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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12화 (212/250)

212화

명문가의 주군 가문과 가신 가문은 대를 이어간다. 말이 가신이지 종복의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다.

종의 아들 역시 종이다. 자존심이 강한 형소가 종으로 살아간다는 걸 받아들일 리 없다.

아버지에 이어 자신까지 복호가의 가신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검천부로 옮겨온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형소의 거취 문제가 간단치는 않겠구나.’

무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조정의 권력 암투에 대해서는 맹주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산동 복호가는 대장군가 아닙니까?”

갑자기 출신가문을 거론하자 권왕의 굵은 검미가 꿈틀하였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대화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이라 별 의심을 하지 않는 듯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나는 젊은 시절 강호를 동경하여 가문을 떠났다.”

조정 일에 대해 모른다는 의미다.

“그렇군요. 하지만 이번 황제의 밀명과 관련하여서는 가문을 통해 알아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권왕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정천맹에 가입하고 제자들을 보내기로 했다. 그 수가 일천 명! 무력대 열을 조직할 것이다. 그에 더해 중소문파와 낭인들이 속속 정천맹 휘하로 들어오고 있다. 그들이 이천 명!”

권왕이 으스대듯 말했다.

“정천맹의 이름으로 삼천 무인이 마천을 토벌할 것이다!”

일천 무력대와 이천 무인.

그 구성원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정예라면 어마어마한 전력이다.

권왕이 끝내 출사를 포기하지 않자 무한이 내심 탄식하였다.

“기왕에 그리 정하셨다니 저로서는 더 드릴 말씀이 없군요. 부디 신중하게 움직이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무한이 정중하게 예를 취하고 돌아섰다.

‘형일천을 움직여야겠어.’

간밤에 형일천에게 수모를 준 일이 약간 후회됐다.

***

황궁.

황제가 거처하는 궁궐 옆에 전각을 새로이 단장한 풍도관.

황제가 내관과 시위 몇몇만 대동하여 풍도관을 찾았다.

“황제폐하 드십니다.”

풍도관의 도동(道童) 네 명이 부리나케 나와 도열하고, 이어 붉은 도포를 입은 도사 일적(一赤)이 나와 예를 취했다.

“진인은 굳이 나와 예를 취할 필요 없다 했거늘.”

“천자는 하늘이고, 도는 하늘을 따르는 것인데 어찌 하늘을 대함에 소홀함이 있겠습니까?”

백발에 하얀 수염을 가지런히 빗고, 도관을 쓴 일적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진인의 처신이 진중함을 조정의 무지렁이들이 알아야 할 것이오.”

황제가 황궁에 도관을 짓고, 황후가 불당을 들였으나 지금 천하는 유가의 시대였다.

유가의 법도와 이치를 익힌 조정 관리들은 걸핏하면 불도(佛道)는 어리석은 민심을 혹하게 한다며 배척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곤 한다.

황제가 자리에 앉았다.

검버섯이 자글자글하였던 피부에 윤기가 돌고, 듬성듬성 몇 가닥 남지 않았던 백발 밑에 새로운 머리카락이 나고 있다.

황제는 오랜 지병을 떨치고 회춘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짐이 진인을 만난 것은 하늘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오.”

황제는 매일 하던 치사를 다시 한 번 하였다.

일적진인이 손짓을 하자 도동이 쟁반에 들고 왔다. 쟁반에는 하얀 약병이 놓여 있었다.

황제가 약병을 보고 흡족해하며 직접 들어 마개를 열고 냄새를 맡았다.

“이 장생단(長生丹)은 언제 맡아도 향기롭구려.”

그러고는 안에 있는 환약을 입에 넣었다.

옆에 섰던 내관이 미리 준비해온 물을 마신 후 황제가 잠시 운기조식을 하였다. 이 역시 일적진인이 알려준 양생호흡법이었다.

잠시 후 눈을 뜬 황제의 눈빛에 정기가 충만하였다.

“장생단을 만드는 약재는 충분하오?”

