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다음 날.
성밖마을 백가상단 안가를 찾은 무한은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이제는 백가상단 단주가 된 백의영 부부와 천하상단의 장자 천이금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하방주를 뵙소!”
천이금이 극진한 예를 취했다.
옆에서 백의영이 역시 예를 취하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밖마을까지 왔으면 연락을 하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검천부 재정을 맡고 있는 유아는 서안으로 와서 형소와 함께 머물고 있다. 백가상단 역시 서안에 지부를 열고 거래를 하는 중이다.
그러니 백의영이 성밖마을에 온 것은 뜻밖이었다.
“상단의 일입니다. 어찌 천하방주를 번거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백의영이 말했다.
“겸사겸사 먼발치에서라도 방주의 취임을 보고자 왔지요.”
천이금이 덧붙였다.
천이금은 과거 천종해의 일로 자신이 지닌 사업의 절반을 천하방에 넘겨야 했다.
무한이 이를 다시 천이금에게 맡겼고, 사업은 점차 커져 이제는 천이금이 직접 나서 관장하는 규모에 이르렀다.
“단주께서는 안녕하신지요.”
무한이 천평산의 안부를 물었다.
“집안에 우환이 사라졌으니 물러나시겠다며 상단 일에서 손을 떼셨소. 손주들을 가르치며 소일하고 계시오.”
천이금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으며 대답했다.
무한은 유아를 납치한 천종해를 제압하여 천하상단으로 보낸 바 있다. 천하상단주 천평산은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관아에 넘겨야 했다.
그에게는 아픈 손가락을 잘라내는 고통이었을 것이나 결과적으로 천하상단의 후계구도가 안정되었다.
천이금은 이를 우회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무한의 시선이 천소향을 향했다.
내상을 회복한 천소향은 과거 우울했던 표정이 사라지자 미모가 한층 빛을 발했다. 천소향의 배는 살짝 부풀어 있었다.
백의영이 웃으며 말했다.
“아들이면 백무한이라 이름을 지을 것입니다. 그래도 되겠지요?”
무한은 웃음으로 답을 했다.
백의영이 무한을 편전 빈청으로 안내하였다.
무한과 백의영, 천이금이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천이금이 성밖마을을 찾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도천부와 기천부가 사업을 정리하며 중원 상계가 몰려들고 있소.”
도천부의 고씨 일가의 가권은 고성후에게서 다시 고강후의 둘째 아들 고수로 넘어갔다.
고수는 도왕 고진의 명에 따라 도천부 무력대를 해산하고, 그간 벌여왔던 사업을 정리하는 중이다.
백의영이 말했다.
“고씨 일족의 근거지 절강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사업은 모두 정리한다더군요. 그 규모가 작지 않으니 누가 가져가느냐에 따라 중원 상계의 서열이 바뀔 수도 있지요.”
도천부의 사업은 중원 전역에 흩어져 있고, 규모 또한 컸다.
기천부는 강유가 직접 사업을 관장해왔는데 이번에 절반 정도를 매물로 내놨다고 했다.
“두 분에게는 기회이겠군요.”
“그렇긴 하오만…….”
천이금이 말하다 말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천산파가 알게 모르게 중원을 잠식하며 세력이 커지고 있소. 천산파로 넘어간 문파들이 득세하는데, 마도와 다를 바 없으니 그게 걱정이오.”
“확실히 흑도와도 다르더군요. 흑도는 나름 지키는 선이 있는데, 이들은 암암리에 민간인을 상대로 살인방화를 서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상계가 우려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조정에서도 무림의 변동을 주목하고 있다오. 얼마 전에도 무기 소지 단속을 강화하라는 황명이 내려왔다고 하오.”
중원의 큰 도시는 원래 검이나 칼과 같은 무기 소지를 금하고 있다.
물론, 이를 의식하는 무림인들은 거의 없고, 관에서도 모른 척해왔다.
“황제가 무림을 주시하고 있군요.”
무한의 말에 천이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도와 가까운 대도시는 검문을 강화하여 무림인의 출입까지 제한하고 있소.”
