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201화 (201/250)

201화

도왕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팍!

자신과 천기자의 주위에 기막을 치자 두 사람의 공간이 단절됐다.

“독이란 말인가?”

“그 약은 독이 아닙니다. 두뇌를 예민하게 자극하는 약이지요. 그러기에 평소보다 많은 걸 보거나 들을 수 있고, 생각지도 않았던 걸 알아챌 수도 있습니다. 고수가 복용한다면 깨달음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요.”

대전에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으나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무한만이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도왕이 몇 달 만에 경지를 높일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구나.’

도왕은 무척이나 당혹해하였다.

자신의 성취가 약물의 도움이라는 소리지 않은가.

다른 건 몰라도 무공에 대한 집념과 쏟아 부은 노력만큼은 자신하고 있었던 도왕이다. 천기자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지난 몇 달 마치 하늘에서 깨달음을 내리기라도 하듯 수월하게 여러 차례 난관을 뚫었다.

도왕의 입술이 분노로 바르르 떨렸다.

대체 누가 어떻게 약을 썼다는 말인가.

도왕의 시선이 고성후를 향했다.

고성후는 부친이 표독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자 당황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도왕의 표정으로 보아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설마 나라는 걸 알고 있는 건가? 천기자가 그걸 일러바치는 건가?’

도왕에게 미혼고를 쓴 건 고성후다. 도왕과 세 형제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썼다.

그 뒤로 고강후를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철저히 뒤로 빠져 있었기에 도왕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아니다. 침착하자. 이제 병석에서 일어난 천기자가 어찌 일의 전모를 알 수 있겠어. 벌써 십년 전 일이다. 아버지 성격에 의심하고 있었다면 여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성후가 간과한 것은 도천대주 신악강의 눈썰미였다.

신악강은 도천대주로 무수한 사람을 죽였기에 죽는 순간 눈빛만 봐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강후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죽어가며 억울해 하는 눈빛을 보고 진범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당시 현장을 바로 떠나지 않고 죽어가는 고강후와 무한의 대화를 들었다. 그리고 고강후가 진범이 아니었다는 걸 확신하고 도왕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도왕은 기가 막혀 했다. 동시에 고강후에게 자신의 의심을 돌릴 수 있는 자를 모두 주시했다. 그러다 권왕이 정천맹으로 떨어져 나갈 때 비로소 알아챘다.

고성후와 손우자, 권왕이 한통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아들 하나를 자기 손으로 처단했다. 게다가 고성후는 어려서부터 은근히 기대를 했던 자식이다.

고강후나 막내 고동후와 달리 심계가 깊어, 내심 도천부를 맡기고자 했던 아들이다.

마침 깨달음을 연달아 얻어 무공의 경지가 일취월장하였다. 이대로라면 심양조의 경지를 추월할 수 있으리라.

그러기에 차라리 천하방을 떠나 수련에 매진하고자 무한에게 양위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자신의 성취가 약물에 의한 것이라니. 배반감이 도왕의 이성을 흔들었다.

그때, 천기자의 은은한 목소리가 도왕을 일깨웠다.

“방주…….”

천기자가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한 눈빛으로 도왕을 보며 말했다.

“얻은 것은 얻은 것입니다. 나머지 일은 차차 처리하면 될 테지요. 오늘은 이 자리에서 할 일만 하면 됩니다.”

도왕이 묵묵히 고개를 돌려 대전 안을 보았다.

모두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도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막을 풀고 단상 상석에 올랐다. 이어 천기자에게 상석에 오르기를 청했다.

“기천부는 이제 없습니다.”

천기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대전 안 사람들을 향해 포권을 하며 말했다.

“병석에서 일어나 패천부가 천하방을 나갔다는 말을 들었소. 그로써 천하사패의 우의는 깨졌고, 기천부는 더 이상 존속할 의미를 잃었소.”

천기자의 어조에는 비장함이 어려 있었다.

대전 안의 모든 이들이 숙연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따라서 기천부를 해산하고자 하오. 노부는 오랜 병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소. 그러기에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고자 하오.”

“안 될 말씀이오. 지금 천하방에는 천기자 어른이 필요하오!”

“맞소. 도왕께서도 양위를 하시겠다고 하는데, 천기자 어른마저 떠나면 천하방의 앞날은…….”

사람들이 분분히 만류하는데 천기지가 손을 들어 모두의 말을 끊었다.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헤치고 나간다는 말이 있소. 이미 천하방에는 새물이 들어와 있는데 무얼 걱정하는 게요?”

천기자가 무한을 보자 모두의 시선이 무한을 향했다.

심지어 고성후마저 무한을 보았다. 그리고 불편한 기색을 감추고 앞으로 나서서 천기자에게 예를 취하곤 말했다.

“천기자 어른의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검천부주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무엇보다 천하방에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이어 대전 안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천하방은 수많은 무인들이 피와 땀을 흘려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방주의 자리에 오르는 자는 이러한 뜻을 이해하고 이어나가야 할 자여야 합니다.”

이어 무한을 주시하였다.

“검천부주의 무공이 나이에 비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심오막측하다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방주의 자리는 무공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

고성후가 도왕과 천기자의 뜻에 정면으로 반박하자 모두 입을 닫고 상황을 주시하였다.

그때, 노쇠한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나는 그리 생각지 않네!”

관격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검천부주가 천무행 당시 천무관 일행을 구한 일은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것이오!”

