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천하방 뒷산은 깊었다.
여름 짙은 녹음이 계곡을 뒤덮었다.
바위투성이 계곡을 따라 오르던 무한이 갑작스레 막아선 절벽 앞에서 땅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서너 번 도약으로 백 장 높이 절벽을 오르자 십여 장 크기 평지가 나오고 작은 모옥이 눈에 들어왔다.
모옥 앞에 평상 같은 바위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도왕이 절벽을 향해 좌정하고 있었다.
무한에게는 도왕의 등만 보였다.
도왕의 등은 허허로웠고,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문득 도왕이 입을 열었다.
“깨달음도 잃을 수 있는 건가? 갑자기 만장절벽이 앞을 막고 있는 듯하군.”
도왕의 목소리는 더없이 침중했다.
무한이 알기로 도왕은 화경의 고수로 현경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현경은 칠정육욕을 끊지 않는 한 다다르기 어려운 경지다.
도왕은 자식을 죽여 천륜을 끊어냄으로써 현경을 넘어섰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그게 한낱 약물 작용에 의한 것이라니.
상상 속에서 신이 되고, 한계를 넘어섰다.
그러나 현실은 냉엄했다. 도왕은 지금 절망의 벽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범인은 알아내셨습니까?”
도왕이 약물과 무술에 의해 당했다면 좌도사가 천하방 내에 있다는 뜻이다.
“약을 쓴 범인은 못 찾았네. 있다면 주방장이 쓰던 소금에 있지. 누군가 소금에 약을 탔다고 하더군.”
도왕은 중독을 막기 위해 따로 주방을 운용하였다. 주방장은 도왕만을 위해 철저히 검사한 식자재로 요리하였다. 그게 오히려 화를 부른 셈이 되었다.
여러 사람이 같이 먹는 음식에 약물이 있었다면 누군가 이상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도왕의 음식은 간을 보는 주방장과 시식하는 시녀만 소량 맛볼 뿐이다.
누군가 먹더라도 독이 아니라 정신작용을 활발히 하는 약이니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물의 무서움은 금단증상에 있었다. 도왕이 지금 절벽을 마주하고 좌정하고 있는 이유가 금단증상을 이겨내기 위함이다.
“무술을 쓴 용의자는 성후가 초빙한 적염이라는 도사일 듯하네. 그날 이후 갑자기 사라졌네.”
고성후가 죽은 형 고강후의 명복을 위해 도사를 불러 제를 지냈다고 했다.
도사는 열 명의 제자와 함께 왔는데 천하대전이 있던 날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적염.’
무한은 자신의 의식에서 팔괘진을 형성한 열 명의 도사들이 떠올랐다.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분명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때 도사들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그러나 적염이라는 자는 보이지 않았어.’
도왕이 말을 이었다.
“성후는 손우자에게 적염을 소개 받았다고 했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무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하방주를 지낸 자가 지내기에 너무나 초라했다.
“수발을 들 사람을 몇 보내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도왕도 이제 무한을 하대하지 않았다. 손자뻘이지만 천하방주이기도 하니까.
“조만간 금단증상은 끝날 것이네. 그러면 마천주를 찾아갈 생각일세.”
도왕은 여전히 절벽을 마주한 채 말했다.
“만장절벽이 가로막고 있다면, 베어야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한이 조용히 물러나왔다.
절벽을 내려서기 전 돌아본 도왕은 하나의 칼처럼 보였다.
***
“천하전은 정리됐어. 이제 짐만 옮기면 돼.”
소소가 찾아와 말했다.
방주의 자리에 올랐으니 검각에서 천하전으로 옮겨야 한다.
“아냐. 그냥 검각에 있을 거야.”
“왜? 방주가 있어야 할 곳은 천하전이야.”
무한이 피식 웃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천하전이 아니야.”
“그러면……?”
무한의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사람들 가슴 속에 있어야 진정한 방주가 될 수 있어.”
소소가 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였으나 그래도 아쉬웠는지 투덜거렸다.
“그러면 진작 말하지. 정리하느라 힘만 뺐네.”
그러면서 털썩,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형소와 서안에 있는 검천부 사람들을 불러야지?”
소소의 말에 이번에도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지금 네게 필요한 건 사람이야.”
“내 사람으로 천하방을 다 채울 수는 없어. 귀영과 검천사위만 오라고 해줘.”
서안 외곽에 장원을 구하고 이제 막 자리 잡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손우자의 행방이 묘연해. 그렇다면 나 역시 감춰둔 힘이 있어야지.’
무한은 형소와 신검무적대의 존재를 되도록 숨길 생각이었다.
“도천부가 와해되었다지만 따랐던 세력은 그대로 있어. 하후량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데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늘어질 거야.”
“아마 그럴 기회가 없을 걸.”
“무슨 대비책이 있어?”
무한이 보고 있던 문서를 쓱, 소소에게 밀었다.
“이게 뭔데?”
소소가 문서를 읽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외성 문파를 모두 정리한다고?”
무한이 건네준 문서는 천하방 개편안이었다.
“사필염에게 건네서 검토하라 해.”
손우자가 사라진 뒤 군사부는 이군사 사필염이 맡아 운영하고 있다.
“장로전과 군사부 반발이 심할 것 같은데? 이건 군사부를 해체하는 수준이야.”
“그래야지. 군사부는 너무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까.”
***
소소의 예상대로 군사부가 발칵 뒤집어졌다.
군사부 인원을 축소하고, 운용하던 정보조직과 무력대를 독립시킨다는 개편안은 군사부를 해체한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사필염이 검각으로 달려와 보기를 청했다.
