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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14화 (214/250)

214화

장경각주는 소림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인물이다. 태청관주 역시 무당에서 비중 있는 인사다.

“기별을 보내왔다는 건…….”

“마중 나와 달라는 거지.”

소림과 무당이 구파에서도 수장 격이지만 사소한 예에 얽매이지는 않는 강호방파이기에 이런 식의 대접을 바란다는 건 의외의 일이다.

“무림에서 소림과 무당의 명성이 높다 하지만 천하방주더러 마중 나오라고 하는 건 분명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이야.”

소소가 자기 의견을 밝혔다.

무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대장로 갈천경을 보내서 석비에서 맞으라고 하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가주들이 함께 세운 석비에는 천하제일방이라 새겨져 있다.

다음 날.

무한은 천하전 편청에 서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무리의 절반은 소림승이었고 나머지 반은 무당 도사들이었다.

대장로 갈천경이 그들을 안내하여 편청에 들었다.

무한은 편청 중간쯤에서 일행을 맞고 예를 취했다.

“소림과 무당의 고인들을 뵙습니다.”

황포에 붉은 가사를 두른 중년 승려와 푸른 도포에 학창의를 입은 도사가 마주 예를 취했다.

소림 장경각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빈승은 방수라 하오. 이리 젊고 헌앙한 천하방주를 뵙게 되어 영광이오.”

“무량수불. 태청관 청해라고 하오. 방주의 앞날에 천존의 축복이 있기를…….”

“앉으시지요.”

무한이 주인 자리에 앉자 방수와 청해가 객석에 앉았다.

몇 마디 서로 좋은 말이 잠시 오간 뒤 방수가 말했다.

“오늘 소림과 무당이 함께 찾아온 것은 천하방이라는 명칭을 돌려받기 위함이오.”

‘역시…….’

무한은 악양에서 낭인들에게 천하방은 천하를 관장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그때 천하 정도가 원하면 천하방이라는 명칭을 돌려주겠다고도 했다.

공손승의 뒤를 이어 정천맹 총군사가 된 문요가 소림과 무당을 부추긴 것이 틀림없었다.

정천맹을 유일한 무림맹으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천하방이 사라져야 한다. 우선 천하방이라는 명칭부터 떼어낸다면 순식간에 무림의 한 방파로 위상이 추락할 것이다.

방수에 이어 청해가 거들었다.

“천하방이 둘로 갈라지며 소속문파 역시 반으로 줄어들었소. 그러니 천하방이라는 이름을 감당하기 버거울 것이오.”

무한은 서늘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천하방의 명칭을 떼라니. 어허, 이럴 줄은 몰랐구려. 잔칫집에 와서 문패를 떼 가겠다니. 재를 뿌리겠다는 말이오?”

무한 옆에 앉아 있던 대장로 갈천경이 얼굴을 붉혔다.

무한과는 여러 차례 설전을 벌였기에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내부적인 일이고 지금은 대외적인 사안이다.

천하방이라는 명칭을 떼어 내면 대장로 자신의 위상도 그만큼 추락하니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방수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알다시피 지금 중원 정도는 마천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소. 힘을 한곳으로 집중해야 할 때이오. 대의를 위해 양보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소.”

“천하방이라는 명칭은 중원 정도의 안녕을 위해 소림과 무당이 주도하여 붙인 것이오. 이제 천하방이 중원 정도를 대표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 그 명칭을 감당하기 어렵지 않겠소?”

청해도 거들었다.

방수와 청해는 무한이 말없이 듣기만 하자 어린 방주가 당황하여 할 말을 잃은 것이라 여겼다.

과거 소림과 무당을 비롯한 구파와 오대세가는 천하제일인 검신 심양조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천하제일방이라는 명칭을 석비에 새겼다.

이는 무림의 태산북두로 추앙받아온 그들의 입장에서는 치욕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이후 구파는 봉문하다시피 하며 힘을 길러왔다. 이제 당당히 천하방이라는 현판을 떼어낼 정도에 이른 것이다.

이윽고 무한이 입을 열었다.

