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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16화 (216/250)

216화

남궁우가 무한과 상의한 위장술에 대해 설명하자 남궁문유는 바로 알아들었다.

“나보고 미끼가 되라는 거로군.”

“헤헤. 그런 셈인가요?”

남궁우가 겸연쩍은 웃음을 흘렸다.

“굳이 꾸밀 것도 없다. 실제로 우리는 일적진인의 배후를 캐고 있으니까. 도관을 감시하러 사람을 보내면 자연스럽게 태자당을 의심하겠지.”

남궁문유가 계획을 받아들였다.

“이제 우리가 한 배를 탄 셈인가?”

“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무한이 물었다. 남궁문유가 한 배를 탔다고 한 말에 담긴 의미 때문이다.

짧게는 지금 받아들인 위장술을 지칭하지만, 길게 보면 태자가 권력을 잡는 데 동참하라는 뜻도 된다.

무한의 의중을 알아챈 듯 남궁문유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태자가 성군이 될 거라 장담할 수는 없다. 다만 적어도 삿된 무리에 현혹될 혼군은 아니지.”

“사황자와 육황자에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천하방 군사부의 정보가 있긴 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고관의 의견이야말로 가장 정확할 것이다.

“사황자는 폭군이다. 육황자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성정 또한 여린 편이다. 아마도 육황자가 보위에 오른다면 조당 대신들의 권력다툼이 극심해질 것이다.”

무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손우자가 사황자와 직접 손을 잡을 것인지, 아니면 육황자를 선택할 것인지, 아직 그 어느 쪽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내가 손우자라면 육황자를 택하겠지. 하지만 사황자도 만만치 않은 자야. 태자의 견제도 있을 테고.’

남궁문유는 현명한 자였다. 무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듯 말했다.

“내가 그 손우자라는 자였다면 사황자와 육황자 사이에 걸쳐 있을 것이다. 길게 본다면 무척 위험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단기간에 끝날 싸움이다. 두 사람을 잠깐 속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

황제의 목숨이 조만간 훅, 꺼진다. 그러니 권력다툼은 굵고 짧게 끝날 것이다.

‘역시 조정 고관의 감은 무시할 수 없구나.’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누구를 택하든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그자만 잡아내면 됩니다.”

무한이 황자 간의 다툼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에둘러 표현했다.

남궁문유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에 미끼를 자처하셨으니 신변 안전에 만전을 기하셔야 할 겁니다.”

“황도는 치안이 좋다네. 그리고 본가에서 보내온 호위들의 실력도 쓸 만하고.”

남궁문유의 시선이 문 쪽을 향했다.

문밖에는 남궁세가에서 온 호위 둘이 번갈아 지키고 있었다.

그날 밤.

객방에서 자던 무한이 눈을 떴다.

이어서 염량의 전음이 들려왔다.

- 누군가 저택에 들어왔습니다. 고수입니다.

- 지켜보다 대학사께서 위험하면 나서주세요.

그러면서 옷을 챙겨 입었다.

그 짧은 사이.

“누구냐!”

외침과 함께 답답한 신음성이 터졌다.

남궁문유의 거처 앞마당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흑의를 입고 복면을 쓴 자가 남궁세가 호위의 가슴팍에서 검을 뽑았다.

“흑!”

남궁세가 호위가 그대로 주저앉는 순간, 옆에서 다른 호위가 튀어나오며 고함을 질렀다.

“대학사, 피하십시오!”

자신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수라는 걸 알아채고서 남궁문유에게 경고하고 시간을 끌고자 했다.

하지만 흑의인의 무공은 그의 예상을 초월했다.

피리리릭!

어둠 속에서 검광이 번뜩이자마자 두 번째 호위도 검기에 심장을 관통당하고 말았다.

흑의인의 살기어린 눈이 어딘가를 향했다.

뒤늦게 달려온 염량이 가볍게 탄식을 하였다. 상대의 무공이 이리 강할지 몰랐다.

검천사위 나머지 형제들을 깨우느라 잠시 지체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미 늦었다.

남궁세가 호위도 일류라고 할 수 있는데 불과 두어 초 만에 죽고 말았다.

