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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02화 (202/250)

202화

무한이 고동후를 바라봤다.

고동후가 하나뿐인 아들 고영을 아낀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고영은 기천부 귀영대를 주살하고 강소소를 죽이려 한 죄가 밝혀졌다. 이대로라면 방규에 의해 처형된다.

그가 살아날 유일한 방법은 피해 당사자인 기천부가 선처를 제기하는 것이다.

아마도 천기자는 기천부가 고영의 사면을 대가로 진실을 밝히라고 고동후를 압박했을 것이다.

고동후가 말을 이었다.

“나 역시 동참하였소. 고성후가 가형이자 도천부주의 신분을 내세워 나를 압박하여 기천부를 공략하라 하였소!”

“고동후! 대체 무슨 말이냐? 네가 미친 것이냐?”

고성후가 버럭 고함을 질러 고동후의 고변을 막으려 들었다.

그러자 집법당주 변위초가 나서며 말했다.

“고동후는 이미 집법당에서 그간의 전모를 모두 기술하였소. 이게 바로 그 기록이오.”

변위초가 품에서 문서를 꺼내 도왕에게 바쳤다.

도왕이 문서를 받아 읽고는 확, 내던지며 고성후를 향해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천하방 형제를 해치면 어찌되는지 네가 몰랐다는 말이냐!”

그러면서 변위초를 향해 말했다.

“고성후를 포박하여 뇌옥에 가둬라. 신임 방주가 처리할 것이다!”

고성후는 돌변한 사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익!”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집법당 무인들을 후려치고는 몸을 날려 대전을 빠져나가려 하였다.

“어디를!”

대전에 벽력같은 도왕의 고함이 터졌다.

고성후는 엄청난 경기가 자신을 향해 몰아치는 걸 느끼고, 곧바로 몸을 돌려 내력을 쏟았다.

놀랍게도 고성후의 손에서 아까 도왕이 쥐었던 혈천마도와 비슷한 강기의 도가 형성되었다.

“아앗! 무형도!”

“도천부주의 경지가 진경을 넘어서다니!”

모두가 고성후의 무위에 놀랐다.

하지만 상대는 도왕이었다.

콰직!

번개보다 빠른 섬광이 고성후를 스치며 무형도를 깨뜨리고 전신을 관통하였다.

“크윽!”

고성후가 비틀거렸다.

도왕의 일격에 사대경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십이경락 전체가 끊어진 것은 아니나 이로써 화경을 넘본다는 건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아들의 무위를 반절 꺾어버린 도왕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데려가라.”

집법당 무사들이 고성후를 포박하여 대전을 나갔다.

갑작스런 사태에 도천부 지지파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도왕이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더 할 말 있나?”

“…….”

도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하금령을 가져오게.”

무한이 일전에 도왕이 준 천하금령을 품에서 꺼내 건넸다.

도왕이 천하금령을 휙, 던졌다.

천하금령이 대전 밖을 나가 광장 계단 위 허공에 둥둥, 떴다.

도왕의 내기를 받은 천하금령은 눈부신 빛을 발휘하였고, 이를 보는 이들은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천하방을 검천부 심무한에게 넘긴다!”

도왕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대전 안은 물론 저 밖 광장에 있는 이들까지 모두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도왕이 천하금령을 회수하여 다시 무한에게 건네며 말했다.

“피전격의 손에서 강후의 시신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게 자네 덕분이라더군.”

도왕의 목소리는 회한에 차 있었다.

도왕이 쳐놓은 기막으로 인해 두 사람의 대화는 대전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어리석은 자식 놈이지만 앞서 가는 건 다시 보고 싶지 않구나…….”

무한이 도왕을 보다 지난 날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언젠가 그러셨지요.”

- 나는 네 적이 아니다.

신분패를 돌려줄 때 도왕이 했던 말이다.

“저 또한 도천부를 적으로 삼지 않겠습니다.”

“…….”

잠시 무한을 바라보던 도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성후의 목숨만은 보전해달라는 말을 무한이 받아준 것이다.

