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권왕의 전각은 봉우리 중턱에 있었다.
호수를 바라보는 쪽이 아니라 맞은편 봉우리를 보고 있는 형국으로, 이 역시 자신을 감추고자 하는 권왕의 의도로 읽혔다.
권왕은 전각 뒤 널따란 연무장에 있었다.
“이리 오거라.”
권왕은 수박만 한 쇠뭉치를 몸 위로 굴리는 중이었다.
예전 천하방에서 만났을 때도 권왕이 연무장에서 수련 중이었음이 떠올랐다.
근육을 단련하는 여러 가지 기구가 눈에 들어왔다.
‘매일 저 많은 기구를 이용한다는 말인가?’
한 번씩만 이용해도 하루가 다 갈 정도로 다양하고 많았다.
어쩌면 권왕이 자신을 감추려는 게 아니라 사람들 앞에 나설 시간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웃통을 벗은 권왕은 칠순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잔근육이 발달되어 있었다. 울끈불끈 솟은 잔근육은 마치 거대한 뱀이 몸을 휘휘 감은 듯 보였다.
‘권왕의 수련은 경천심결과 상통하는 면이 있구나.’
경천심결은 근육에 내력을 배양하여 단전으로 유도하는 방식이다. 권왕의 근육 역시 비슷한 작용을 하는 듯했다.
“나를 찾아올 줄은 예상 못 했다. 그때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 것 같은데?”
권왕이 쇠뭉치를 굴리며 말했다.
“비록 길은 다르나 권왕께서는 제게 의종조부가 됩니다. 그런 분이 죽을 길로 들어가니 어찌 찾아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뭐라?”
권왕의 고리눈이 험악해졌다.
“대파와 세가를 규합하여 마천과 전쟁을 벌일 작정 아니십니까?”
“그럴 생각이다. 그게 내가 죽을 길이라는 것이냐?”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권왕이 호통을 쳤다.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들어? 본 맹주는 네 아비가 강보에 싸여 있을 때 이미 천하를 주유해왔다.”
권왕은 진심으로 화가 났는지 쇳덩이를 쿵, 하고 내려놓았다. 더 가지고 있다간 무한에게 던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게 아니라 천하방주로서 알려드리는 겁니다. 천하방 군사부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쌓여 있는지 잘 아시겠지요.”
“……?”
“이번에 군사부 정보를 정리하면서 이런 문서를 발견했습니다.”
무한이 품에서 문서를 하나 꺼냈다.
“그게 뭔가?”
“황제의 지병에 관한 조사 내용입니다.”
“황제?”
내심 짚이는 바가 있는지 권왕의 미간이 꿈틀하였다. 그는 무한이 내민 문서를 받아 읽었다.
“사실 황제는 진즉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문서를 꺼냈다.
“이건 황제의 병을 지연시키는 처방입니다. 사실 약이 아니라 독이지요.”
“이게 다 나와 무슨 상관이라는 말이냐?”
“황제의 명에 따라 마천과 일전을 벌일 생각 아닙니까?”
“…….”
“황제는 지금 마지막 촛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회광반조의 시기이지요.”
“그래서? 황제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 마천은 어차피 중원 정도의 적이다. 누가 나서서라도 척결해야 할 대상이지.”
“마천은 이미 교리를 버리고 천산파라는 문파로 둔갑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전쟁을 벌인다면 중원 민심이 따르지 않을 겁니다.”
“네가 정말 마천의 무서움을 모르는구나. 그들이 얼마나 간교한지는 직접 겪어본 자만이 알 수 있다.”
“이건 마천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황제의 배후에 있는 손우자와의 싸움이지요.”
“뭐라고? 손우자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손우자가 천하방을 떠나 행적이 묘연하다는 건 권왕도 안다.
무한이 문서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정보들을 취합한 자가 손우자입니다. 황제의 뒤에는 손우자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무한은 추경무가 다녀간 뒤 군사부가 보유한 황도 정보를 확인하며, 평소 손우자가 주로 취합했던 내용들을 알아봤다.