염량의 뒤에 방옥헌과 조공하, 문역기가 날아와 섰다.

흑의인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너희는…… 남궁가 놈들이 아니군. 어디서 온 놈들이냐?”

“네놈 신분이나 밝혀라.”

“크크. 두 놈을 죽이나 여섯 놈을 죽이나 상관없지.”

흑의인의 전신에서 살기가 흘러내렸다.

염량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흘러나오는 기도를 봐서 최소한 진경의 고수임이 분명했다.

피리리릭!

흑의인이 검을 찔렀다.

검천사위가 사방으로 퍼지며 흑의인을 포위하였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검천사위의 동작은 한 몸처럼 자연스러웠다.

“합격에 능한 놈들이로군. 강호에서 왔느냐?”

그 한마디에서 자신은 강호 출신이 아니라는 걸 밝힌 셈이다. 그러나 흑의인은 개의치 않는 듯 남궁문유의 거처 쪽을 보았다.

“남궁문유. 애꿎은 목숨을 희생시키지 말고 어서 나와라. 네 늙은 목숨을 거두러 왔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의관을 정제한 남궁문유가 나타났다.

남궁문유의 시선이 참혹하게 죽은 두 호위에게 잠시 머물렀다. 이어 가볍게 탄식을 하곤 말했다.

“곧 죽을 목숨인데 뭐가 두려워 이 밤중에 찾아온 게냐.”

흑의인은 나타난 자가 남궁문유임을 확인하고 휙, 몸을 날렸다.

그러자 염량과 방옥헌이 동시에 검을 뻗어 막았다. 흑의인의 등 뒤로 조공하와 문역기가 검기를 날렸다.

“흥!”

흑의인이 싸늘한 코웃음을 날리곤 몸을 휙, 회전하였다.

채채챙!

검천사위가 날린 검기가 흑의인의 검에 의해 모조리 튕겨나갔다. 무섭도록 빠른 쾌검이었다.

‘황도에 이런 고수가 있었다니.’

염량이 연신 검을 놀려 상대를 공격하면서도 내심 놀랐다.

흑의인 또한 검천사위의 무공에 약간 놀란 듯, 움직임이 진중하였다.

강호인들은 조정을 우습게 보고, 조정은 강호인들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다. 쌍방이 서로의 무공에 대해 감탄하였다.

채채챙!

흑의인과 검천사위가 격돌하며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남궁문유 거처 앞마당은 현란한 검광으로 뒤덮였다.

검천사위의 합공 속에서도 흑의인은 거침없이 운신하였다. 어느 순간, 조공하의 검을 쳐내는 동시에 남궁문유를 향해 왼손을 휘둘렀다.

쉬익!

비도가 남궁문유를 노리고 날았다.

이를 본 염량의 안색이 확, 굳었다.

남궁문유부터 들어가라고 했어야 했는데…….

“조심하십시오!”

조공하도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비도는 섬전과도 같이 남궁문유를 관통하려 하였다.

대범한 남궁문유조차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자신의 방심을 탓하고 죽음의 순간을 기다렸는데…….

“……!”

비도가 남궁문유의 코앞에서 멈췄다.

흑의인이 크게 당황했다. 검천사위의 합공을 막으면서 주위를 살폈다.

쨍그랑!

힘을 잃은 비도가 청석에 떨어졌다.

이어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검은 장포를 입은 청년은 마치 탈속한 듯한 용모를 지녔다.

청년과 시선이 마주치자 흑의인은 저절로 몸이 위축되는 것만 같았다.

‘이럴 수가!’

청년의 단정한 입술이 열렸다.

“잠시 물러나시죠.”

그러자 검천사위가 사방으로 물러나 흑의인을 포위하였다.

흑의인은 두 눈만 내놓은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 눈에 놀람의 빛이 역력했다.

청년이 물었다.

“사황자가 보냈습니까?”

흑의인이 눈만 굴렸다.

무한은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쉼 없이 흔들리는 눈빛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

무한이 쓰러진 남궁세가 두 호위의 시신을 보곤 탄식하였다.

흑의인이 두 호위를 죽이지 않았다면 굳이 목숨까지 거둘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을 해친 이상 그냥 놔줄 수는 없었다.

