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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13화 (213/250)

213화

천무관 문향전 수재 형소는 무한의 말에 담긴 의미를 바로 알았다.

정천맹의 군사가 되라는 뜻이다.

형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버지는 나를 인정하지 않아. 형씨 가문은 무가야. 그런데 내 자질이 떨어진다는 걸 안 뒤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아.”

“어쩌면 지금은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지. 네가 감숙에서 마천도와 어찌 싸웠는지 안다면 말야.”

“평범한 마천도를 상대로 싸운 건 아버지 앞에 내세울 건덕지가 못 돼.”

“형소야.”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부맹주는 네 자질을 알아. 지금의 네 성취를 제대로 안다면 그간 얼마나 노력을 해왔는지도 알겠지.”

“…….”

“지금 얼마나 강한 고수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앞으로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길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게 그 누군가를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이야. 나는 부맹주가 분명히 그런 사실을 아는 분이라 생각해.”

무한의 말에 형소가 울컥하였다.

“정천맹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야말로 무림의 축소판이나 마찬가지이지. 나는 네가 그들을 휘어잡을 수 있을 거라 믿는데, 자신 있어?”

“당연히! 내가 누군데!”

형소가 자기 가슴을 탕탕, 쳤다.

“술 한 잔 하자!”

어느새 술꾼이 된 형소다.

***

다음 날.

무한은 형소와 함께 서안 외곽 장원을 찾았다.

장원은 풍광이 수려한 산 중턱에 있었다.

높은 대문에 웅혼한 필체로 ‘신검산장(神劍山莊)’이라 쓰여 있었다.

“어때? 검신의 후예가 머물기에 딱 맞지 않아?”

형소가 으스대며 말했다.

‘신검산장.’

무한이 현판을 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마음에 든다.”

대문 가까이 가니 오산사걸이 나와 있었다.

“장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은 신검산장의 호장무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산장에 들어서니 담철조와 공곤이 서 있었고, 그 뒤로 이백 무인이 도열하고 있다가 무한을 맞았다.

담철조와 공곤이 감개무량한 얼굴로 예를 갖췄다.

“천하방주를 뵙습니다!”

두 사람은 무한의 천하방주 등극에 눈물까지 글썽였다.

“십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이리 빨리 방주의 자리에 오르시다니…….”

담철조는 서안에서 어린 무한을 데리고 천하방으로 가던 날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모두 두 분의 노고 덕분입니다.”

무한이 정중하게 치하하며 도열한 무인들을 돌아봤다.

신검대와 무적대의 기치를 든 이백 무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양 무력대의 중간에 하기주가 서 있었다.

무한이 내심 놀랐다.

자신이 서안을 떠난 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그사이 무력대를 충원하다니.

무력대 무인은 일반 무인과 다르다. 무공이 높다고 해서 무력대원이 되는 게 아니다.

자신이 칼을 맞고 죽을지언정 진을 깨뜨리지 않는 희생정신이 있어야 한다. 무인이 적과 싸우다 때로는 한 팔을 내어주고 적의 목숨을 취하듯, 자신을 죽이고 본대가 적을 격파할 때도 있다.

그러기에 무력대원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하기주가 말했다.

“천하방이 해체 수준으로 축소되며 상당수 무력대원들이 찾아왔네.”

무한이 하기주의 말을 들으며 신검대와 무적대를 돌아보다 흠칫, 놀랐다.

섬서지부 승룡대주 전경목이 보인다. 그런데 서 있는 자리가 대주 자리가 아니다.

나이든 무인이 신검일조장의 자리에서 무한을 보며 웃고 있었다.

무한이 다가가 말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낚시를 하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려고 했는데, 내 목숨 빚은 갚고 가야 고기도 마음 편히 잡을 것 같아 자원했네.”

전경목이 웃으며 말했다.

“천하의 승룡대주께서…….”

무한은 갑자기 목이 메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경목이 정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장주께서는 말을 놓으십시오. 신검일조장 전경목, 인사드립니다!”

그러면서 포권을 하였다.

무한이 마주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그러고 보니 무력대원 상당수가 이번 감숙에서 무한의 도움으로 마천의 마수에서 벗어난 자들이었다.

