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하지만 천하방은 여러 문파가 연합한 곳이오. 그러니 각지의 본문과 유기적인 연락을 해야 하는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천하전을 개조하여 각 파 명의로 객사를 배정할 겁니다. 언제고 와서 묵으면 됩니다.”
“헉! 천하전을 개조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말씀대로 천하방은 여러 문파가 연합한 곳 아닙니까? 천하전이야말로 각 파에서 파견 온 사람들이 묵어야 할 곳이지요.”
파격적인 무한의 말에 갈천경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지만 객사에 몇 명이나 머물 수 있겠소? 문주가 와서 상주하는 문파도 있는데.”
“그거 참 이상하군요. 문주가 본문을 지켜야지 왜 천하방에 와 있는 건지요?”
‘당연히 이권 때문이지.’
갈천경은 하마터면 자기도 모르게 이 말을 내뱉을 뻔했다.
“굳이 외성에서 지내겠다는 문파는 막지 않겠습니다. 다만.”
무한이 책상에 놓인 주판을 툭, 치며 말했다.
“외성은 그간 저렴하게 임대해왔는데 앞으로는 시가에 맞춰 임대료를 받을 생각입니다.”
“예? 형제를 상대로 장사하겠다는 겁니까? 그러면 남아날 문파가 없습니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부모형제라도 계산은 정확히 해야지요.”
대장로 갈천경은 할 말이 없었다.
***
다음으로 찾아온 사람은 집법당주 변위초였다.
“험, 험. 본 당주가 방주께 서운하게 한 게 있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변 당주를 신뢰합니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오?”
변위초가 집법당 개편안을 내밀었다.
추각을 분리하여 수장을 장로전에서 임명하고, 독자적으로 운영한다는 내용이다.
소관은 여전히 집법당이나 그저 형식적일 뿐, 인사권을 당주가 행사하지 못하니 변위초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 개편안 말씀이군요.”
변위초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추각과 판각이 한 지붕 아래 있어야 효율을 높일 수 있소.”
“하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지요. 한 지붕 아래 있는 추각이 불충분한 증거로 무리하게 범인을 잡았는데, 판각이 진범이 아니라고 판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이 안대로라면 추각은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전횡을 부릴 수 있소.”
“그걸 막아주는 게 집법당이겠지요.”
“이건 나와 추각주를 싸움붙이겠다는 뜻이오.”
변위초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 당주는 그간 공정하게 운영해왔다고 자부하오. 그런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중에 변 당주께서 물러난 뒤에 오는 차기 집법당주도 공정했으면 좋겠습니다.”
“……?”
변위초는 뭐라 반박하려다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자신은 공정하게 집행했다지만 뒤에 오는 자도 그럴까?
또한, 솔직히 십 수 년 당주로 있는 동안 미심쩍은 사건이 없지는 않았다.
변위초가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 당주가 생각이 짧았소.”
그러면서 무한을 다시 보았다.
‘어린 나이에 이리 생각이 깊다니…….’
집에서 뒹굴며 무위도식하는 아들을 생각하니 비교가 되었다.
‘정말 물러날 때가 된 모양이구나.’
변위초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돌아갔다.
그 외에도 여러 기관의 수장들이 다녀갔다.
무한의 개편안은 견제와 균형에 충실했다.
그러다 보니 집행기관의 장들은 권한이 축소되거나, 누군가로부터 견제 받게 되었다. 그러니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자를 다루는 만재당, 인재를 선발하는 취현당, 무력대를 운용하는 용의당…….
무한은 일일이 응대하며 개편안의 취지를 설명했고, 수장들은 항의하러 왔다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돌아갔다.
소소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
“대체 언제 이렇게 생각해둔 거야?”
무한이 속으로 대답했다.
‘시간이 많았거든.’
***
무한의 개편안이 추진되며 천하방은 빠르게 변모하였다.
