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천하방의 이념을 따르는 중원 정도 인사라면 누구나 천하전에 들어올 수 있다니.
실로 대단한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무한의 말에 빈객으로 참석한 소림 장경각주 방수와 무당 태청관주 청해의 안색이 굳었다.
천하방 명칭을 떼러 왔는데 오히려 천하방을 개방하고, 중원 정도가 한 형제라니.
절벽을 마주한 도왕이 눈을 떴다.
천하전 광장에 울려 퍼진 무한의 목소리는 여기 천하방 뒷산까지 들려왔다.
‘천하를 품을 수 있어야 천하방주가 될 자격이 있는 거였다.’
오로지 무의 극의를 추구하여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를 생각만 했던 지난날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도왕의 얼굴에 깨달은 자만 얻는 웃음이 번졌다.
“이제 갈 수 있겠구나.”
도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크게 웃으며 외쳤다.
“하하하! 천하방은 협의로 중원 정도를 관장한다!”
이어 몸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뒷산에서 울려퍼진 도왕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천하전 광장이 진동하였다.
무한이 도왕이 있는 쪽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방금 도왕의 목소리 아닌가?”
“이런 취임식은 본 적이 없어. 피를 끓게 하는구만.”
하객들이 소곤거렸다.
천하방주의 교체 뒤에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도왕의 외침이 이를 일축시켰다.
두둥!
큰북 소리가 짧은 취임식의 종료를 알렸다.
***
“크윽!”
귀영이 뚫린 옆구리를 부여잡고 달렸다.
일적진인이 드나든다는 작은 도관을 알아내서 감시하기를 며칠.
결국 도관 뒤 작은 암자에 서생이 거주한다는 걸 알아냈다. 그 암자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도록 딱 막고 있었다.
귀영은 한밤중에 도관에 스며들었다가 누군가의 공격을 받았다. 어둠 속에 은신한 자는 무려 넷이었다.
귀영은 끝내 중상을 입고 간신히 도관을 탈출하였다.
“헉, 헉!”
피를 많이 흘린 탓에 자꾸만 눈앞이 희미해지고, 다리는 천근만근 무겁다.
“크크. 도망쳐봐야 소용없다.”
어느새 놈들이 따라붙었다.
귀영은 무한으로부터 내공심법을 전수받고, 도법 또한 보완하며 나름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고 자부해왔다.
귀영이 도를 앞세워 악을 썼다.
“새끼들아. 비겁하게 다구리 치는 거냐? 한 놈씩 붙자! 한 놈씩 와라!”
어둠 속에서 세 놈이 나타났다. 최초 접전에서 한 놈 허벅지를 썰었는데 중상이었나 보다.
세 놈이 품자형으로 귀영을 포위하였다.
‘아, 씨발. 거의 다 왔는데.’
귀영이 주위를 돌아봤다.
황도에서 도관으로 가는 산길이다. 조금만 더 가면 황도 성밖마을이다. 그곳만 가도 치안이 나으니 살길을 도모해볼 수 있을 텐데.
‘천하의 귀영이 여기서 죽다니…….’
지금 몸 상태로는 저놈들을 상대하기는커녕 빠져나가기조차 어렵다.
‘쳇. 그래도 요 몇 년은 재밌어어.’
수년간 무공만 수련하는 어린놈 지켜보다 이대로 생이 끝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무한에게 발각된 이후 놀만큼 놀며 살았다.
천하방 성밖마을 기루도 무한 모르게 수시로 들락거렸고, 휘주에서도 서안에서도 기루의 풍운아로 제법 날렸다.
귀영이 도를 움켜잡고 퉤, 침을 뱉었다.
“내가 한 놈은 꼭 데려가겠다. 누가 먼저 죽고 싶냐?”
“미친 새끼!”
쉭!
등 뒤에서 비도가 날아왔다.
귀영이 휙, 돌아서며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팅!
도를 비틀어 비도를 튕겨내고 그대로 내려찍었다.
‘귀선참!’
귀신도 가른다는 도법이 어둠을 갈랐다. 상대가 움찔, 뒤로 물러서려는 찰나 칼이 사라졌다.
“이게 무영도법이다, 이 새끼야!”
귀영이 바락바락 악을 쓰며 칼을 비틀었다.
상대가 대도를 비켜 세워 방비하며 다시 한 걸음 물러났으나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크윽!”
놈의 옆구리에 귀영의 칼이 박혔다.