흑의인은 무한의 탄식을 듣자 자신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였음을 깨달았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자인지 모르지만 반노환동을 의심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고수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흑의인은 자신의 진신절기를 펼쳐 무한을 한 발 물린 후 곧장 도주할 생각을 했다.

“합!”

흑의인이 검과 한 몸이 되어 날아갔다.

그러나 그는 무한 앞 일 장 거리까지밖에 가지 못했다.

“크윽!”

복면 속에서 핏물이 번져 나왔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그는 자신의 심장이 쪼개졌음을 느꼈다.

‘심검?’

그는 자신이 당한 게 전설의 심검이 아닐까 생각하며 쓰러졌다.

무한이 굳은 듯 서 있는 남궁문유에게 다가가 등 뒤에 손을 댔다. 기운을 흘려주자 놀란 기맥이 안정되었다.

남궁문유가 놀란 시선으로 무한을 보았다.

“자네… 신이라도 되는 건가?”

비록 문관이지만 그 역시 남궁세가 출신으로 수많은 무인을 보았다.

그러나 손도 대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수법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무한이 천하방주라는 말은 들었지만 인간을 초월한 고수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신이라면…… 사람 목숨을 거두겠습니까?”

저 높은 하늘에서 바라보는 인간세는 사람이 개미를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찮은 미물을 굳이 죽일 이유가 없다.

무한은 그 한 마디로 자신 역시 인간세에서 아옹다옹 아귀다툼을 벌이며 사는 신세임을 말한 것이다.

무한이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궁문유는 멍하니 서서 무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한의 한마디가 마치 벼락처럼 그의 뇌리를 관통한 것만 같았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무한을 보던 남궁문유가 이윽고 장탄식을 흘리곤 중얼거렸다.

“평생을 경전을 연구하며 살았건만 자네의 한마디를 감당할 수가 없으니…….”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

황제가 사황자에게 병부(兵符) 내주려 한다는 풍문에 유생과 조정 간관의 상소가 빗발쳤다.

사황자는 미묘한 시기에 득남(得男)을 빌미로 연회를 열었다.

비록 물러난 대학사이지만 남궁문유도 초청을 받았다.

초청장을 가져온 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귀댁에 강호 천하방 방주가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곤, 함께 오시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태자당의 거두 남궁문유를 초청한 것도 놀랍지만 정확히 무한을 찍어 함께 오라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사황자가 오래전부터 권좌를 노려온 모양이야.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방주가 머물고 있다는 걸 알아내다니…….”

남궁우가 우려의 빛을 내비쳤다.

무한이 제아무리 인간을 초월한 무공을 지녔다고 하나 공공연하게 황실 황자와 맞설 수는 없다.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염려할 것 없어. 그 또한 황제의 신하일 뿐이야.”

연회는 내성 사황자의 저택에서 열렸다.

황도는 크게 외성과 내성이 있고, 내성 안에 황궁이 있다. 황궁 또한 외성과 내성으로 또 구분된다. 황궁 내성에는 황제가 살고, 황궁 외성에는 황실 종친이 거주한다.

그러나 혼인을 한 황자는 황궁 밖 내성에 사가를 만들 수 있었다. 사황자는 내성에 저택을 마련하고 비교적 자유롭게 살아왔다.

남궁문유와 무한은 함께 마차를 타고 사황자의 저택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남궁문유가 말했다.

“아무래도 황궁에 머물면 움직임에 제한을 받지. 사황자의 저택에는 온갖 재주를 지닌 수많은 객경이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네.”

“그 옛날의 누군가를 흉내 내는 모양이군요.”

제나라 재상 맹상군이 삼천 식객을 대접하였다는 고사를 떠올리며 무한이 답했다.

“그런데도 황제가 공공연하게 방치한 걸 보면 사황자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듯합니다.”

“황제는 그간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전념했네. 죽으면 권좌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러니 사황자가 뭘 하든 관심이 없었지.”

무한이 생각에 잠겼다.

황제의 의중을 알 것 같았다.

‘태자와 사황자가 동시에 몰락하기를 바라는 거야. 그러면 육황자가 장성할 때까지 보위가 안정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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