외성이 비워지고 성밖마을 사람들에게 개방되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던 성밖마을 사람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그간 도천부가 득세하며 성밖마을의 치안이 흔들렸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외성을 선호하였다.
소속 문파들이 떠난 자리에 성밖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자 외성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천하전은 소속문파들을 위한 객사로 개조되었다.
비대한 집행기관이 쪼개지면서 작은 기관들이 무수히 생겨났고, 그러기에 수많은 전각들이 필요했다.
무한은 천하사패가 있던 장원을 새로이 단장하였고, 새로 편성된 집행기관이 속속 들어찼다.
***
“방주 취임식 초청인사 명단에 내가 없다니! 이럴 수가 있어?”
무한이 방주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남궁우가 달려왔다.
“당연히 있지.”
“어디? 어디 있다는 거야?”
“여기, 군사부 군사들도 참석자 명단에 있잖아.”
“으응?”
“정식으로 천하방 군사로 임명하지.”
무한이 군사 영패를 던졌다.
“오!”
영패를 받아든 남궁우의 입이 쫙, 벌어졌다.
남궁세가에 출사표를 던지고 나온 지 일 년 만에 천하방 군사가 되다니.
‘역시 최고의 선택이었어.’
내심 무한을 선택한 자신을 칭찬하며 남궁우가 말했다.
“좋아. 받아들이지. 그러면 천하방 군사로 첫 보고를 하지.”
남궁우가 소매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 건넸다.
“정천맹에 관해 그동안 조사한 내용이야.”
무한이 책자를 읽는 동안 남궁우가 히죽거리며 군사 영패를 만지작거렸다.
책자를 다 읽은 무한이 물었다.
“정천맹에서도 손우자를 찾고 있다고?”
“응. 권왕은 아무래도 공손승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나봐. 하긴 구파일방의 늙은 여우들을 공손승이 감당하기는 어렵지.”
“개파할 때보다 소속문파가 줄어든 건 왜 그런 거지?”
정천맹 소속 중소문파가 처음 개파할 때보다 줄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지.”
남궁우가 손가락을 세워 흔들며 말했다.
“권왕이 의도한 건 백여 년 전 있었던 무림맹이야. 구파일방을 아우른 맹을 만들고 맹주가 되고 싶었던 거지.”
“그런데?”
“구파일방이 득세하면 중소문파는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어. 잘난 대파의 위세에 눌리면서 홀대받는다는 생각이 드니 탈퇴하는 거지.”
무한이 곰곰 생각했다.
과거 무림맹은 정파의 유일한 맹주였다. 혼란스러운 무림에 정도를 지킨다는 취지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합세하여 창설했다.
그러나 결국 각파와 세가의 알력 때문에 유명무실해졌다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그 당시 중소문파에게는 대안이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천하방이 있잖아. 그쪽으로 건너간 문파들 중 상당수는 후회하고 있더라고.”
남궁우가 신나서 설명했다.
“이쪽에서 제의만 하면 들어오겠다는 문파가 하나둘이 아닐걸? 나를 파견해. 그러면 죄다 쓸어올게.”
“아니.”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모래알을 모아봐야 바위가 될 수 없지.’
도천부 때문이었든, 아니면 미련 때문이었든, 남아 있는 문파는 모두가 한 형제라는 천하방의 이념을 지켜온 문파들이다.
‘이미 적잖이 훼손된 천하방의 이념이지만, 그래도 공식적으로 이를 표방하고 있지.’
그러니 내부 결속력부터 다질 생각이다.
남궁우에 이어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운객이었다. 그는 한밤중에 슬며시 무한의 방에 스며들었다.
‘그새 은신술이 한층 깊어졌군.’
무한은 이제 운객의 은신술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수준을 평가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살수가 아니다.”
운객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한밤중에 찾아와 대뜸 살수가 아니라니.
무한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서투른 운객을 어찌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소. 그런데 무슨 일이오?”
“이제 내 힘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역시 뜬금없기는 마찬가지다.