무한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세 사람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무흔이 들어왔다.
“손님이 왔습니다.”
흑선수사가 왔다는 뜻이다.
무한은 백의영에게 부탁하여 후원 다실을 빌렸다.
잠시 후.
무한이 다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세 사람이 들어왔다.
흑선수사 단조와 무흔 그리고 연이설이었다.
“흑월령의 주인을 뵙습니다.”
흑선수사가 예를 취했다.
무한이 웃으며 답했다.
“아주 오랜만은 아닌 것 같군요.”
흑선수사는 서안에서 봤으니 그리 오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연이설은 가볍게 목례만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럼 말씀을 나누시지요.”
“아니, 무흔 대형도 있어야죠.”
둘을 데려온 무흔이 나가려 하자 연이설이 소매를 잡아 앉혔다.
흑선수사가 그 모습을 흘깃,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을 보는 무한은 내심 복잡했다.
흑선수사 단조가 연이설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건 흑수애에서 알았다.
‘연 낭자는 무흔 대형에게 마음을 두고 있고, 무흔 대형 또한 남달리 대하는 걸 보면 마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 듯한데.’
지금 무흔은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 흑선수사를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흑선수사 또한 연이설의 마음을 알면서도 굳이 모른 척하고 있다.
무한은 이제까지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이런 삼각관계가 생소하게 다가왔다.
흑선수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흑월주께 폐를 끼치고자 온 게 아닙니다. 우리는 강동으로 가는 길입니다. 무흔이 얼굴이나 뵙고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무한을 찾아온 게 자의가 아니라 무흔이 등 떠밀어 온 거라는 뜻이었다.
“그럼 얼굴을 봤으니 그만 가셔도 되겠군요.”
무한이 짐짓 냉랭하게 대꾸하자 흑선수사의 얼굴이 굳었다. 모욕을 당했다고 여겼는지 숨이 거칠어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하방주에 오르시더니 무척 고고해지셨군요. 축객령을 받았으니 이만 가야겠습니다.”
그러자 연이설이 이번에는 흑선수사의 소매를 잡아 앉혔다.
무한이 말했다.
“올 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갈 때는 그리 못합니다.”
“흥! 내가 천하방을 두려워할 것 같습니까?”
흑선수사가 코웃음을 쳤다.
“흑천 흑선의 수장이시니 당연히 천하방은 안중에 없겠지요. 하지만…….”
무한이 품에서 흑월령을 꺼냈다.
“흑월령의 명은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흑선수사는 말문이 막혀 눈알만 굴렸다. 무한이 흑수애를 찾았을 때 자기 손으로 바친 흑월령이다.
“하명하시지요.”
흑선수사가 퉁명스레 답했다.
“태도를 보아하니 흑월령이라는 게 그다지 권위가 없는 모양입니다.”
“원래 흑도가 그렇습니다. 명은 따르지만 마음까지 주지는 않지요.”
“단조, 흑월령주께 이 무슨 무례인가.”
무흔이 끼어들었으나 흑선수사는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해보니 천하방주께서 흑월령을 가지고 있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소.”
흑월령을 돌려달라는 뜻이다.
“흑월령이 이리 쉽게 주고받는 건지 몰랐군요.”
무한이 흑월령을 스윽, 흑선수사 앞으로 밀었다.
그러자 흑선수사가 더욱 화를 냈다.
“천하방주이시니 이까짓 흑월령은 눈에 차지도 않는 모양이구려.”
그러면서 흑월령을 집었다.
그러자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겠군요. 흑월령주.”
갑자기 바뀐 무한의 태도에 흑선수사가 의아해하였다.
“천하방주와 흑월령주로서 천하를 두고 담판을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한의 말에 흑선수사가 아, 하고는 멍한 얼굴이 됐다.
흑선수사는 무척 영민한 사람이다. 무한이 흑월령을 돌려주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자극했음을 깨달았다.
만일 그냥 돌려준다고 했으면 무한의 생모이자 흑월주 진소향과의 연연, 흑천노조와의 혈연을 빌미로 받지 않았을 것이다.