“본 방주는 천하방이라는 명칭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중원 정도에서 붙여준 명칭이니 역시 중원 정도가 거둬가겠다면 받아들여야지요.”

방수와 청해는 무심한 표정으로 듣는 척 했지만, 내심 의아해하였다. 거센 반발을 예측하고 왔는데 순순히 포기한다니 의외였다.

‘아직 어려서 천하방이라는 의미를 모르는 게 아닌가?’

장경각주 방수나 태청관주 청해는 자파에서 높은 지위의 인물이지만, 수행과 무공 수련에 전념하여 살아온 인물들이다. 그래서 속세의 귀계나 암투에는 서툴렀다.

그들이야말로 무한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순진함을 드러냈다.

“방주의 용단에 감사…….”

“잠깐, 마저 들어보시고 말씀하시지요.”

무한이 서둘러 대화를 끝맺으려 하는 방수를 제지하고 말을 이어갔다.

“오시면서 천하제일방이라는 석비를 보셨을 겁니다. 그 뒷면에 당시 구파일방의 수장과 가주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았지요.”

“……?”

“소림과 무당은 무림의 태산북두라 일컬어집니다. 허나 산문 앞에 석비로 새겨 놓은 바는 없지요? 만일 그랬다면 이는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 격 아니겠습니까?”

방수와 청해의 얼굴이 벌게졌다.

실은 그들도 각자의 산문 앞에 천하제일불산(天下第一佛山), 천하제일도(天下第一道) 석비를 새겨 놓았다. 천하방의 탄생 이후 상처 입은 자존심의 발로였으나 실로 유치한 행위였다.

“천하제일방이라는 석비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확실히 그 명칭을 감당하기 버겁기도 합니다. 허나, 이는 중원 정도가 붙여준 것!”

너희처럼 자기 손으로 세운 게 아니라고 지적하자, 방수와 청해가 슬쩍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자기 손으로 세운 건 자기가 알아서 치우면 되지만, 중원 정도가 합심하여 세운 석비는 버겁다고 치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무한이 서늘한 눈빛을 발하며 말했다.

“구파일방의 수장과 오대세가 가주들이 직접 와서 문파의 이름을 지우고 석비를 깨뜨리기를 바랍니다.”

선대의 수장들이 세운 걸 후대의 수장들이 와서 허물라는 뜻이다.

방수와 청해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소림 방장과 무당 장문더러 직접 와서 석비를 깨뜨리라니.

“방주, 말이 지나치지 않소? 방장이 직접 오라니요!”

방수가 노기를 끌어올리자 전신에서 묵직한 기운이 퍼졌다.

청해 역시 불쾌한 낯빛으로 말했다.

“무당 장문은 누가 오라 가라 한다 해서 움직이는 분이 아니시오.”

두둥!

무한의 전신에서도 기운이 흘러나와 방수와 청해의 기운을 압도하였다.

방수와 청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두 사람은 소림 장경각주와 무당 태청관주로 자파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으나 무한의 기운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무한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직접 와서 세운 사람은 그 대단한 소림 방장과 무당 장문이었습니다. 본 방주가 드릴 말씀은 그것뿐입니다.”

방수와 청해는 할 말이 없어 서로의 얼굴만 마주보았다.

세운 사람들이 직접 와서 허물라는 말에 반박하기 어려웠다.

옆에서 지켜보던 대장로 갈천경이 내심 통쾌해하였다.

무한의 기운이 두 사람을 압도하고, 화술로도 제압하는 걸 보고 감복하는 마음이 들었다.

과거 장로전에 와서 당당하게 장로들을 제압했던 무한이 떠올랐다.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천하방주로 손색이 없다.’

누가 있어 천하의 소림과 무당을 상대로 이리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자기들이 천하방으로 추대하고는 봉문을 이유로 발걸음을 끊다시피 한 구파일방에 대해 앙금이 있는 갈천경이다. 벌게진 얼굴로 화를 삭이는 방수와 청해를 보며 고소를 금치 못했다.

***

당가주 당전수가 찾아왔다.

“당가주가 가문을 비우고 이리 나돌아 다녀도 되는 거냐?”