사흘에 한 번씩 장생단을 복용하는 황제는 혹시나 약재가 떨어질까 우려하였다.

일적진인이 가볍게 탄식을 하였다.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면 어찌 하늘의 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약재가 떨어져 갑니다. 하지만 지금껏 복용하신 것만으로도 백세를 충분히 넘기실 겁니다.”

“아니, 백세라면 내 수명이 삼십년도 남지 않았다는 것 아니오?”

황제가 굳은 얼굴로 정색을 하고 말했다.

“짐이 평생 지병을 앓으며 제대로 삶다운 삶을 누려보지 못했소. 이제 진인을 만나 이리 강건하게 살아가는 기쁨을 알았는데 고작 삼십 년은 짐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오.”

그러면서 일어나 일적진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진인은 자금 걱정하지 말고 장생단 제조에 전념하시오.”

황제의 늙은 얼굴에는 삶에 대한 집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일적진인은 가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황제가 가고 난 뒤 일적진인은 도동과 함께 풍도관을 나섰다.

황제가 끔찍이 모시는 진인이니 황궁 시위와 무사들이 엄중히 호위하였다.

일적진인은 황도에서 약간 떨어진 도관을 찾았다. 황궁에 들어온 뒤 가끔 찾는 도관이기에 황궁 시위와 무사들도 익숙한 길이었다.

“도우를 만나고 올 터이니 여기서 기다리게.”

일적진인은 시위대장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곤 도관으로 들어갔다.

도관 뒤 아담한 목옥으로 들어선 일적진인은 서탁을 앞에 두고 뭔가를 읽고 있는 손우자 앞에 이르러 공손히 예를 취했다.

손우자는 단정한 유생 차림을 하고 있었다.

“장생단이 다 떨어졌습니다.”

앙다문 손우자의 입꼬리가 지그시 올라갔다. 그러고는 서탁 서랍에서 약병을 꺼냈다.

하나는 하얀 약병이고 다른 하나는 누런빛을 띠고 있었다.

손우자가 하얀 약병을 내밀며 말했다.

“마지막 서른 알이오. 이후로는 약효가 듣지 않을 터이니 황제는 반드시 급사하게 되어 있소. 그러니 알아서 황궁을 빠져나와야 할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그간 적염 도장께서 수고가 많으셨소. 천하가 안정되면 후히 보답하겠소.”

손우자가 말했다.

일적진인은 천하방에서 고성후에게 붙여주었던 좌도사 적염이었다.

손우자가 누런빛을 띤 약병을 내밀었다.

이를 받는 적염의 손이 약간 떨렸다.

만독곡의 후인 손우자의 약은 실로 신통하여 일개 술사였던 자신을 하늘과 소통하는 신도(神道)의 경지로 이끌어주었다.

하지만 황제가 복용한 장생단처럼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제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일적진인이 약을 받아가고 난 뒤, 다시 손님이 찾아왔다.

청수한 얼굴의 중년 문사는 무척 정중하게 손우자를 대했다.

“오 선생을 뵙습니다.”

중년 문사 유고는 육 황자의 글사부로, 손우자를 유학에 정통하면서도 경전에 얽매이지 않는 유학자로 소개받았다.

손우자와 몇 차례 세상의 이치와 천하를 경영하는 법도를 논한 후 그를 육 황자에게 천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신은 한낱 글사부일 뿐이지만 오경이라는 유학자는 천하를 품을 인재이고, 어린 육황자를 지켜줄 만한 사람이라 여겼다.

그간 오경의 인품과 사람됨을 지켜보았는데 최근 황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바로 영입하고자 찾아왔다.

유고가 손우자에게 말했다.

“오 선생의 학식과 지략을 이 세상을 위해 써볼 생각이 없습니까?”

“…….”

손우자가 물끄러미 유고를 보았다.

“저를 조정에 천거하실 생각입니까? 과시를 통하지 않는 한 중책을 맡을 수 없지요. 한직을 맡아 괜한 수고를 하느니 학문에 전념하고자 합니다.”