흑선수사가 무안해하며 말했다.
“그냥 돌려주셔도 됐는데 굳이 이렇게 뒤통수를 치시는군요.”
무한이 흑월령을 돌려준 것은 흑월과 선을 긋는 동시에 흑선수사를 흑월의 주인으로 대하겠다는 뜻이다.
무한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흑선수사의 화술이 뛰어나니 어쩌겠습니까? 이제 입장이 정리됐으니 흑월의 거취를 논해보지요.”
“아까도 말했지만 강동으로 가려 합니다.”
“그런데 피전격이 길을 막고 있지요?”
무한의 말에 흑선수사가 머뭇거렸다.
흑선수사는 자신의 재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어 아쉬운 소리를 못한다.
흑월 세력을 이끌고 강동으로 가다 피전격이 추격해오자 길을 바꿔 천하방 영역으로 숨어들었다. 일단 안전을 도모한 뒤 생로를 찾을 심산이었다.
그 또한 무한의 도움을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다. 흑월령을 건넸으니 이를 빌미로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으나 천하방주에 올랐다는 소식에 마음을 접었다.
그래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걸 무흔이 반은 억지로 잡아끌고 왔다.
“흑월과는 남다른 인연이 있으니 모른 척 할 수 없군요.”
“우리를 도와주면 정파에서 문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다르게 볼 수도 있지요. 흑천의 내분을 조장하는 건 천하방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대놓고 흑천의 내분을 조장한다하니 흑선수사는 내심 기가 막혔다.
사실 흑천이 사사천과 흑월로 다시 갈라지면 천하방이나 정파로서는 반길 일이다.
“길을 열어드리지요.”
무한이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이 길을 따라 하남으로 넘어가면 됩니다.”
“이래도 됩니까?”
무한이 제시한 길은 천하방을 관통하고 있다.
정도의 본산을 흑천 흑월이 질러간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로, 흑선수사는 아예 고려하지도 않았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흑천을 둘로 쪼개는 것이니 천하방이나 정도에도 이득이지요.”
무한이 지도를 건네며 말했다.
흑선수사가 지도를 챙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변이긴 하지만 말은 되네.’
사실 흑월과 사사천으로 나뉘어 있을 때 두 세력은 치열하게 싸웠다.
오히려 정파와의 싸움보다 더 격렬했다. 이는 같은 흑도로서 서로의 영역과 이권이 겹치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무한이 품에서 영패와 문서를 건넸다.
“혹시 천하방 무력대가 검문을 하면 이걸 보여주면 됩니다.”
흑선수사가 영패와 문서를 챙기고는 일어나서 읍을 했다.
“방주의 배려에 흑월도를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
무한이 검각으로 돌아오자 남궁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가 사람을 보내왔어.”
“황제?”
무한이 의아하여 되물었다.
그와 황제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천하방주는 무림의 황제나 마찬가지잖아. 그러니 축하사절단을 보낸 게 아닐까?”
남궁우의 말에 무한이 한숨을 쉬었다.
“으음. 너, 정말 남궁세가 지낭 맞아?”
황제가 강호인에게 축하사절단을 보낼 리가 있나.
남궁우가 웃으며 말했다.
“황제가 너를 사냥개로 삼으려나봐.”
“무슨 말인지 일단 들어보고 생각하자.”
남궁우가 나가더니 잠시 후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변복을 하였으나 조정 관리 특유의 거만함이 몸에 밴 중년 사내와 시위로 보이는 자였다.
중년 사내는 무한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불러들인 것이 불쾌한 듯 낯빛이 좋지 않았다.
“천하방주 심무한입니다.”
무한이 예를 취하자 중년 사내 옆에 있던 시위로 보이는 자가 대신하여 신분을 밝혔다.
“이분은 금의위 소영반 추경무, 추 대인이십니다.”
중년 사내가 묵묵히 무한을 보았다.
신분을 밝혔으니 다시 예를 취하라는 뜻인가 보다.
‘무척 목이 뻣뻣한 자로군.’
어째 골치 아픈 일이 생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