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피처럼 붉은 혈강과 경천신검이 맞부딪혔다.
쾅!
굉음과 함께 대전이 진동하였다.
무한이 부딪히는 힘을 이용해 뒤로 몸을 날렸다.
“감히 도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도왕이 고함을 지르며 무한을 쫓아 몸을 날려 재차 혈강을 휘둘렀다.
쾅!
무한이 대전 창문을 부수며 밖으로 뛰쳐나왔고, 뒤이어 도왕이 따라 나왔다.
무한이 대전 앞 계단 위에 섰다.
대전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광장에 있던 이들의 시선도 모였다.
“대체 무슨 일이지?”
“방주가 검천부주를 공격하다니…….”
사람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방주!”
무한이 외쳤으나 도왕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쉬쉬쉭!
혈강은 마치 실제 존재하는 칼처럼 무한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소리도 없이 짓쳐든 혈강은 경천신검과 부딪힐 때마다 굉음을 터뜨리며 터져나갔다.
평범한 검이라면 벌써 부러졌을 것이다.
혈강이 터지며 충격파가 퍼지고, 깨진 강기의 파편이 날았다. 대전에 있는 이들도 하나같이 고수들이었으나 혈강의 흉험함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피해라!”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자 십여 장 공간이 형성되었다.
무한은 도왕의 눈빛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마치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한 눈빛이다.
‘허상을 보고 있구나!’
무한을 보되, 무한이 아닌 어떤 존재를 보는 듯했다.
심마에 빠질 경우 실제가 아닌 허상이 현실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말을 들었다.
무한은 며칠 전 도왕을 보았을 때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한 느낌이 들었던 게 떠올랐다.
도왕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무한이 아닌 허상을 공격하고 있기에, 미묘한 어긋남이 존재했다.
사람들이 보기에 도왕의 공세는 엄밀하고 강력했으나 무한은 그 미묘한 어긋남을 이용해 공세를 흘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감탄했다.
‘저렇게 무지막지한 공격을 가볍게 흘려 내다니….’
무한은 도왕의 공세를 흘려내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대전 문 안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손우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손우자는 마치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는 듯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그 시선에는 당혹감이 담겨 있었다.
순간, 무한은 지금 도왕이 날뛰는 게 손우자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도왕에게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다!’
손우자가 당혹해하는 건 도왕이 미쳐 날뛰는 것 때문이 아닐 것이다. 자신이 너무나 가볍게 도왕의 공세를 흘려내는 걸 보고 놀란 듯했다.
까강!
무한은 가슴팍을 파고드는 혈강을 쳐내며 도왕을 살폈다.
도왕이 미혼고에 당한 이후 무척 조심하고 있음을 무한도 안다.
‘고는 아닐 거야. 광증을 유발하는 독에 당한 걸까?’
광기를 유발하는 독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지금 상황에 맞지 않았다.
정말 미쳤다면 주위 모든 걸 공격하는 게 맞다. 도왕은 지금 무한만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다.
‘독도 아니야.’
눈빛이 허상을 보고 있지만 광기는 들어 있지 않다.
그때, 강유의 전음이 들려왔다.
- 도왕이 좌도사의 무술(巫術)에 당한 듯하다!
순간 무한은 일전에 살기 덩어리의 공격을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의식으로 팔괘주술을 외우던 도사를 공격했는데 사실 실제 있었던 일인지, 의식의 허상인지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절대지경에 이르러 의념과 심상을 자유자재로 형상화 했다가 허물 수 있으니 자칫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거짓의 세계를 접할 수 있다.
의식이 만든 허상의 공간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 그래서 애써 무시하고 있었는데 도왕의 상태에 대한 강유의 평가를 듣고 당시의 일이 허상이 아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 무술을 어떻게 깰 수 있습니까?
- 청정진음(淸正眞音)이라면 도왕의 정신을 일깨울 수 있을 텐데…….
강유가 말꼬리를 흐렸다.
청정진음은 불가의 고승이나 도가의 선사가 깨달음을 실어 범인의 우매함을 깨치는 소리를 말한다.