그리고 손우자가 무슨 의도를 지니고 있는지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흥! 그저 추측일 뿐이잖으냐?”
“어찌하여 회광반조로 겨우 정신을 차린 황제가 지금 마천 토벌령을 내렸을까요?”
“…….”
권왕은 무한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무한이 탄식하며 말했다.
“정천맹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규합하여 천산파를 치면 중원에 일대 혼란이 올 겁니다. 그러면 황제는 군을 일으키겠지요.”
“…….”
“황제의 군은 중원 정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황권 쟁탈을 위해 쓰일 겁니다.”
“뭐라? 손우자가 모반이라도 일으킨다는 말이냐? 듣다 듣다 이런 기가 막힌 말을 다 듣다니.”
권왕이 어이없어 하였다.
“너는 나를 바보천치로 아느냐? 아니면 네가 돌은 것이냐? 손우자가 역성 천자의 자리를 노린다고?”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직접 보위에 오르지 않아도 되지요. 손우자는 늘 어둠 속에 숨은 채 남을 내세워 원하는 바를 도모해 왔습니다. 아마도 혼군을 세워 조종하기를 더 원할 겁니다.”
“흥! 조정에 대관과 공신, 대장군이 한둘이 아닌데 어찌 일개 야인이 암중권력을 쥘 수 있다는 말이냐?”
무한이 다시 품에서 문서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이건 황실의 태자와 황자들에 관한 조사보고서입니다. 손우자가 이를 유난히 많이 챙겼다고 하더군요.”
권왕이 받아서 들춰 보았다.
“유독 많이 본 장이 사황자와 육황자에 대한 내용들이더군요.”
권왕이 보기에도 그 부분이 많이 닳았다.
“황실의 정보는 아주 민감해서 빼내기 어렵지요. 게다가 이는 조정 권력에 관심 있는 자에게나 유용한데, 천하방 총군사 손우자가 왜 그리 관심을 가졌을까요?”
“…….”
“황제는 젊어서부터 지병을 앓았기에 후사가 많지 않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 삼황자 역시 지병을 물려받아 운신이 불편합니다. 오황자는 어려서 죽었지요.”
“네 말은 손우자가 이들 중 한 사람을 택해 허수아비 황제로 삼을 생각이란 말이냐?”
“맞습니다. 태자는 어려서부터 제왕의 수업을 받고, 황제 대신 정사를 돌봤기에 아쉬울 게 없습니다. 손우자가 파고들 여지가 없다는 거지요. 그런데 사황자는 포악하고 야망이 큰 자라고 합니다.”
“그럼 군을 일으킨 틈을 타서 사황자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 역시 장기판의 팻감일 뿐입니다. 군을 일으키면 사황자가 군권을 쥐고 나설 가능성이 크지요. 황제의 친정으로 세력이 약해진 태자와 군권을 쥔 사황자가 각축을 벌일 겁니다.”
“…….”
“손우자의 술수라면 그 와중에 둘 다 실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황자 역시 손우자가 뜻대로 조종하기 어려운 인물이니까요.”
권왕이 눈길이 육황자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갔다.
“그렇습니다. 태자와 사황자가 양패구상하면 아직 어린 육황자가 대통을 이어받을 것이고, 손우자는 육황자의 뒤에 있을 겁니다.”
권왕이 무한을 보았다.
‘천하방 군사부에 있는 정보만으로 손우자의 행보를 유추해냈다고?’
그렇다면 무한이야말로 천기자 못지않은 책사임에 틀림없다. 절대지경의 무공에 지략까지 이리 뛰어나다니.
권왕은 내심 한탄하였다.
‘결국 심가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인가?’
그는 권의 명가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무공에 대해 자부해왔다. 하지만 검신 심양조에게 패해 신분패를 바치고, 결국 천하사패 말석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만으로도 대단한 위치였으나 그는 내심 승복하지 않았다. 자신이 검신이나 도왕보다 열 살이 적다는 걸 빌미로 언젠가는 그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끊임없는 수련으로 자신을 단련해왔다.