천하방에 귀환한 자들 가운데 소속문파가 탈퇴하거나 정천맹으로 넘어간 자들 중 상당수가 신검산장을 찾아온 것이다.

무한과 눈을 마주친 그들은 눈짓으로 알은체하였다.

그러더니 누군가 외쳤다.

- 협으로 의를 세우고, 의로써 세상을 구한다.

무한이 천하방에 입성하며 외친 말이 신검산장에 울려 퍼졌다.

내원으로 들어가자 유아와 악가박, 강문평이 기다리고 있다 반겼다.

“수련은 잘 하고 있냐?”

“당연하지요.”

강문평이 자신있게 대답하는데 하기주가 코웃음을 쳤다.

“이 녀석은 너와 정반대다. 꾀부릴 생각만 하고 있지.”

신검산장 내원 다실.

무한과 담철조와 공곤, 하기주, 형소가 앉았다.

하기주는 형소가 정천맹으로 간다는 말에 우려하였다.

“형 총관이 정천맹으로 들어간다고? 그러면 신검산장은 누가 운영한다는 건가?”

형소에게 마땅한 호칭이 없어 총관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신검산장의 책사 노릇을 하고 있다.

무한은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궁여직이라고 낭인 출신의 재사가 있습니다.”

무한은 이미 궁여직에게 신검산장으로 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아마도 조만간 하 숙부를 찾아올 겁니다. 그에게 총관을 맡기면 별 어려움 없을 겁니다.”

“알겠네.”

무한이 이어서 말했다.

“신검대와 무적대는 언제쯤 출전이 가능하겠습니까?”

신검대와 무력대는 이제 막 충원을 마치고, 대원 간의 합을 맞추는 중이다.

무력대 조련은 전임 대주들이었던 담철조와 공곤이 맡고 있다.

담철조가 말했다.

“무력대 경험이 있는 이들이니 조만간 전력을 최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예상하기에 한 달 후면 어떤 무력대도 따르지 못할 겁니다.”

“좋습니다. 한 달 후 천하방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한 달 후 바로요?”

“중원 사정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조만간 혈풍이 불 것 같습니다.”

무한이 흑천의 분열과 황제의 밀지, 그리고 정천맹의 출정을 전해주었다.

소식을 들은 모두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었다.

“손우자, 그자가 천하대란의 원흉이군요. 천기자 어른께서 어찌 사람을 잘못 보셨는지…….”

담철조가 안타깝다는 듯 말을 흘렸다.

“방주, 제게 열 명만 붙여주시지요. 가서 놈의 머리를 베어오겠습니다.”

공곤의 말에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숨은 제가 거둘 겁니다.”

무한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다.

***

황도 저자거리 객잔.

“일적진인이라는 도사는 황궁 옆 풍도관에서 머물고 있는데 평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직접 본 자가 극히 드물다더군.”

귀영이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며 들은 소문을 남궁우에게 전했다.

일적진인에 대한 정보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그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남궁우가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건넸다.

“이건 금군에 있는 친척에게 얻은 일적진인의 생김새야.”

종이에는 늙은 도사가 그려져 있었다.

종이에 그려진 일적진인의 용모를 본 귀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손우자가 아니네?”

“아마도 손우자의 조종을 받는 자겠지.”

“그럼 손우자는 어디 숨어 있는 걸까?”

“일적진인이 가끔 교외에 있는 작은 도관을 찾는다더라고.”

남궁우가 일적진인이 찾는 도관을 일러주었다.

“알았어. 바로 다녀오지.”

귀영이 사라지자 남궁우도 외출 채비를 하였다.

준수한 서생으로 분한 남궁우가 나서자 검천사위가 뒤를 따랐다.

남궁우는 간 곳은 아담한 저택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대학사께 본가에서 남궁우가 왔다고 전해주게.”

남궁우가 이르자 문지기가 안에 들어갔다가 나와 공손하게 말했다.

“안으로 모시랍니다.”

문지기를 따라 편청으로 가자 나이가 지극한 노학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분이 남궁 대학사?’

