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추 대인이셨군요. 앉으시지요.”
정중하게 예를 취하라는 중년 사내의 눈빛을 무시하고, 무한이 손님 자리를 가리키곤 주인 자리에 앉았다.
추경무가 불쾌한 낯빛으로 무한을 보더니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금의위 소영반께서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오셨는지요?”
“주위를 물리게. 중요한 일이네.”
무한이 남궁우만 남기고 사람들을 내보냈다.
“이 자도 내보내게.”
“이 사람은 천하방 군사입니다. 무슨 일이든 상의하니 어차피 알게 될 겁니다.”
무한의 말에 추경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황상의 밀지를 받들어 왔네.”
한마디 하고는 입을 닫았다.
그러자 옆에 있는 시위가 속삭였다.
“밀지를 받으시지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받으라는 눈치였다.
무한은 모른 척 무시하고 추경무를 보며 말했다.
“밀지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추경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소매에서 서찰을 꺼내 건넸다.
정말 황제의 옥새가 찍힌 교지로, 마교의 후신 천산파가 중원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천하방이 나서서 소탕하라는 내용이었다.
무한은 어리둥절했다.
황제가 무림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한 적이 있었던가?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남궁우에게 밀지를 건네며 말했다.
“네 말이 맞나보다.”
그러고는 중년 사내를 향해 말했다.
“천하방은 강호 정도를 지키는 방파로 당연히 사마외도의 무리를 제압할 것입니다. 굳이 황상께서 밀지를 보내신 이유가 있습니까?”
“황상께서는 천하를 살피고 계시지. 근자에 정도가 분열하고 흑도와 사마외도의 무리들이 준동한다는 말을 듣고 심려가 크시다네. 아무래도 새로운 천하방주가 아직 어리고 미숙하니 조정에서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시네.”
사람을 앞에 놓고 어리고 미숙하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었으나 무한은 표정 하나 변치 않고 듣기만 했다.
“필요하다면 금군의 정예를 지원하실 의중도 비치셨네.”
추경무가 황상의 은덕에 대해 늘어놓았다.
무한은 가만 듣다가 말했다.
“먼 길 오셨으니 오늘은 일단 쉬시지요. 저녁에 다시 뵙기로 하지요.”
무한의 축객령에 추경무가 다시 불쾌한 낯빛을 지었다. 그러나 뭐라 더 말하지 못하고 일어나 휭, 하고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남궁우가 말했다.
“금의위 소영반은 무관이 아니야. 문관으로 주로 행정 처리를 하지. 금의위 내부 인사권을 지니고 있으니 평소 얼마나 거들먹거렸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겠어.”
남궁세가의 방계 중에는 조정으로 나간 이들이 적잖다. 그래서 황실과 조정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여느 대파나 세가보다 아는 바가 많았다.
“이상해. 황제는 늙고 병들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던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무림의 일에 개입하려는 거지?”
남궁우도 갑작스런 황제의 밀지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 궁금했다.
무한이 곰곰 생각했다.
늙은 황제가 세상을 염려하여 강호의 풍파를 정리하려 한다는 건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단순한 일이 아니야. 밀지로 끝날 것 같지 않아.”
무한의 말에 남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같은 이는 손짓 하나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대. 이 밀지는 구실일 뿐이야.”
“동 대학사를 만나야겠어.”
천하방에서 조정이 어찌 돌아가는지 그나마 아는 이는 천무관주 동중용이다.
무한은 곧바로 천무관을 찾아갔다.
동중용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차를 내주며 말했다.
“조정에서 사람이 왔더군.”
“벌써 소식을 들으셨군요.”
“오래 전 추경무가 과거에 합격했을 때 감독관을 했었지. 그 인연으로 나를 찾아왔었네. 차 한 잔 내주고 보냈지.”
동중용이 대수롭지 않은 인연처럼 말했다.
“관료사회의 탁함은 이루 말할 수 없지. 추경무가 막 급제했을 때는 언행이 정대했는데 이제 거만한 관리가 되었더군.”
