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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07화 (207/250)

207화

“손우자가 어르신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무한은 그동안 속으로 궁금해 했던 질문을 던졌다.

손우자는 천기자에게 망우충을 쓰고도, 두려워서 기천부를 찾지 않았다. 이어, 천기자가 깨어나자 자취를 감췄다.

천기자에게 손우자를 금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는 손우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천기자는 대답하고 싶지 않은지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화제를 돌렸다.

“황제가 천하에 동원령을 내린 셈이군. 자네는 어찌할 텐가?”

“황제의 밀명을 무시할 수 없는 곳들은 어쩔 수 없이 나서는 시늉이라도 하겠지요.”

소림이나 무당은 황실로부터 넓은 땅과 자원을 지원받고 있으니 모른 척 할 수 없을 것이다.

황제는 천산파를 마교의 후신으로 규정했다.

사실, 마천이 천산파로 개명을 했다 하더라고 과거 마교의 후신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유불도(儒佛道) 삼교는 각자 교리가 다르지만 서로의 존재를 용인하고 공존한다.

그러나 유독 마교만큼은 단합하여 배척해왔다.

“소림과 무당은 직접 나서기보다는 정천맹을 전면에 내세울 공산이 큽니다.”

무한이 군사부에서 본 무림 동향과 남궁우에게 들은 정천맹 소식을 종합하여 내린 판단이다.

지난날 정마대전 당시 구파일방은 직접 전쟁에 뛰어들었다가 봉문을 하는 수준의 타격을 입었다.

고고하기로 소문난 구파일방이 검신 심양조에게 천하제일인이라는 명칭과 함께 천하방을 추대한 것은 향후 비슷한 일이 있을 경우 방패로 내세우기 위함이기도 했다.

정천맹은 그간 구파일방의 소극적인 참여로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황제의 밀명을 계기로 소림과 무당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권왕이 의도하는 과거 무림맹의 지위에 올라설 수도 있다.

“권왕으로서는 정천맹을 결성하고 첫 행보이니만큼 세를 과시하려 하겠지요.”

천기자가 조용히 무한의 분석을 들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마천 역시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니, 결국 정천맹과 마천이 전면전에 들어갈 겁니다.”

“제대로 봤네. 이번 황제의 밀지는 권왕의 성격과 구파일방의 성향을 파악하여 쓴 수가 맞네.”

천기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만 천하방에 보낸 밀지가 별 성과가 없으리라는 건 예상치 못했겠군.”

‘역시 천기자로군. 내가 어찌할지 알고 있어.’

무한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 지병의 끝은 회춘이 아니지요. 억지로 되돌린 세월은 순식간에 스러지고 말 겁니다.”

천기자는 말없이 차만 마셨다.

***

무한은 그날 이후 추경무를 만나지 않았다.

추경무는 외빈의 숙소에서 정중한 대접을 받았지만, 조정 고관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추경무는 천하방의 홀대에 연일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갖은 트집을 잡았다.

그러나 무한이 끝내 자신을 부르지 않자 화를 내고 천하방을 떠났다.

“저렇게 보내도 될까? 분명 황제에게 천하방을 불손한 의도를 지닌 무리라고 모함할 거야.”

남궁우가 떠나는 추경무를 보고 우려했지만 무한은 웃기만 하였다.

마침, 귀영과 검천사위가 돌아왔다.

귀영은 무한을 보자 감격하여 부둥켜안으려 하였다. 무한이 손을 내밀어 막자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생사의 순간은 같이 나눠도 영광의 순간은 각자 누리는 거로군요.”

만독곡에서 생사지경에 처했을 때 부둥켜안아 살려냈는데, 천하방주가 되더니 밀어내다니.

귀영은 도천부가 몰락하고, 귀신같은 손우자마저 사라졌으니 마음껏 활개 칠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천하방주가 외로운 고아였던 시절부터 오른팔 노릇을 했다고.’

그 공로는 천하방의 요직으로 보상받아 마땅하지.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귀 호위가 맡아줘야 할 중책이 있습니다.”

역시, 방주는 은원이 분명해.

귀영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검천사위와 함께 남궁지낭을 호위하여 황도에 다녀오세요.”