황도에 있는 남궁세가 사람들은 대부분 군에서 봉직한다. 문관으로는 대학사 남궁문유가 유일하다.

“네가 남궁지낭이라는 남궁우구나. 재주가 많다고 들었다.”

“어찌 대학사께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휘주로 낙향하려던 참이었다. 본가에는 별일 없느냐?”

남궁우가 세가의 소식을 전하고는 물었다.

“낙향하시다니요?”

남궁문유가 씁쓸하게 웃었다.

“관직에 오른다는 건 그야말로 칼 끝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물러날 때가 된 게지.”

남궁문유는 태자를 도와 정사를 거들었는데, 최근 태자가 뒤로 물러나며 그 역시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래,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실은 황궁에 머무는 일적진인이라는 도사에 대해 알고자 왔습니다.”

“풍도관주 말이냐?”

남궁문유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자는 무척이나 신비로운 자이지. 언제 어디서 왔는지 아는 이가 없다. 황궁에서도 그를 본 자가 많지 않아.”

남궁우가 사실대로 무림의 정세와 자기가 찾아온 바를 털어놓았다.

설명을 들은 남궁문유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었다.

“황상이 지병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고?”

“일종의 회광반조라고 보시면 됩니다.”

남궁문유의 노안 깊숙한 곳에서 빛이 번뜩였다.

“과연 그자가 단순한 도사가 아니었구나.”

그러면서 탄식을 하였다.

“예로부터 국운이 쇠할 때는 요사한 승려나 도사가 판을 쳤지.”

남궁문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는 황실은 물론 천하의 안녕과 관계된 일이다. 조당 대신들과 상의해야겠구나. 당분간 이 집에서 머무르거라.”

남궁우가 황도 근거지에 안착하였다.

***

방주 취임식이 다가오며 천하방에는 활기가 넘쳤다.

외성에 있던 소속문파가 철수한 자리에 성밖마을 사람들은 물론 소문을 듣고 이주를 희망하는 이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중원에 전운이 감돌며 불안해진 이들은 천하방 그늘에 의탁하고자 하였다. 그랬기에 외성은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남궁세가를 대표하여 방주 취임식에 참관하러 온 남궁명이 무한을 찾아왔다.

“방주가 바뀌니 천하방 분위기가 완전히 새로워졌더군요.”

남궁명이 예를 취하곤 말하자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천하방주가 되었어도 여전히 남궁 형의 벗입니다. 말씀을 편하게 하시죠.”

“그래도 될까? 아버지는 방주에 대한 예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말을 높이려니 거리감이 생기는 것 같네.”

남궁명도 웃으며 무한이 건네준 차를 마셨다.

“남궁세가도 출전합니까?”

정천맹 가입에 미온적이었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황제의 밀명 이후 태도를 전환하였다.

“가문의 사업이 관부하고도 밀접하니 황제의 밀명을 무시할 수는 없었네. 결국 첫째 형님이 일백 무력대를 끌고 정천맹으로 가셨지.”

“정천맹이 명실공히 무림맹으로 발돋움하였군요.”

“아버지께서는 천하방이 궐기하면 무력대를 보낼 의사가 있으시네.”

남궁명의 말에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천하방에는 이미 십이무력대가 있습니다.”

“그래도 마천도는 일만이 넘는다지 않은가. 다다익선이지.”

“일만 마천도를 다 상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

“마천주와 직속 무력대만 제거하면 그들은 자연 살던 곳으로 돌아갈 겁니다.”

“마천주를 그리 쉽게 척살할 수 없으니 하는 말 아닌가. 강호에는 그가 사실상 천하제일인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네.”

남궁명의 말대로 천마지경에 오른 마천주는 천하제일인으로 회자되고 있다.

무한은 담담히 웃기만 하였다.

두 사람이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는데 소소가 왔다.

“소림과 무당에서 축하사절단이 온다는 기별을 받았어.”

“소림?”

소림과 무당은 정마대전 이후 봉문하다시피 하였기에 천하방과도 소원했다. 그러니 축하사절단을 보내온 게 의외였다.

“소림 장경각주와 무당 태청관주가 직접 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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