“황제의 밀지를 가져왔더군요.”
무한이 내심 씁쓸한 웃음을 짓곤 밀지의 내용을 말했다. 사실 별반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다.
동중용이 가만 듣고는 말했다.
“이건 첫걸음을 뗀 것뿐이네. 황제가 강호를 평정하겠다는 뜻을 밝힌 거지.”
동중용의 예측도 남궁우와 비슷했다.
“황제는 나이가 많고 지병이 깊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강호에 개입하려는 걸까요?”
“노부가 조정을 떠난 지 오래이니 자세한 속사정을 알 수는 없네. 다만 얼마 전 황도의 친우로부터 받은 서신이 생각나는군.”
동중용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근자에 다시 황제가 정회를 주재한다고 했네. 그러면서 조만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했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자네 말대로 황제는 지병이 깊어 그동안 태자가 대리하여 정사를 돌봤지.”
“그랬군요.”
“그런데 황제의 병이 씻은 듯 낫고, 오히려 강건해져서 직접 정사를 돌본다고 했네. 내게 서신을 보낸 친구는 그간 태자를 보좌해왔지. 그가 고향으로 간다는 건 태자의 세력이 뿌리 뽑혔다는 뜻이네.”
확실히 동중용은 관료사회에 대한 식견이 높았다.
“황제가 건강을 되찾고 새로운 의욕이 생긴 것일까요?”
동중용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이미 천하가 그의 것인데 굳이 강호를 건드릴 필요가 없지.”
“그 말씀은…….”
“누군가 옆에서 부추긴 사람이 있다는 뜻이지.”
“……!”
“황제를 내세워 강호에서 이득을 취하고 싶은 누군가가 있는 게지.”
무한이 탄식을 하였다.
“이제껏 조정과 무림은 서로 경원시 해왔는데, 대체 누가 강호를 얻고자 하는지 궁금하군요.”
“사람의 욕심을 어찌 섣불리 재단할 수 있겠나.”
동중용도 탄식을 하곤 차를 마셨다.
무한이 공손히 예를 갖추고 나왔다.
“뭐라 말씀하셔?”
남궁우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물었다.
무한이 동중용과의 대화를 일러주며 군사부로 향했다.
사필염이 문까지 나와 마중하였다.
“무슨 일로 직접 오셨습니까?”
“군사부 정보에 조정에 관한 것도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이전 총군사는 황실과 조정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황도에 천하방의 이목이 적잖습니다.”
사필염이 뿌듯해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잖아도 황도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정보를 취합하여 보고하러 가려던 차였습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간언하였다.
“정보란 이렇게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 정보조직과 무력대를 분리하는 걸 재고하시지요.”
사필염은 틈만 나면 군사부 축소를 재고해달라고 한다.
무한은 그보다 손우자가 황실과 조정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말이 귀에 걸렸다.
사필염이 부사를 시켜 준비한 정보를 가져오게 했다.
“가장 최근 정보는 황제가 오랜 지병을 떨치고 정회를 주재한다는 내용입니다.”
동중용의 말과 일치했다.
“그러면서 조정에 일대 지각변동이 있었다는군요. 그동안 태자의 세력이 권력을 잡고 휘둘렀는데 한순간 황제가 빼앗아 갔답니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딱 그렇다.
사필염이 이런저런 정보를 주절주절 늘어놓는데 한마디가 무한의 귀에 꽂혔다.
“황제의 병을 치료한 이가 도사랍니다. 황제가 도사를 위해 황궁에 도관까지 지었다더군요.”
“잠시만.”
무한이 사필염의 손에 든 보고서를 건네받았다.
보고 내용은 황도의 풍문을 정리한 것인데, 잡다한 풍문 중에 황제의 병을 도사가 치료했다는 내용이 몇 줄 적혀 있었다.
무한이 남궁우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네가 황도에 다녀와야겠다.”
“으헝? 나보고 그 먼 황도를 다녀오라고?”
“황도에 남궁세가 사람들이 있잖아. 네가 적임자야.”