지금 당장 상황이 급한데 고승과 선사를 어디서 찾을까.
‘청정진음.’
무한의 눈빛이 빛났다.
어느 순간, 무한이 갑자기 경천신검을 마구 휘저어 도왕을 몰아붙였다. 이에 도왕이 미친 듯이 강기를 후려치며 뒤로 물러났다.
잠시 여유를 번 무한이 경천신검을 세우더니, 손가락으로 검날을 튕겼다.
따앙!
검에서 청명한 소리가 울렸다.
무한이 갑자기 검을 튕기자 사람들이 의아해 하면서도 감탄했다.
‘검에서 이렇게 청아한 소리가 나다니.’
무한은 자신이 삼도봉에서 얻었던 깨달음을 경천신검을 통해 울렸다.
하늘을 놀랍게 한다는 검답게 경천신검이 무한의 깨달음을 검명(劒鳴)으로 승화하였다.
지이잉!
놀랍게도 검명은 일파만파 퍼져나가며 점점 더 커져 갔다.
동시에 도왕의 움직임이 멈췄다.
우우웅!
검에서 장엄한 검명이 흘러나오고, 도왕의 눈빛이 점차 가라앉았다.
이윽고, 도왕이 일으킨 강기로 이뤄진 혈천마도가 스르르 사라졌다.
도왕의 눈빛은 당혹으로 물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마치 잠시 꿈을 꾼 것 같았다.
꿈속에 대전으로 걸어 들어오다 무면(無面)의 사내를 만나 공격했는데 그게 현실이라니.
덜컥, 심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무한이 두 손을 모아 포권을 하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방주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대전에 있는 사람은 도왕이 갑자기 무한을 공격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광장에 있는 이들은 자세한 상황을 몰랐다.
갑자기 대전 안에서 굉음성이 터진 후 무한이 대전 창문을 부수고 튀어나왔고, 이어 도왕과 무한이 겨루는 걸 봤을 뿐이다.
“뭐라고? 저게 비무였어?”
“정말 놀라운 경지야. 방주도 검천부주도 절대지경임이 틀림없어.”
광장에 있는 이들이 입을 모아 두 사람의 무공을 칭송했다.
오늘 이 자리가 왜 이뤄졌는지 모두 알고 있다.
도왕이 무한에게 천하방을 맡긴다고 공포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람들은 도왕이 무한의 무위를 모두에게 보여주고자 실전 같은 비무를 했다고 여겼다.
“…….”
도왕이 잠시 무한을 보았다.
이윽고 자신을 배려하려는 걸 알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전으로 들어갔다.
무한이 도왕을 따라 대전으로 들어서는데 손우자가 보이지 않았다.
“총군사께서 두 분의 비무를 보다 갑자기 몸이 불편하다며 가서 쉬신다고 하였습니다.”
군사부 사람이 도왕에게 고했다.
이를 듣는 도왕의 눈빛이 싸늘했다. 그 또한 손우자가 자신에게 수작을 부렸음을 깨달은 것이다.
다만, 무슨 수작을 어떻게 부렸는지 알 수가 없고, 증거 또한 없으니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대전 한편에 불만스러운 얼굴로 서 있던 고성후가 군사부 사람을 향해 말했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모르는 건가? 총군사가 빠지면 안 되지.”
고성후는 어떻게든 손우자를 다시 불러 양위를 막고자 했다.
도왕이 무한에게 양위하면 그걸로 끝이니 그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성후의 말에 도천부 지지세력의 수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방의 앞날이 걸려 있는 중대사이니 총군사는 물론이고 주요 집행기관의 장들도 모두 참석시켜야 합니다!”
“맞습니다. 천하방은 여러 형제들의 중지를 모아 운영해왔습니다. 방주의 양위는 천하방 모든 문파의 의견을 수렴하여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자 대장로 갈천경도 나섰다.
“방주, 여러 형제의 의견이 이러하니 잠시 기다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왕이 장로전에서 한바탕 난리를 친 이후 대장로를 비롯한 장로들은 그간 숨죽여왔다.