도왕이 기막을 거두고 대전을 한번 쓸어본 뒤 천천히 빠져나갔다.

도천부 지지파들은 대체 왜 도왕이 자기 자식을 내치고 무한에게 방주의 자리를 물려주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이 났으니 뒤집을 수는 없었다.

오늘 천하대전을 대비하며 여차하면 천하방과 갈라서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 계획까지 준비했는데. 고성후가 저리 되었으니 그마저 불가능하게 되자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

총군사 손우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동시에 삼군사 문요 또한 사라졌다.

일군사 공손승은 정천맹으로 넘어갔으니, 천하방에는 이군사 사필영만 남았다.

무한의 천하방주 취임식은 다가오는 중양절로 정해졌다.

아직 한 달여 시간이 남았고, 구파일방을 비롯해 주요 문파로 초청장을 보냈다.

무한은 서안에 머물고 있는 형소와 검천부 식솔을 불러들였다.

내성 총관 포승이 방주 취임식을 맡아 분주하게 움직였다.

***

천기자가 차를 마시자고 청해왔다.

기천부 후원.

돌탁자를 사이에 두고 천기자와 무한이 앉았다.

천기자가 차를 내면서 말했다.

“천하방은 이제 자네 손에 달렸네.”

무한이 방주로 올라섰으니 천기자도 하대하지 못했다.

“비록 반으로 쪼개졌으나 아직 육십여 문파가 함께 하고 있으니 강호 제일방파라고 할 수 있네.”

정천맹이 구파일방을 회유하려 들었으나, 개방과 점창 등 몇몇 문파만 동참하였을 뿐 여타 문파는 관망하고 있었다.

“구파일방의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은 게지. 그들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어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네.”

“그러더라도 권왕과 개방, 점창을 비롯해 수십 문파가 정천맹 휘하로 들어갔습니다. 결코 무시할 수 없으니 공존을 모색해야지요.”

“자네는 이 형국이 오래갈 것이라 보는가?”

“마천과 흑천, 정천맹과 천하방, 네 곳 중 마천의 세가 가장 강하지요. 그러나 마천 역시 천하방과 정천맹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무한이 돌탁자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흑천이 마천과 손을 잡을 리는 없지요.”

흑천은 흑수애를 봉쇄하고 있다. 그러기에 무슨 속셈인지 알 수는 없지만 피전격의 성격에 마천과 손을 잡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마천이 천산파로 개칭하고 과거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네. 이미 중원 흑도와 사도 문파 중에 상당수가 천산파로 넘어갔지.”

천기자가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줄곧 의심한 바는 천산파가 어찌 중원 흑도와 사도의 상황을 이리 정확히 꿰뚫고 있는가 하는 점이네.”

천기자의 말대로 마천, 천산파는 흑도와 사도 문파의 가려운 점을 긁어주며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

천기자가 잠시 침묵하자 무한이 말했다.

“혹시 손우자가 중원 정보를 마천주에게 넘겼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 아니, 그간의 행보를 보면 그랬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걸세.”

천기자는 자신의 대제자가 중원을 팔아먹었다는 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천기자가 화제를 처음으로 돌렸다.

“지금 이 형국은 오래 가지 못할 걸세. 권왕은 결코 정천맹을 안정시킬 수 없네.”

“…….”

“천하방이 지금까지 존속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보는가? 천하제일인이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요. 할아버지께서 타계하신 후 도왕이 거의 돌보지 않았음에도 천하방은 유지되어 왔으니까요.”

“천하방 내 방파의 성쇠에 따라 차별이 있었다고 하나, 모든 문파가 한 형제로 동등하다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지.”

무한이 잠시 생각했다.

확실히 천하방은 이제까지 무림사에 존재했던 무림맹과 사뭇 체계가 달랐다.

“사람이 만든 체계가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네. 또 최초에는 바람직하다 여겼던 체제도 세월이 가면 변질되고 말지.”

“제가 아는 천하방 역시 그랬습니다.”

문파간의 차별이 존재했고, 집행기관 사이에도 종종 알력을 빚곤 했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한 것이니까.”

“예?”