“예에?”

남궁우 호위가 무슨 중책이야…….

내심 한 자리 차지할 생각이었던 귀영이 펄쩍 뛰었다.

만일 정체 모를 도사가 손우자라면, 천하방이 황도에 깔아놓은 밀정은 이미 뿌리가 뽑혔거나 회유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보낼 거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겠지.’

남궁우는 손우자의 이목을 끄는 패이고, 실제로는 귀영의 역할이 중요하다.

“저,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만…….”

“진작 출발했어야 했는데 믿고 맡길 사람이 없어 귀 호위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

번지르르한 공치사임이 분명한데 무한이 정중하게 말하니 진심으로 들렸다.

귀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황도에는 고수가 많다더군요. 더욱이 최근 권력이 급변하여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임무지요. 싫다면 무흔 대형을 보내지요.”

사실, 무흔은 흑선수사 일행과 함께 하남으로 가는 중이다.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가 없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귀영이 주위를 재빨리 돌아보곤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 일이라면 제가 가야지요. 무흔 대형은 흑천 출신인데, 황도에 가면 바로 지명수배 대상이 될 겁니다.”

내가 오른팔이라고! 무흔은 그저 은신을 빙자하여 잠만 자는 암중호위일 뿐이지.

귀영은 충직한 오른팔을 자처하며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 다녀오면 저도 내근직을 맡고 싶군요. 나이가 드니 강호를 떠도는 일도 점점 버거워지고…… 콜록, 몸이 예전 같지 않네요.”

“좋은 자리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할 일은 가면서 남궁지낭이 알려줄 겁니다.”

무한의 말에 귀영이 벌떡 일어났다.

까짓 거. 빨리 해치우자. 좋은 자리가 기다리고 있다잖아.

귀영이 눈을 부릅떴다.

“남궁우, 어딨습니까?”

***

천하방 수뇌부와 주요 기관이 대대적으로 바뀌면서 말이 많았다.

높은 자리, 요직에 있는 자들일수록 불만을 터뜨렸다.

다행이라면 그런 이들이 소수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새로운 바람을 환영하였다.

변화의 내용까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침체했던 방의 분위기가 일신되며 활기가 살아났다.

무력대를 조련하고 운용하는 용의당 당주 구진룡이 무한을 찾아왔다.

마흔이 약간 넘은 구진룡은 천하방 어느 문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인으로 무한이 직접 임명한 자였다.

그 때문에 용의당 기존 간부들이 반발하였고, 무한은 모두 내보냈다.

구진룡은 자신이 가져온 문서를 건넸다.

“말씀하신 무력대 개편안입니다.”

무한은 구진룡에게 용의당을 맡기며 무력대를 개편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다.

천하방은 원래 내외성 모두 합쳐 십이무력대를 운용해왔다.

그러나 천하사패를 비롯해 힘 있는 문파들이 자체 무력대를 운용하며 본방 무력대를 능가한 지 오래였다.

천하사패가 해체되고 절반 가까운 문파가 천하방을 떠나며 본방 무력대도 근간이 흔들렸다.

“소속문파들의 자체 무력대를 모두 해체하고, 십이무력대 체제를 강화하는 안입니다.”

천하방에는 본방 십이무력대를 제외하고도 소속문파나 군사부를 비롯한 집행기관 등에서 운용하는 크고 작은 무력대가 서른이 넘는다.

구진룡의 개편안은 이를 해체하여 정예만으로 본방 무력대를 재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자체 무력대를 해체하라고 하면 반발이 크겠군요.”

“소속문파들이 자체 무력대를 갖추면서 본방 무력대가 약화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소속문파의 무력대가 아주 뛰어난 것도 아니지요. 오합지졸만 늘어난 셈입니다.”

구진룡이 냉정하게 현 천하방 무력대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이대로 가면 마천이나 흑천의 무력대보다 수준이 떨어지고 말 겁니다.”

무력대는 정마대전 당시 천기자가 처음 창설했다.

천기자는 마천의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군대처럼 상명하복의 체계와 조직을 갖춘 무력대를 길렀다.