“큰 뜻을 품은 분인 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이 뒤집어지면 새로운 물이 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 대계를 위해 지금부터 준비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으실 겁니다.”

유고의 말에 손우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상께서 건강을 되찾으시고 국사에 전념하고 계십니다. 그간 태자가 전횡하였던 일이 속속 드러나고 있어 폐위까지 거론되는 실정입니다.”

“…….”

유고의 말은 손우자가 이미 암시한 내용들이었다.

“사황자는 성정이 거칠어 조정 관료들이 두려워합니다. 그러면 대통을 이어받을 분이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요.”

“육황자께서 이제 성인이 되었지요.”

손우자의 말에 유고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장 보위를 물려받아도 손색없는 나이이지요.”

“지금 오신 것은 저더러 육황자께 의탁하라는 말을 하시기 위함입니까?”

“의탁이 아니라 육황자를 도와 천하를 평안케 하는 데 함께 하고자 모시려 합니다.”

손우자가 진중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유고가 결코 경솔한 사람은 아니다. 이미 이런 날을 염두에 두고 천하방 총군사 시절부터 포석을 깔아두었다. 유고는 손우자의 안배에 따라 이 자리에 와 있는 것뿐이다.

손우자가 짐짓 정색을 하며 말했다.

“사실 그간 유 형과 토론을 하며 잃었던 웅심이 살아나는 걸 느꼈습니다. 육황자께서 받아주신다면 지닌 바 재주를 다해 모시겠습니다.”

유고가 밝은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갔다.

손우자가 서탁 서랍에서 하얀 가루약을 꺼내 들이켰다.

정신이 맑아지고 생각이 요동쳤다.

“심무한, 이번 수는 당할 수 없을 것이다. 천하가 뒤엎어지는데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

***

정천맹을 나온 무한은 서안으로 향했다.

옛집에 들어서자 하인들이 맞아주었다.

형소는 서안 외곽 장원으로 옮기며 옛집을 관리하는 하인을 서너 명 두었다.

그날 저녁.

형소가 옛집으로 찾아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방주 취임식을 앞두고 분주할 텐데?”

“정천맹을 다녀왔다. 부맹주를 만났어.”

아버지를 만났다는 말에 형소의 얼굴이 굳었다.

“너를 정천맹으로 보내라더라.”

“그래서 뭐라고 했어?”

“네 거취는 네가 알아서 할 거라고 했지.”

형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나는 정천맹으로 갈 생각이 없어.”

무한이 물끄러미 형소를 보다 물었다.

“권왕과 부맹주는 의형제 사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이상의 인연도 있나?”

“…….”

“불편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

“아니. 네가 천하방주가 된 이상 정천맹과의 대립은 피할 수가 없지. 그러면 너도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형소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권왕은 산동 복호가의 서자야. 그러니 집안을 대표하여 중책을 맡기 어려웠지. 그래서 젊은 날 집을 떠나 강호로 나왔다고 들었어.”

‘역시 그랬군.’

“당시 복호 가주는 집안을 떠나는 자식에게 두 명의 가신을 붙여주었어. 한 사람은 정마대전 당시 권왕을 호위하다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이 아버지야. 나는 가신 집안 출신이지.”

“세습 되나?”

“대장군가의 가신은 대대로 세습되어 왔지. 하지만 권왕은 이미 집안을 떠나 강호 야인이 되었어. 세습을 강요할 권리가 없지. 아버지는 자신의 직분을 다하겠지만 나는 이어받을 생각이 없어.”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제의 밀명과 정천맹의 상황을 말해주었다.

형소가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권왕은 무척 권위적인 자야. 분명 전면에 나서고 싶어 할 거야.”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셈이지. 손우자가 정천맹과 무림을 황권 다툼의 불쏘시개로 삼으려는 거야.”

형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정천맹이 마천을 몰아낸다 해도 아버지 형일천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끝내 선을 그었다.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거야.”

무한이 말했다.

“정천맹을 움직이는 건 권왕이 아니라 부맹주야. 그에게 제대로 된 군사가 필요하긴 해.”

무한이 형소를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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