우자의 입김이 들어갔다면…….’
손우자의 의도가 확실해졌다.
거기까지는 황제와 손우자가 바라는 바가 맞아떨어진다. 그 뒤에 황제가 급사한다는 것만 빼고.
사황자의 저택 앞은 마차로 붐볐다.
남궁문유와 무한은 외원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대청과 정원에 갖가지 음식과 술이 놓여 있었고, 사람들이 오가며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대청 상석에는 사황자가 앉아 있었고, 좌우 주빈(主賓) 자리에 고관대작으로 보이는 이들이 줄지어 풍악을 즐기고 있었다.
남궁문유를 본 사황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 문 앞까지 마중 나왔다.
사황자는 건장한 체구에 헌앙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눈꼬리가 가늘고 입매가 얇아 덕이 부족해 보였다.
“대학사께서 친히 왕림하시니 자리가 더욱 빛나는 것만 같습니다.”
“무슨 말씀을… 관직에서 물러나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는 늙은이를 잊지 않고 불러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두 사람이 겉치레 인사를 나누었다.
사황자의 시선이 대학사의 뒤에 있는 무한에게 향했다.
“이 헌앙한 젊은이가 천하방주군요.”
“심무한이라 합니다.”
무한이 짤막하게 답했다.
황실은 물론 관료사회에서 백성이 자신을 칭할 때는 소인이라며 자신을 낮춘다. 그러나 무한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사황자의 눈가가 잠시 꿈틀하였으나 이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강호의 인재를 만나게 되니 반갑군.”
그러면서 자리를 내주려 하였다.
“평범한 백성이 어찌 고관대작이 계신 자리에 동석하겠습니까. 마침 정원이 아름다우니 구경을 하고 있겠습니다.”
말을 마치곤 바로 대청 계단을 내려갔다.
말로는 자신을 낮추었으나 행동으로는 당당하게 자기 할 바를 하니 사황자는 다시 한번 눈가를 떨며 무한의 뒤를 보았다.
무한은 외원 아담한 나무 그늘 아래 차려진 음식상 앞에 앉았다.
약간 외진 곳이라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다. 주위가 북적이는데 나무 그늘만큼은 사람이 없으니 호젓한 느낌마저 들었다.
외원에는 잘 차려입은 선남선녀들이 오갔다. 하나같이 패옥과 복대, 목걸이와 호화로운 관을 썼기에 아무 장신구가 없는 무한의 외모가 눈에 띄었다.
한 무리의 청년과 여자들이 지나가다 그중 한 사람이 무한을 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이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다가왔다.
“귀하는 황도에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성함을 여쭤 봐도 되겠소?”
“윗사람을 모시고 왔을 뿐이오.”
무한은 사황자나 손우자가 이번 연회에 자신을 부른 데는 필시 다른 의도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불필요한 접촉은 피하고자 했다. 그런데 대갓집 공자로 보이는 청년은 무슨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그냥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윗사람을 모시고 왔다면 있을 자리가 여기가 아닐 텐데?”
고관대작의 수발을 드는 이들은 외원 밖에서 대기하는 중이다.
“조 형, 거기서 뭐하는가?”
청년이 무한에게 다가가 돌아오지 않자 무리 중 한 사람이 다가오며 물었다. 또래로 보이는 청년은 다부진 체구에 은은한 기운이 흘렀다.
조 형이라 불린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아, 종 형. 낯선 친구가 있어 가까이 해보려던 참이네. 이런 연회의 백미가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 아니겠는가?”
종 형이라 불린 청년이 무한을 보았다.
입고 있는 차림은 꽤 비싸 보였는데 패옥이나 장신구가 없었다.
다부진 체구에 탈속한 듯한 풍모, 윤기가 흐르는 하얀 얼굴이 예사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어딘가 관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강호인이라고 짐작했다. 사황자는 찾아오는 식객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중에는 강호인이 있다는 소문도 있다.
종 형이라는 청년이 강호 방식의 포권을 하며 말했다.
“나는 종선이라고 하오. 귀하께서는 무인이시구려.”
종선이 은근한 기세를 흘렸다.
무한은 이들에게 악의가 없음을 알고 가볍게 포권을 하였다.
“심무한이라 하오. 여기 조 형에게 말씀드린 대로 대학사를 모시고 왔을 뿐이오.”
“아, 무인이시구려. 나는 조광운이라 하오.”
조광운도 강호 방식의 포권을 하였다. 그러나 눈빛에는 이채가 흘렀다.
대학사 남궁문유가 태자당의 거두로 사황자와 대치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사실 이 연회는 사황자가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회유하는 자리다.
다만 그런 회유의 대상이 되는 자들은 무척이나 거물들이고, 나머지는 사황자를 따르는 세력이었다.
사황자는 수많은 인재들을 불러 세를 과시함으로써 거물들을 압박하고자 했다.
종선이나 조광운도 지금 차림은 대갓집 공자 같지만 실제로는 형부와 이부의 중진들이다.
특히 종선은 사황자를 따르는 당파의 핵심 인물의 자제였다. 무한이 남궁 대학사를 호위하여 왔다니 은근히 시험해보고 싶었다.
“남궁대학사는 강호 오대세가라는 남궁세가 출신인데… 귀하는 남궁세가 사람인가 보구려.”
“그렇지 않습니다. 작은 인연으로 여기까지 왔을 뿐입니다.”
“그렇구려. 강호에는 여러 문파가 있는데 귀하처럼 출중한 인재를 배출한 곳은 필시 명문정파이겠군요.”