그러나 일전에 도왕과의 비무에서 패하고, 크게 낙심하여 천하방을 떠났다. 도왕의 그늘 하에서는 결코 천하방주의 자리에 오를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를 부추긴 자가 손우자였다.
손우자는 천하방과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사이가 소원하다는 걸 지적하면서 무림맹을 결성하는 방안을 그에게 흘렸고, 공손승까지 지원하였다.
- 중원의 적은 마천과 흑천! 천하방만으로는 이들을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아우르는 무림맹을 창설하여 어느 한쪽을 막아야 합니다.
손우자의 조언은 그야말로 적절했고, 그의 웅심을 자극하였다.
천하방에서 수장에 오르지 못할 바에야 내 손으로 오르리라.
권왕은 분연히 천하방을 떠나 군산으로 왔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설득하는 중이다.
대파와 세가를 설득하는 일은 예상처럼 쉽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황제의 밀명이 떨어지며 대파와 세가가 적극적으로 정천맹으로 합류하고자 하는 중이다.
그 역시 어리석은 자가 아니기에 황제의 밀명에 숨은 의도가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관무불침의 오랜 역사를 알기에 그리 깊게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무한의 조리 있는 몇 마디에 권왕은 자신이 손우자의 손에 놀아났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강을 건넜다. 정천맹은 무림맹이 될 것이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회합이 머지않았다. 그들이 정천맹으로 들어오면 자신은 명실공히 무림맹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손우자는 그때 가서 처리해도 늦지 않다. 다만 이놈의 의중이 궁금하군. 무슨 의도로 내게 이런 상황을 밝히는 걸까?’
무한은 권왕이 생각을 정리하도록 여유를 주었다. 잠시 후, 멀리 맞은편 봉우리를 보며 무한이 말했다.
“군산은침이 유명하다는데 맛을 볼 수 있을지요.”
“공손승을 죽인 너를 맹 사람들은 적으로 여기고 있다. 본 맹주가 네게 책임을 묻지 않고 오히려 차를 낸다면 뭐라 하겠느냐?”
무한은 권왕의 한마디에서 그의 성격을 확실히 파악하였다.
그는 명망에 집착하는 자였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수가 짧았다.
권왕은 공손승의 죽음에 거짓으로라도 분노하지 않았다. 마치 쓰던 장기말이 적에게 잡혀 떨어진 듯 여겼다.
이건 대국을 들여다보는 대범함이 아니다. 그는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껏 명성을 유지하는 것도 형일천이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서 보좌해왔기 때문일 수 있어.’
이건 의외의 발견이었다.
동시에 권왕과 형일천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권왕과 패천부는 늘 은밀하고 신비하게 처신해왔기에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다.
무한 역시 아는 바가 별로 없었으나 천하사패 결성 당시의 상황은 조금 안다.
천하사패가 결성되던 시기, 형일천의 무공은 결코 낮지 않았다. 어쩌면 천하오패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검신의 제의를 거절하고 권왕의 의제로 남아 패천부에 의탁했다.
“형 부맹주가 간밤에 찾아왔더군요. 형소의 귀환을 요구했습니다.”
“아비로서 아들을 지척에 두고 싶은 건 당연하지. 부자지간의 정을 생각한다면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권왕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의제의 아들이니 의조카가 되는 셈이다. 권왕은 혼인을 하지 않았기에 자식이 없다. 그러니 의제의 아들을 양자로 여길 법도 한데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지금 그가 취하는 태도는 지인의 아들을 언급하는 정도였다.
‘세간에는 두 사람이 의형제로 알려져 있는데, 어쩌면 상하관계일 수도 있겠군.’
권왕의 출신은 산동 복호가. 하북의 팽가와 함께 권의 명가로 불린다.
산동 복호가는 대대로 군문에 진출하여 대장군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 여럿이다. 그런 배경을 감안하면 가신이 딸린 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동시에 무한은 형소가 떠올랐다.
‘형소가 검천부에 의탁한 이유가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