그러나 무한에게 양위한다는 느닷없는 도왕의 결정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좋다. 총군사와 주요 집행기관의 장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지.”
도왕이 손우자를 다시 불러오라 했다.
잠시 후, 손우자를 찾으러 갔던 군사부 사람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총군사께서 보이지 않습니다.”
“뭐라?”
“군사부에도 사가에도 연락을 했는데, 두 곳 다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전이 술렁거렸다.
방금까지 있던 총군사가 사라졌다니 그럴 만도 했다.
무한은 손우자가 사라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 멀리 천하전 정문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무척이나 수척한 모습의 천기자가 소소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천기자를 보고 크게 놀랐다.
“저분은 천기자 어르신 아닌가?”
“맞아. 많이 마르기는 했지만 분명 천기자 어르신이야!”
사람들이 다가가 천기자에게 앞 다퉈 예를 갖췄다.
천하방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검신의 무공과 천기자의 신기막측한 계책이 있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동시에 오늘 이 자리에 대한 기대가 한층 높아졌다.
지난 십년 가까이 치매에 걸려 두문불출했던 천기자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으니.
도왕 역시 깊고 서늘한 눈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오는 천기자를 보았다.
천기자는 힘겹게 계단을 올라 대전 앞에 섰다.
이어, 정문에 걸려 있는 현판을 잠시 보고는 대전으로 들어왔다.
“기천부주를 뵙습니다.”
“천기자 어르신을 뵙습니다.”
대전 안에 있는 이들이 일제히 천기자를 향해 예를 갖췄다.
천기자가 일일이 손을 들어 답례를 하고 도왕에게 다가갔다.
“방주, 오랜만에 뵙는군요.”
도왕이 상석의 단을 내려가 천기자를 맞았다.
“자네도 많이 늙었군.”
지난 십년 누워 지낸 천기자는 주름이 깊어 도왕보다도 늙어 보였다.
“세월을 누가 이길 수 있을까 했는데, 바로 방주였군요. 이리 강건하신데 어찌 방주의 자리를 내려오려 하시는 건지요?”
천기자의 말에 도왕의 서늘한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자리에 오르고서야 내 자리가 아님을 깨달았네. 나는 한낱 무부로 심 대형의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하니 어찌 방주의 자리를 뭉개고 앉아 있을 수 있겠나.”
그러면서 깊이 탄식하였다.
“내가 덕이 모자라 권왕이 따로 나갔네. 그런데 무슨 염치로 천하방도들을 볼 수 있겠나.”
천기자가 도왕을 가만 주시하다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경지에 오르셨군요.”
도왕은 원래부터 무공에 대한 욕심과 호승심이 컸다.
이를 잘 아는 천기자는 지금 도왕의 모습이 생소했다.
“내 길을 이제야 찾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네.”
도왕은 검신 심양조에게 패한 뒤 의형제를 맺고 사천방에 이어 천하방까지 함께 하였으나, 언제고 천하제일인을 꺾고자 하는 야망을 심중에 품고 있었다.
그랬기에 검신이 세상을 떠나자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그가 꺾고자 하는 상대가 사라진 것이다.
심양조는 영원한 천하제일인으로 남았고, 자신은 그의 뒤를 이은 후인이자 천하제이인자일 뿐이다.
게다가 천하방 방주의 자리에 올랐으나 자신에게 미혼고를 쓴 자가 자식이라는 사실에 심고를 겪어야 했다.
결국 자기 손으로 자식의 목숨을 거둔 후에야 자신이 걸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도왕과 같은 경지의 고수가 새로이 깨달음을 얻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천기자가 도왕의 얼굴을 주시하다 말했다.
“좌도방문에 무술이라고 있습니다.”
“……?”
“정신력이 강한 사람은 무술에 당하지 않으니 그리 대단한 술수는 아니지요. 그러나 어떤 약을 쓰면 제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도 쉽게 당할 수 있지요.”
옆에서 듣고 있던 무한은 천기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천기자로구나. 방금 전 상황을 꿰뚫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