“군사부를 축소하면 천하방은 마천이나 흑천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재고해주십시오.”
사필염은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강경한 어조로 항변했다.
무한이 그런 사필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지난날 정마대전 당시 군사부가 지금과 같은 규모였던가요?”
“그건 아니지만, 그때는 천기자라는 불세출의 두뇌가 있었기 때문에…….”
“사 군사는 자신이 천기자 어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나요?”
“당연하지요. 저는 천기자 어른의 발끝조차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과장이 심하군요. 그래도 천하방 이군사이신데.”
“사실이니까요.”
사필염은 대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생각하고 다시 군사부 개편안으로 화제를 돌렸다.
“총군사와 같은 천재도 군사부를 맡은 뒤 집무실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천하를 관장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천하를 관장하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지요.”
무한이 사필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놓으려 합니다. 앞으로 군사부는 천하를 관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네?”
사필염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앞으로 군사부는 전략만 세우면 됩니다.”
“전략을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고, 정보조직을 운영하려면 무력대가…….”
무한이 손을 들어 사필염의 말을 끊었다.
“정보와 무력을 군사부가 독점하면 편하지요. 하지만 그래서 오는 부작용은 생각해봤습니까?”
“부작용이라니요?”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사필염이 반문했다.
‘이 사람은 뼛속까지 군사부 사람이군. 뭐가 잘못됐는지도 몰라.’
정보와 무력을 모두 갖춘 집단이 사익을 위해 움직일 경우 어찌되는지는 생각지 않는다.
자신이 곧 정의이고, 정의를 위해 약간의 왜곡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정의가 아니다.
무한이 서늘한 눈으로 사필염을 주시하며 말했다.
“어떤 부작용이 있었는지는 개편을 해보면 알 것입니다. 그대로 진행하세요.”
“이런 식이라면 저는 그만두겠습니다.”
사필염이 강경하게 나왔다.
무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군사부의 총군사로 이 군사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쉽군요.”
“예?”
사필염의 눈이 와르르 흔들렸다.
사실 그는 무한이 취임하면 자신이 내쳐질 것이라 여겼다.
군사부와 무한의 알력은 이미 천하방 모두가 안다. 손우자 밑에서 이군사로 근무했던 자신을 무한이 그대로 놔둘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도 막후에서 군사부에 영향을 미치고자 조직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천하방 총군사!
개편한 군사부도 여전히 천하방의 중심이다. 그 중심의 수장에 자신을 세우겠다니.
“험, 험!”
사필염이 헛기침을 하였다. 바로 태도를 바꾸려니 그 자신이 생각해도 염치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무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군사부 이군사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붙잡을 용의가 있습니다.”
“아…… 네.”
사필염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시행해보고, 그때 가서 부족한 점이 드러난다면 다시 고치기로 하지요.”
“알겠습니다.”
사필염이 더는 군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편안에 대한 반발은 군사부만이 아니었다.
그간 천하방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방파들이 일제히 장로전으로 몰려갔다.
“이게 말이 됩니까? 외성을 비우라니요!”
“이건 천하방을 무력하게 만드는 해방(害幇)행위입니다!”
무한의 개편안은 소속문파들이 있던 외성을 성밖마을 사람들에게 개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그러자 대장로 갈천경이 불난 집에 부채질하였다.
“거기 쓰여 있잖소. 각자 문파로 돌아가라는 글귀가 안 보이오?”
“돌아가라니! 이는 천하방을 해체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천하방 소속문파는 외성에 있는 건물이나 장원을 대여 받아 지부나 파견소 등으로 활용해왔다.
세력이 클수록 장원의 규모도 컸고, 그에 따라 상주하는 인원도 많았다.
심지어 문주가 아예 상주하고 있어, 지방에 있는 본문보다 규모가 더 큰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본방에서 외성에 있는 근거지를 비우라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장로전에서 기필코 거부권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방주라지만 천하방의 근간을 깨는 전횡을 한다면…… 방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갈천경은 문파 수장들의 항변에 내심 흡족해하며 말했다.
“신임 방주에게 여론을 그대로 전하겠소. 장로전이 할 일이 그게 아니겠소?”
***
“맞습니다. 여러 문파의 의견을 수렴하여 방의 운영에 반영하는 게 장로전이 할 일 중에 하나지요.”
무한이 자신을 찾아온 대장로 갈천경이 중지를 모아온 취지를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수긍하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반발하는 문파가 대여섯 곳에 불과하군요. 여러 문파라 하면 적어도 절반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한의 지적에 갈천경이 개편안에 항의하는 문파들이 연명한 문서를 보고는 아차, 하였다.
연명한 문파는 세력이 큰 문파들이다. 이제까지 늘 그랬던 터라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래선 곤란하지요. 세력이 큰 문파 몇몇이 방을 좌지우지한다면 어떤 문파가 남아 있으려 하겠습니까?”
“하지만 방주의 개편안은 너무 독단적이고…….”
갈천경의 말을 자르고 무한이 서류를 하나 꺼내 건넸다.
외성을 비우는 개편안에 동참하겠다는 작은 문파들의 연명부다. 그 수가 무려 절반이 넘는다.
작은 문파들은 사실 외성에 건물 하나 임대하는 것도 부담이다. 하지만 건물을 얻어 파견소라도 설치하지 않으면 천하대전에서 발언권이 축소되니 울며 겨자 먹기로 운영해왔다.
그러니 외성을 모두 비운다는 개편안을 쌍수를 들어 환영하였고, 흔쾌히 연명부를 작성하였다.
“장로전은 이 문파들의 의견도 감안하여 결정을 내렸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