“에이. 이제 좀 쉴 수 있을까 했는데…….”
남궁우가 투덜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호위를 단단히 붙여줘. 황도에는 고수가 많다고.”
***
무한은 저녁에 다시 추경무를 만났다.
조촐한 저녁상을 보자 추경무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천하방이 강호에서 제일가는 방파라는데 방주의 저녁상이 참 검소하구려.”
무한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기름진 음식과 향기로운 술은 무인의 육신을 잠식하고, 의지를 갉아 먹지요.”
“으음.”
추경무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눈앞의 어린놈이 제법 뻣뻣하다는 생각뿐이다.
황제의 밀지를 앉아서 받고, 밀사이자 금의위 소영반인 자신을 여느 식객 대하듯 한다.
‘어린놈이 절대고수라더니…… 참으로 거만하구나. 금의위 일대(一隊)만 풀어도 네놈을 무릎 꿇릴 수 있을 것이다.’
소영반은 문관으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나 강호의 무공에 대해서는 경시하고 있었다.
그는 최근 소영반 직을 맡고 금의위의 무공을 견식한 바 있다.
그리고 세상의 고수는 황궁과 금군에 모여 있다고 믿었다. 그가 보기에 금의위 대영반이야말로 천하제일인이다.
“황제께서 밀지를 보내셨으니 답을 하게.”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강호의 정도를 지키는 일은 천하방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그것뿐인가?”
밀명을 받들겠다, 황제의 은덕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등등 입에 발린 말이 아니더라도 황제의 밀지에 대한 답은 분명히 해야 하지 않나?
추경무가 탄식을 하고 말했다.
“자네가 아직 어리고 강호에서만 살았기에 충(忠)을 모르는가 보군.”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이번 황상의 밀지는 천하방에만 내린 게 아니네.”
무한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정천맹이라고 새로이 결성되었다지? 정천맹은 물론이고 강호에서 이름난 대파와 세가에도 밀지를 내리셨네.”
“…….”
“지금 정천맹이나 대파와 세가는 황상의 뜻을 받들고자 황도로 달려가고 있을 걸세.”
“그게 무슨 뜻입니까?”
“밀지에 적혀 있지 않은가? 필요하다면 황상께서 지원을 해주겠다고 하셨네. 그 은덕을 조금이라도 누리려면 남보다 앞서 가야 하지 않겠나?”
무한이 실소를 흘렸다.
금의위 소영반이라는 자가 이렇게 무림에 대해 무지하다는 게 의아했다.
“혹시 소영반 직을 맡으신지 얼마나 되셨는지요?”
추경무의 낯빛이 굳어졌다.
“지금 내가 뭘 모르고 지껄인다고 생각하는가?”
실제로 그가 소영반 직에 오른 건 바로 얼마 전이다. 그리고 바로 황제의 밀지가 전해졌다.
강호 대파와 세가를 동원해 마교의 후신을 몰아내라는 명을 받고 사방으로 밀사가 떠났다.
소영반은 천하방이 중원 최고의 방파라는 소리를 듣고, 환대를 기대하고 직접 왔는데 어린놈에게 홀대를 받으니 부아가 치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한은 괜히 추경무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웃는 낯으로 말했다.
“기왕에 오셨으니 며칠 묵으시면서 천하방 대소문파와도 교류를 하시지요.”
추경무를 돌려보낸 무한이 이번에는 천기자를 찾아갔다.
천기자는 무한의 방주 취임식을 보고 떠나겠다며 내성에 머물고 있다.
“무슨 일인가?”
“혹시 손우자가 도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까?”
“그의 호가 손우자 아닌가.”
“그렇군요.”
무한은 황제의 지병을 고쳤다는 풍문의 도사가 손우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황제의 밀지와 지병, 그리고 황도의 풍문을 천기자에게 전하고 물었다.
“그 도사가 손우자일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공교롭게도 손우자가 자취를 감춘 뒤 정체 모를 도사가 황도에 나타났다.
천기자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이 도사 행세를 한다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