무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방주의 암중호위 자리가 비었는데…….”
“하겠다!”
운객이 바로 대답했다.
“월봉도 묻지 않는 거요?”
“먹고 잘 수 있는 곳만 있으면 되지…… 아! 조건이 있다.”
“조건?”
“천하방에 만현서고라는 곳이 있다더군. 그곳에 소림 장경각 못지않게 수많은 무공서가 있다고 들었다. 출입할 수 있도록 해달라.”
으음. 뭔가 와전된 것 같은데.
만현서고에 어떤 무공서가 있는지 알고 있는 무한이다.
아무튼 본인이 원하니…….
“알겠소. 언제든 출입할 수 있는 패를 내주겠소.”
운객이 올 때와 마찬가지로 스르륵, 사라졌다.
빈자리를 지켜보던 무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흔 대형은 언제 올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다음 날 밤 무흔이 찾아왔다. 역시 한밤중에 스며들었다.
스르륵, 홀연히 나타난 무흔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거긴 내 자리인데?
운객이 은신한 곳을 잠시 노려보던 무흔이 입을 열었다.
“흑천의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무한의 표정이 굳었다.
“아, 양친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한의 표정을 보고 뭘 걱정하는지 알아챈 무흔이 바로 부모의 소식부터 전했다.
“두 분은 노조를 뵙고, 감숙으로 가셨습니다.”
“어머니도 가셨다는 겁니까?”
무흔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흑천은 아까운 인재를 잃었지요.”
어머니도 부친을 따라 감숙 절지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무흔이 품에서 서찰을 꺼냈다.
“부친께서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무한이 서찰을 열어 읽었다.
무흔이 전한 내용과 동일했다. 감숙 절지에 있을 테니 일간 한번 찾아오라는 내용이었다.
“흑천 상황이 어쨌기에 심상치 않다는 겁니까?”
“부주… 아니, 이제 방주시군요. 방주의 양친을 보내주는 대신 노조께서 흑천을 피전격에게 넘겼습니다.”
사사천주가 결국은 숙원을 이뤘구나.
“그러면 노조께서 흑천을 떠나셨다는 말입니까?”
“네. 서장으로 가셨습니다.”
“서장?”
무한이 궁금하여 물었으나 무흔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분의 뜻을 누가 알겠습니까. 늙은 종복만 대동하고 가셨지요.”
무흔이 감개무량한 눈빛으로 말했다.
천하 흑도의 수장이 모든 걸 내려놓고 빈손으로 떠났다.
정파와 다른 세계관을 지닌 흑도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피전격이 흑천을 장악했으니 곧 출정하겠군요.”
무흔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노조께서 흑천을 넘겼으나 흑선수사가 반발하고 흑월 세력을 끌고 떨어져 나갔습니다. 피전격이 노발대발하여 추격을 하고 있지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흑선수사가 위험하겠군요.”
무흔이 미적거리다 말했다.
“그래서…… 데려왔습니다.”
“네?”
“흑선수사 일행을 죽게 놔둘 수가 없었습니다. 위로는 마천이 내려오고 아래서는 피전격이 추격하니.”
“그러니까…… 흑선수사, 흑월의 세력을 끌고 왔다는 겁니까?”
“지금 성밖마을에 은신하고 있지요.”
무한은 갑자기 머리가 지끈하였다.
흑천 흑월의 수뇌부가 성밖마을에 있다니.
이 사실이 알려지면 천하방 무력대가 당장 뛰쳐나갈 것이다.
천하방 사람들에게 흑월이나 사사천이나 다 같은 흑도이고 바로 처단해야 할 적이다.
대책 없이 흑월을 끌고 온 무흔이 멀뚱멀뚱 운객이 있는 곳만 바라보았다.
‘이건 좀 골치 아픈 문제인 걸?’
그렇잖아도 흑천과의 관계 때문에 여러 차례 곤혹스러운 일을 겪었는데…….
무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일 백가상단 안가에서 만나자고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