“자네가 천하방 체계를 바꿀 생각인 걸 알고 있네. 천하사패가 무너졌으니 당연히 조직 체계도 바뀌겠지.”

천기자의 눈에서 형형한 빛이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천하방 대소사를 논할 때는 마치 한창 시절의 천기자를 보는 듯했다.

“천하방을 조직할 때 오랫동안 고심했네. 그리고 결코 인간의 선의를 기반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지.”

“선의가 아니라면…….”

“권력에 대한 욕망, 이익, 명예욕…… 인간이 추구하는 온갖 욕구를 기반으로 조직한 게 천하방일세.”

무한은 들을수록 의아했다.

“천하방 내부의 행태가 불합리하게 보일 수도 있었겠지. 각자의 권력과 이익에 혈안이 된 자들로 보였을 것을 부인하지 않겠네.”

“…….”

“하지만 그 때문에 어느 누구도 완전히 방을 장악할 수는 없는 체계지. 방주든 장로전이든, 집행기관이든.”

천기자가 돌연 쓴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인간이고 한계가 있지. 군사부가 저렇게 비대해지고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될 줄은 예상 밖이었네.”

손우자가 사라진 후 감찰단은 군사부에 대해 대대적인 감찰을 실시하였다.

손우자가 취임한 후 군사부는 무력대를 편성하고, 정보 수집과 밀정 심문, 심지어 은밀한 무력행사까지 해왔음이 드러났다.

손우자는 입수한 정보를 약점 삼아 천하방 고위직을 포섭하거나 조정하고, 자신에게 맞서는 자를 합법적으로 제거해왔다.

“만일 시일이 좀 더 흘렀다면, 그리고 도왕의 무공이 약했다면 아마 방은 군사부가 좌지우지 하고 있었을 것 같더군.”

자신의 대제자가 저지른 짓을 생각하곤 천기자가 탄식을 하였다.

무한은 천기자의 말을 곰곰 되뇌었다.

모두 받아들일 수도 없고, 심정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부분도 있으나 수많은 이들이 모인 방파를 유지하는 데 적합한 방법이기도 했다.

천기자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권력과 이익을 나누고, 서로를 견제하게 함으로써 그 어느 누구도 방을 장악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인간의 선의를 믿고 최선의 선택을 한다는 건…… 자칫,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지. 그래서 나는 차악을 선택한 걸세. 사람을 믿되, 조직을 믿지는 말게.”

무한은 비로소 천기자가 이 자리를 청한 이유를 알았다.

천하방 개편을 앞두고 자신의 생각을 전한 것이다.

무한이 정중히 예를 취하며 말했다.

“말씀하신 바를 알겠습니다. 천하방을 개편할 때 참고하겠습니다.”

“기천부는 이제 비우겠네. 강유도 천하방을 떠날 생각이더군. 그간 내 대신 기천부를 지키며 심고가 컸던 모양이네.”

“도천부도 해체한다고 합니다. 이로써 천하사패는 사라진 셈입니다.”

고성후와 동후 형제는 집법당 뇌옥에 갇혔다.

고영은 기천부의 사면 요청에 풀려났으나 천하방 밖으로 내쳐졌다.

도천부를 지키고 있는 이는 고성후의 아들 고군과 고마 두 형제다. 그리고 두 형제가 얼마 전 찾아와 도천부를 해산하고, 천하방을 떠날 터이니 아버지 고성후의 목숨을 보전해달라고 요청해왔다.

무한은 아직 답을 하지 않고 있으나 조만간 고성후 형제를 풀어줄 생각이다.

다만, 그 이전에 도왕 고진을 만날 생각이다.

도왕은 천하방주의 자리를 물려주고, 뒷산 깊숙한 계곡에 들어가 모옥을 짓고 은거하였다.

“자네가 인명을 중시하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때로는 끊어내는 것도 후일을 위해 필요하지.”

천기자는 도천부의 싹을 잘라야 한다는 말을 돌려 말했다.

역시, 냉정한 군사였다.

‘하지만 나의 천하방은 다를 겁니다.’

무한이 속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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