“안 되지만 취임식에 제가 빠지면 되겠습니까.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는데요. 형님, 축하드립니다.”

가문의 반란을 진압하고 가주에 취임한 당전수는 안색이 무척이나 밝았다.

비록 어린 가주이지만 뒤에 독왕이 버티고 있으니 가문의 원로들도 꼼짝 못하고 있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명색이 오대세가 가주가 아무나에게 형님이라고 하면 안 되지.”

“에이, 천하방주가 아무나가 아니지요? 천하제일인 아닙니까.”

“독왕께서는 안녕하시지?”

“나 때문에 다 늙어서 고생한다고 하시면서도 가문의 일에 적극 나서고 계십니다. 지금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회합을 하기 위해 정천맹에 가 계시지요. 하지만 방주 취임식에는 꼭 참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굳이 오실 건 없는데.”

방주 취임을 중원 각파에 알리기는 했지만 취임식 자체는 그리 크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하객이 많이 몰려오고 있었다.

뜻밖의 손님도 왔다.

공동일수 광진이 공동 장문인을 대리하여 왔다. 그는 후기지수이긴 하나 장문인을 대리한다는 점에서 공동파로서는 최대한의 예우를 한 셈이다.

하객들이 몰려들며 천하방 외성이 사람들로 붐볐다.

온갖 사람들이 활보하니 검신의 전성기 시절보다 더 활기찬 모습이었다.

이윽고 방주 취임식 날이 밝았다.

십이무력대가 천하전 앞 너른 광장에 도열하였다.

용의당주 구진룡이 엄선한 일천이백 정예 무인이 뿜어내는 기세가 광장을 메웠다.

“엄청난 기세로군. 역시 천하방이야.”

“절반이 떨어져 나갔는데도 이 정도라니… 그전에는 정말 대단했겠군.”

“내가 보기에는 지금이 더 대단한데? 이전에는 무력대 숫자만 많았지 이런 기세를 보여준 적이 없었어.”

“그렇지. 그때는 일반 무력대나 별다를 게 없었지. 오늘 보니 이게 진짜 무력대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 하나같이 일류고수들이야.”

양옆 하객 역시 무인들이다. 그러니 십이무력대의 무력 수준을 평가하기 여념이 없었다.

십이무력대 옆에 다소 젊은 후기지수들로 편성된 청의단이 도열하고 선두에 악일비가 섰다.

무력대 앞 공간 좌우로는 천하방 집행기관과 장로들이 줄지어 앉았다.

그리고 정면에 천하방주의 자리가 놓였다.

두둥!

큰북이 울리고 대장로 갈천경이 앞으로 나섰다.

“대장로 갈천경이외다. 신임방주 취임식에 참석한 여러분을 환영하오.”

그가 하객들을 향해 포권을 하고 천하방 결성 취지와 이념, 그리고 현황을 소개하였다.

이어, 두둥 하고 큰북이 울리자 무한이 광장으로 들어왔다.

요란한 북소리에 사람들의 심장이 고동쳤다.

헌앙한 무한의 모습에 하객석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약관의 나이가 어려 보였으나 전신에 흘러넘치는 기운은 천하전 너른 광장을 압도하였다.

무한이 단상에 올라가 서서 천하전 광장을 메운 무력대와 하객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요란한 북소리가 멈췄다.

무한이 자세를 바로 잡고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천하방 신임방주 심무한이오.”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하늘에서 울리는 듯 분명하게 들렸다.

“천하방은 한 형제이고 나아갈 길 또한 하나뿐이오.”

그러자 십이무력대가 일제히 외쳤다.

- 협으로 의를 세우고, 의로써 세상을 구한다.

일천이백 무인의 우렁찬 목소리에 천하방 광장이 진동하였다.

이를 보는 하객들은 가슴이 진탕하고, 절로 의기가 솟아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이를 마음에 새기는 한 누구나 천하방 형제이오.”

무한이 자신의 뒤편 천하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천하전은 앞으로 닫히는 일이 없을 것이오. 천하 정도를 지키는 그 누구나 자유로이 와서 무림 대소사를 논의하기를 바라오.”

“아!”

무한의 말에는 무척이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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