관격후가 노쇠한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자신의 둘째 아들이 변을 당한 천무행을 거론하려니 저절로 한 맺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하방에 기여한 바가 없다고 했소? 검천부주는 특임감찰을 맡아 당가장로 살인사건을 해결하였고, 흑천과의 싸움에서 피전격과 겨뤄 수많은 목숨을 구했소. 더욱이 감숙에서 마천의 남하를 저지하여 중원 정파가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구했고, 공동파를 위기에서 구하였소. 그래도 그가 천하방과 중원 정도를 위해 한 바가 없다고 할 수 있겠소?”

관격후의 말에 모두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연합 무력대를 구한 공로를 더해주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돌연 들려온 고함에 모두의 시선이 대전 밖을 향했다.

연합 무력대 군장 문우승을 필두로 무력대주들이 천하전 정문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문우승이 거침없이 걸어오다 계단 앞에 이르러 반무릎을 꿇었다.

“연합 무력대 군장 문우승! 마천의 남하를 저지하라는 명을 받고 출정하였으나,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고 패장이 되어 왔습니다. 이에 대한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문우숭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었다.

연합 무력대가 고전을 하고 있다는 건 모두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마천의 일만 병력에 비해 칠백 무력대는 확실히 부족했다.

방내에서는 서둘러 지원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군사부는 차일피일미룰 뿐이었다.

문우승이 무한을 향해 포권을 하며 말했다.

“패전에 대해 본 군장이 책임지는 것과 별개로 검천부주가 단신으로 적진을 뚫고 들어와 연합 무력대를 구출한 공은 마땅히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품에서 문서를 꺼내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천하전 시위가 문서를 받아 황급히 대전으로 들어가 도왕에게 바쳤다.

문서는 패전 경위를 보고하고, 무한의 공로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었다.

도왕이 입을 열었다.

“노부의 뜻은 이미 확고하다. 만일 스스로를 방주의 자리에 합당하다고 자신하거나, 누군가를 천거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밝혀라. 이게 마지막 기회다.”

그러자 도천부 지지파의 대표 격인 화극문주 하후량이 나섰다.

“도천부 고성후가 방주의 자리에 합당하니, 그를 추천하는 바이오!”

“찬성이오.”

“나도 동감하오!”

도천부 지지파가 일제히 고성후를 지원하였다.

“노부는 검천부주가 아니면 천하방에 남을 이유가 없다!”

관격후가 버럭, 고함을 질러 맞서고, 무한을 지지하는 몇몇 문파들이 이에 동조했다.

“흥! 늙은이가 노망이 났구나!”

군중 틈에서 관격후를 비난하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혼원문주 홍주해가 크게 화를 냈다.

“누구냐! 숨어서 지껄이지 말고 당당히 나와서 말하라! 관 선배는 네놈들이 기저귀 차고 똥을 깔아뭉갤 때 이미 천하방을 위해 목숨을 건 분이시다!”

“뭐라? 정신이 혼미하면 뒷방에서 조용히 지낼 것이지, 어찌 나와서 방을 어지럽힌다는 말이냐?”

대전 안 문파 수장들이 둘로 쪼개져 서로를 비난했다.

‘이러다 방이 쪼개지겠구나.’

무한은 천하방주의 자리를 원한 바도 없는데 당사자가 되어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고성후에게 천하방주의 자리를 넘길 생각도 없다.

방주의 자리가 탐나서가 아니다. 고성후가 되면 이번 연합 무력대와 같이 방도들을 사지로 모는 일이 되풀이될 것이다.

그러기에 발언을 자제하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도왕과 천기자 역시 말을 아끼고 여러 문파 수장들의 설전을 보고만 있었다.

“천하방은 여러 문파들이 모여 이룬 방파요. 당연히 문파 수장들의 의견이 중요하오.”

하후량이 목소리를 높여 좌중을 향해 말했다.

“지지기반이 없다면 방주는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오. 이 간단한 이치를 어찌 모른단 말이오!”

“맞소!”

도천부 지지파들이 입을 모아 하후량의 말에 동조하였다.

아무래도 다수파인 만큼 상황은 고성후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그때,

“도천부 고성후의 만행을 고발하오!”

한 사람이 천하방 정문을 들어서며 고함을 질렀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두 눈을 붕대로 감싼 고동후가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고 있었다.

고동후는 호위의 부축을 받아 걸어오더니 대전 계단 아래 무릎을 꿇고 외쳤다.

“고성후가 내 아들 고영을 시켜 기천부 강소소를 연금하고, 귀영대 십여 명을 주살하였소!”

도천부와 기천부의 암투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기천부가 부를 폐쇄하고 도천부가 이를 뚫기 위해 고심한 것을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런데 새삼 고동후가 고성후를 고발하고 나서니 모두가 놀라고 의외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고동후는 자신의 눈을 망친 자의 편을 들고 있는 셈이다.

‘대체 어찌된 일이지?’

그러다 담담한 얼굴로 대전 밖을 보는 천기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미리 안배를 해뒀다는 말인가?’

생각해보니 천기자는 고성후 쪽으로 중론이 기우는데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고동후를 설득한 거지?’

그때 천기자가 시선을 돌리다 무한과 마주쳤다.

‘그렇군. 고영이었어.’

천기자는 고동후의 외아들인 고영의 목숨과 무한의 방주 자리를 바꾼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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