“좋냐? 칼 맞으니 좋냐?”
귀영은 죽음을 앞두고는 반쯤 광기에 휩싸였다. 미친 듯이 발악하며 도를 휘둘렀다.
놈의 옆구리를 찍는 사이 등판에 한 칼 먹었다. 호신구를 착용하고 있었으나 충격이 컸다.
“커윽! 이 새끼들, 한 놈씩 오라니까!”
귀영이 앞으로 밀려나며 피를 토했다. 눈앞이 잠시 화끈하고 하얗게 물드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몸에 익은 동작이 자기도 모르게 펼쳐졌다.
땅바닥을 구르는 뇌려타곤.
등판을 맞고 앞으로 밀려나가는 기세 그대로 땅을 굴렀다가 발딱, 하고 일어섰다.
아니, 서려다가 비틀거렸다. 옆구리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그 틈을 노리고 다른 한 놈이 귀영의 목을 그어내렸다.
순간, 귀영이 두 눈을 부릅뜨고 휙 돌아봤다.
눈에서 귀화가 번뜩이자 상대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귀영이 흔들, 하고 상체를 앞으로 숙이는가 싶더니 칼이 그의 어깨를 찍는 순간 복부에서 서늘한 소리가 났다.
스걱!
어느새 귀영의 칼이 놈의 복부를 파고들어 척추를 끊어냈다.
“크윽!”
귀영과 놈이 동시에 피를 토하며 떨어졌다.
상대는 뒤로 비틀거리며 일 장 정도 물러났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귀영 역시 더 이상 서 있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이번 놈의 칼에 오른쪽 어깨가 찍혀 뼈까지 드러났다. 이제는 칼을 들 힘조차 없었다.
“이 새끼야. 그게 바로 절세신공 암왕귀령도법이란 말이다. 절세…신공에 죽은 걸… 영광으로 여겨라.”
그러고는 왼손 손가락을 까닥거려 남은 한 놈을 불렀다.
“한 놈씩 오라고 했지. 이제 너밖에 안 남았다. 와라.”
죽음을 앞두고 광기에 싸인 귀영의 발악에 나머지 한 놈이 거리를 두었다. 놈이 귀영을 살폈다.
다 죽은 놈이다. 하지만 방금도 다 죽었다고 생각하여 공격했다가 동료를 둘이나 잃었다.
‘저 새끼는 완전 미친놈이야! 동귀어진 하겠다는 거겠지.’
죽기를 각오한 귀영이 오라고 손가락을 까닥거리니 내심 주눅이 들었다.
이대로 좀 버티면 피를 많이 흘린 귀영은 의식을 잃을 것이다. 그때 목을 베면 된다.
“크흐흐. 미친놈, 잘 가라!”
다가가지는 못하고 비도를 날렸다.
귀영이 도를 움직여 비도를 튕겨냈다.
무한이 귀영에게 전수한 내공심법이 소금강연환대라심법이다. 그렇기에 근육이 상하고 뼈가 부러져도 내공으로 신체를 조절할 수 있었다.
“역시 개새끼였어.”
상대가 욕설을 퍼부었다.
다 죽어가는 놈이 부러진 어깨로 비도를 막아내다니. 끝났다고 생각하고 다가갔다면 역습을 당할 뻔했다.
“흐흐. 나는 시간이 많지. 죽을 때까지 기다려주마.”
놈이 지껄이는데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기다릴 필요 없어. 먼저 가라.”
순간, 놈의 머리가 굴러떨어졌다.
“헉! 귀왕이 도와주시나보네?”
귀영이 흐릿해지는 시선으로 머리를 잃고 쓰러지는 시신을 보다 의식을 잃었다.
귀영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푹신한 침상이었다.
‘어찌된 거지?’
목이 말랐다.
“괜찮습니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 물을 건넸다.
“헉? 부주, 아니 이제 방주지. 방주가 여길 어떻게?”
무한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귀영이 어리둥절해하였다.
천하방주 취임식이 엊그제였다. 열흘간 축하연을 한다고 했는데 왜 여기 있는 거지?
“그새 방주에서 짤리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무한이 취임 축하연 기간을 넉넉히 잡고 일정까지 공개한 것은 손우자를 의식해서였다.
무한은 취임식을 마치자마자 천하방을 떠나 무명신법을 극성으로 펼쳐 황도까지 날아오다시피 하였다.