이후, 마천이나 흑천 역시 무력대를 갖췄고, 대파나 세가도 비슷한 조직을 갖췄다.

하지만 천하방 무력대에 비해 손색이 있다. 편제는 모방할 수 있지만 전술 운용과 합격술, 쇠뇌와 암기 등 보조수단의 운용 등에서 천하방 무력대는 최고의 전력이라 자부해왔다.

무인들 간의 싸움을 전쟁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 바로 천하방 무력대였다.

그 이전에도 수십, 수백 명이 집단전을 벌인 경우가 없지 않았으나 무력대와 같이 살상만을 목적으로 양성한 집단 간의 전투는 정마대전 이후에 본격화 되었다.

잘 훈련된 일백 무력대는 열 배가 넘는 일천 군사 정도의 전력이라고 알려져 있다.

실제 천하방 군사부나 용의당의 평가는 그보다 훨씬 높아 일당 백 수준이라 자부한다. 무인 자체가 일반 군사보다 뛰어난 데다, 쇠뇌와 진법 등을 이용하기에 일만 군사와 맞먹는다고 보고 있다.

사실, 손우자가 마천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무력대 칠백 명을 보낸다고 했을 때 승전은 장담 못 해도 방어선은 구축하리라 모두 기대하였다.

천하방 칠백 무력대는 칠만 군사에 해당된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

무한은 살상집단인 무력대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다. 무력대를 해산하고 싶으나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이미 무력대 간의 싸움이 무림에 정착되었다.

마천이나 흑천은 물론 대파와 세가는 물론 중견문파까지도 무력대를 편제하여 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천하방만 무장해제를 할 수는 없었다.

“언제쯤 개편이 완료되겠습니까?”

“이미 대주와 조장 급은 내정을 마쳤습니다. 방주 취임 전에 완료하겠습니다.”

구진룡이 의욕을 보였다.

구진룡이 가고난 뒤 무한은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봤다.

검각 이층에 있는 무한의 집무실 난간에 서면 검천전과 멀리 뒤편으로 천하전이 보인다. 세 건물이 대각선으로 이어진 구조다.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으나 천하방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뭘 그리 생각해?”

소소가 들어서며 물었다.

다시 군사부에서 일하기로 한 소소가 첩지를 한 보따리 가져왔다.

“최근 정천맹과 관련하여 들어온 정보야.”

무한이 정천맹 관련 정보를 직접 검토하겠다고 요청한 것이다.

“군사부 제일부사가 직접 가져올 것까지는 없었는데.”

“오는 길에 가져왔지.”

소소가 첩지를 정리하여 놓으며 말했다.

“정천맹주를 만날 생각이지?”

“…….”

“정천맹에서 형소를 불러들였대.”

소소가 첩지 하나를 펼치며 말했다.

형소는 천무관 문향전 갑상 출신의 수재다. 만재당에서 수많은 업무를 처리하며 능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정천맹 부맹주의 자리에 오른 형일천이 형소를 불러들였다.

“형소가 말은 안 해도 마음은 편치 않을 거야.”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소가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무공 자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삼재검을 얼마나 수련했는지 알고 있다.

“형소의 뜻이 중요해. 본인이 결정을 해야지.”

“물론 그렇지. 하지만 쉽게 마음을 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친구로서 할 일이야.”

“……”

무한이 소소를 가만 보았다.

천무관 시절 냉정하기만 했던 소소가 맞나?

“뭘 그렇게 봐.”

소소가 첩지를 내밀었다.

“이게 가장 최근에 들어온 거야. 구파일방의 수뇌부가 비밀리에 모인다는데, 워낙 큰 사안이라 지금 교차검증 하고 있는 중이야.”

무한이 첩지를 펼쳤다.

정천맹주 권왕이 그간 지지부진한 면모를 보여 온 구파일방의 수뇌부를 직접 초빙하였다는 내용이다.

무한이 일자와 장소를 보다가 물었다.

“이 정보를 보낸 자가 누구지?”

“정보원 신원은 극비야. 군사부에 가야만 알 수 있어.”

“정천맹으로 갈 거야. 이 정보원에게 연락해서 만날 수 있도록 해줘. 이 자가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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