“가문의 무공을 익혔을 뿐입니다. 두 분은 관직에 계신 듯하군요.”
무한은 이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으며, 쉽게 떨어지지 않을 걸 알자 오히려 되물었다.
“하하, 종 형은 형부의 조마이고, 본관 역시 이부에서 작은 직을 맡고 있소.”
조마라면 종팔품으로 이들 나이에 비해 꽤나 높은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뒷배가 있는 자들이로군.’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관직에 계신 분들이었군요.”
종선과 조광운은 자신들의 신분을 듣고도 무한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 내심 의아했다.
생김으로 보아 무지한 자는 아닌 듯한데 말은 정중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을 저자거리 필부 대하듯 한다.
‘이자의 내력이 흥미롭구나.’
종선이 무한을 찬찬히 들여다보는데 사황자의 집사 하나가 다가와 무한에게 정중히 예를 올렸다.
“방주, 황자께서 찾으십니다.”
무한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주인이 부르니 가지 않을 수 없군요. 반가웠소.”
그리고 집사를 따라 성큼성큼 가버렸다.
조광운과 종선은 잠시 황당하여 무한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이런 무례한 자가 있나.
이윽고.
“방주? 방금 방주라고 불렀지?”
조광운이 중얼거리며 종선에게 물었다.
“자네는 강호 사정에 그래도 아는 바가 많지 않은가. 저 나이에 방주를 할 수 있나?”
그러다 종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걸 보았다.
“자네 왜 그러나?”
“심무한…… 내가 왜 이름을 듣고도 생각지 못했지?”
종선은 넋이 나간 듯 멀리 사라진 무한의 뒷모습을 보았다.
조광운이 의아하여 물었다.
“저자가 누군데 그러나?”
종선이 멍한 얼굴로 흘리듯 중얼거렸다.
“우리 방금… 절대고수를 만난 거야. 저자가 천하방주라고…….”
사황자는 대청 옆 편전 작은 다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한이 들어서자 자신의 옆 손님자리를 내주었다.
사황자의 얼굴은 약간 붉었고, 입에서는 술 내음이 났다.
“잠시 차를 마시려다 자네 생각이 나서 불렀네.”
무한이 사황자를 주시하였다.
시비가 찻잔을 건넸다.
두 사람이 차를 한 모금씩 마시고 내려놓았다.
사황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람들은 내게 사람이 많다 하지. 하지만 정작 쓸 만한 사람은 많지가 않네.”
무한이 담담한 어조로 받았다.
“전하의 식객이 들으면 부끄러워하겠군요.”
“하하하. 그들과 나는 격의 없이 지내지. 평소에도 나는 그들에게 재주 없음을 탓한다네. 그들이 부끄러워한다면 염치가 있다는 뜻이지.”
사황자가 호탕하게 웃다가 돌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자네가 왜 조정의 일에 간여하는가?”
사황자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무한은 그저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
“조정이 강호에 간여하니 어쩔 수 없이 나선 것뿐입니다.”
상대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내니 무한도 말을 돌리지 않았다.
사황자가 인상을 썼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조정은 천하를 관장하네. 만백성의 평안이 곧 조정의 일이지. 백성이 도탄에 빠져 시름하는데 어찌 그냥 보고만 있겠나?”
“…….”
무한이 담담히 웃었다.
사황자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자네를 천하방주라는 신분으로 예우하고 있네. 자중해야할 것이야.”
“다른 뜻은 없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상황을 돌려 말하는 걸 보니 확실히 조정 사람을 대하기가 쉽지 않음을 느낀 것뿐입니다.”
“뭐라?”
“마천과 흑천이 발호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강호의 풍파는 수백 년간 이어져 왔지요. 지난 정마대전에서는 무림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이 죽었습니다.”
“……”
무한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당시 조정이 나서려고 했지요. 하지만 결국 수많은 조정 대신의 반대에 부딪혀 시늉만 하다 만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한이 차를 한 모금 다시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 마천과 흑천의 발호는 과거와 다릅니다. 무림인 간의 영역다툼이지요. 마천과 흑천 역시 역풍을 두려워하여 민간의 피해를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대군을 동원한다니 의외가 아닐 수 없지요.”
무한이 사실을 적시하자 사황자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대군이 움직이면 백성은 고충을 겪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무릅쓰고 출병을 하려는 이유가 조정에 있으니 저 역시 간여하지 않을 수 없군요.”
“흥! 천하방주가 그리 대단한가? 일만 대군을 보내 쓸어버릴 수도 있다.”
무한이 탄식하며 말했다.
“무림방파란 있다가도 없어지고, 흩어졌다가도 모이면 됩니다. 대군이 오면 흩어지고 돌아가면 다시 모일 수 있지요.”
무한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은 되돌아올 수 없습니다.”
사황자의 안색이 홱, 바뀌었다. 무한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되돌아 올 수 없는 사람 목숨이란 바로 사황자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사황자가 언성을 높였다.
“뭣이? 지금 내 집에서 나를 협박하는 겐가? 제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무한이 문득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제법 많은 이들이 모여 있군요. 편전 뒤쪽에 일백, 좌우에 일백… 그리고 고수도 제법 되는군요. 하지만 그들은 전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지금 대들보 위에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더니 무한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찻잔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 전하의 목숨이 제 손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건방진!”
사황자가 벌떡, 일어나려 했다. 아니 일어나고자 했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한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이 동하면 취할 것이고, 흩어지면 잊고 살리라.”
마치 한가로이 시를 읊는 듯하였다.
사황자의 이마에 땀방울이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