도착하자마자 남궁우를 찾았고, 귀영이 낡은 도관을 감시한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리고 자시가 지났는데도 귀영이 돌아오지 않자 직접 온 것이다.
손우자가 도관에 머물고 있다면 귀영이 위험에 빠질 공산이 컸다. 귀영의 은신술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손우자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하니까.
“정말 아슬아슬하게 살았군요. 어? 팔이 움직이네?”
귀영은 자신의 오른쪽 어깨가 제대로 움직이자 놀랐다. 근육이 잘리고 뼈까지 찍혔는데…….
무한이 웃기만 하였다.
“아직은 완전하지 않으니 몇 달 정양해야 합니다. 이로써 빚을 한 번 갚은 셈이군요.”
만독곡 앞에서 자신을 살리고자 발악했던 귀영이다. 무한은 진원지기(眞元之氣)를 사용하여 귀영의 어깨근육을 붙였다. 그럴 수 있었던 데는 귀영이 익힌 소금강연환대라심법의 효능도 적잖이 작용했다.
귀영은 깨어나고서도 감각이 없어 불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을 수 있다는 말에 감격하였다.
“한잠 더 자는 게 좋겠군요.”
무한이 약을 먹이고 귀영의 수혈을 짚어 잠을 재웠다.
밖으로 나오니 남궁우가 서성거리고 있다가 다가왔다.
“귀 호위는 참 대단한 주인을 만났군. 진원지기까지 퍼부어 치료를 해주다니.”
자신의 진원지기를 이용하여 누군가를 치료한다는 건 무척 드문 일이다.
사승관계나 혈육이 아닌 이상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하고 난 뒤 이를 회복하려면 며칠간 정양을 해야 한다.
하지만 무한은 이미 생사경에 들어서며 진원지기를 사용했다 해서 그리 문제될 건 없었다.
“하긴, 고수니까. 고수는 참 좋아. 사흘 만에 만 리를 달려오고.”
남궁우가 부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도관에 손우자가 있었던 건 확실해. 하지만 이미 떠난 뒤였지. 그럼에도 마치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귀영을 끌어들였더군.”
귀영을 치료한 뒤 무한은 바로 도관을 찾았으나 이미 비운 지 꽤 됐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도 알겠군.”
“그래서 말인데 약간의 위장술을 펼쳐보는 게 어떨까?”
“위장술?”
“조정 한 세력이 자신을 감시하고 쫓는 걸로 믿게끔 꾸며보는 거지.”
무한은 자신이 나타난 걸 알면 손우자가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릴까 우려하였다.
남궁우가 눈알을 굴렸다.
“위장술이라… 방법이 있을 것 같아.”
남궁문유가 태자당 세력을 이용해 일적진인의 뒤를 파고 있다.
“태자당을 이용하면 아주 자연스럽지.”
마침 시비 하나가 와서 남궁문유가 부른다고 말했다.
“같이 가지. 천하방주가 왔다면 든든해하실 거야.”
무한은 남궁우와 함께 남궁문유의 서재로 갔다.
무한은 백발을 단정하게 묶은 노학사를 향해 예를 취하곤 말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객방을 드나들어 죄송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아의 손님이면 내 손님이기도 하지. 그 나이에 천하방주라니… 대단하군.”
나이가 든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건지, 무한을 보는 눈빛이 사윗감을 보는 듯했다.
“가주가 자네 칭찬을 많이 하더군.”
남궁문유는 일적진인의 뒤에 강호세력이 있다는 말을 들은 뒤 본가로 연락해 강호 사정을 파악했다.
그 가운데는 중원 정파가 천하방과 정천맹으로 쪼개졌다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 대학사께서는 안녕하신가?”
남궁문유가 동중용의 안부를 물었다.
무한은 동중용이 말한 조정의 지기가 남궁문유라는 걸 깨달았다.
“잘 계십니다. 제가 그분이 관장으로 있는 천무관을 나왔으니 제 스승님이기도 하시죠.”
“심 방주는 천무관이 배출한 문무쌍절이래요.”
남궁우가 툭, 끼어들었다.
남궁문유가 그런 남궁우를 보고는 슬며시 웃었다.
“네 녀석이 왜 심 방주 자랑을 하는 거냐?”
“내가 천하방 총군사니까 그렇죠.”
무한이 약간 어이없어 남궁우를 쳐다봤다.
내가 남궁우를 천하방 총군사로 임명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