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99화 (199/250)

199화

무한이 관격후를 부축하여 일어나려는데 옆에 다시 한 사람이 반무릎을 꿇었다.

일선문 우곽이었다.

“본파는 마천과의 싸움에 몰락하여 나 홀로 남았소. 그러니 잠시 검천부에 의탁하고 싶소. 부주께서는 이 몸을 받아 검천부 문지기로 쓰시고, 후일 일선문의 재건에 힘을 빌려주시길 간청하오.”

무한은 내심 울컥하였다. 우곽의 뜻을 알기 때문이다.

후일 문파 재건을 위해 지금 검천부에 의탁하겠다는 것이지만, 이는 겉으로 내건 명분일 뿐 세가 약한 검천부에 자신의 한 몸을 더하겠다는 마음이다.

무한이 좌중을 둘러봤다.

모인 사람 면면을 보며 이들이 원하는 바가 있어 찾아왔음을 안다. 하지만 검천부와 함께 하겠다는 마음만은 같았다.

무한이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

“알겠소. 그러니 이만 일어나시오. 비록 검천부 가솔이나, 엄연히 문파의 수장이시니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무릎 꿇어서는 안 되오.”

무한이 좌중을 향해 읍을 하며 말했다.

“검천부를 지지하여 주시면 그 후의를 잊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먼저 밝히고자 합니다.”

모두가 무한을 주시하였다.

“마천과 흑천…… 두 세력이 와해되면 천하방을 해체할 것입니다.”

무한의 말에 모두 서로를 보았다.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천과 흑천을 상대하는 수고의 대가가 없음을 뜻합니다.”

모인 이들은 문파의 수장들이었기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과거 천하방은 중원 무림 위에 군림하며 소속 문파들도 영달을 취할 수 있었다. 무한은 이제 그런 보상이 없다는 걸 말한 것이다.

관격후가 말했다.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기는 게 맞지. 세력에 기대면 비굴해질 수밖에 없다! 부주의 말이 옳다!”

관격후의 말에 역시 나이가 지긋한 홍주해가 맞장구쳤다.

“검천부 노사의 말이 옳소! 중원 무림이 안정되면 나는 본문에 돌아가 낚시질이나 하며 세월을 보낼 것이오!”

무한이 말한 의미를 깨달은 수장들이 하나 둘 고개를 끄덕이고 동조하였다.

***

손우자는 고성후를 자신의 정원에서 맞았다.

화사한 초여름 햇볕에 손우자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정원 돌탁자에 앉아 찻잔을 기울이는 손우자를 보던 고성후는 문득 궁금했다.

“그때 왜 나를 선택한 것이오?”

도천부의 둘째였던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손우자였다.

- 천하방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소?

그 말을 들었을 때를 잊지 못한다.

천하방, 아니 중원 최고의 기재라는 천기자의 대제자. 그를 얻는다면 천하방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깨달았다.

자신이 형 고강후를 이용했듯이 손우자 역시 자신을 이용한 것뿐이다. 그걸 깨달은 이후 되도록 멀리해 왔다.

손우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야심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게지요.”

이제는 이용했다는 사실을 감추지도 않는다.

고성후는 화가 치밀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이제 그때의 말을 지켜줘야겠소.”

“그래야지요.”

손우자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무한을 제거할 궁리를 하는데 손발이 되어줄 자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다만 고강후와 달리 이놈은 제법 심계가 깊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갈 놈이니 이상을 눈치채면 바로 발을 뺄 것이다.

“도왕께서 이리 무모한 결정을 내리시다니… 이대로라면 천하방이 다시 한 번 쪼개질 겁니다. 그리되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손우자가 진심으로 천하방의 앞날을 우려한다는 듯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놈이 권왕과 작당해서 정천맹을 만들어?’

고성후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버지 도왕이 그런 손우자를 용납하고 있고, 손우자 또한 정천맹으로 건너가지 않고 천하방 군사부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고성후가 내린 결론은 손우자가 도왕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놈이 대체 무슨 약점을 쥐고 있기에 아버지가 손을 대지 못하는 걸까?’

고성후가 넌지시 손우자를 보며 말했다.

“총군사가 간곡하게 주청을 하면 방주의 마음이 바뀌지 않겠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도왕은 한 번 결정한 바를 번복하지 않습니다. 부친이니 더 잘 아시겠지요.”

고성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면 천하대전에서 공식적으로 양위한다고 했소. 우물쭈물하다간 그 어린놈에게 천하방이 넘어가오. 그러면 총군사의 입지도 사라질 게 아니오.”

손우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내일이 없을 수도 있지요.”

고성후는 그 말을 무한이 죽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내심 반색하며 물었다.

“미리 대비를 해두셨구려.”

손우자가 말없이 차를 마셨다.

***

저녁식사가 들어왔다.

도왕의 식사는 검소했다. 비록 면 한 그릇에 몇 가지 채소가 다였지만 대신 맛만은 뛰어났다.

미혼고에 중독될 뻔한 이후 도왕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수발을 드는 시녀와 하인들은 수시로 바뀌었고, 천하전을 지키는 무사들도 신원이 확실한 자만 선발하여 무작위로 호위하게 하였다.

유일하게 믿는 자가 있다면 오랜 세월 자신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춰준 주방장뿐이었다.

그 주방장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주방장에게 식사를 직접 가져오게 한 후 주위 아무나 골라 먼저 시식을 하게 하고 나서야 수저를 들었다.

오늘도 수발드는 시녀가 먼저 시식을 하였다. 가끔 하던 일이기에 시녀는 별 걱정 없이 시식을 하였다.

골고루 맛을 본 시녀가 수저를 놓고 앞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입을 가신 후 말했다.

“이상 없습니다.”

도왕은 그러고도 잠시 후에야 수저를 들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도왕은 잠자리에 들기 전 운기조식을 하러 개인수련장에 들어갔다.

지난 몇 달 부쩍 깨달음을 얻어 현경에 들 수 있었다.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 우주와 일체가 되고, 때로는 십 리 밖 닭울음소리를 듣기도 했다.

운기조식을 하면 의식이 한없이 확장되어 저 깊고 어두운 우주를 유영하였다. 때로는 무척이나 화려하고 밝은 선계를 접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실상과 허상을 구분하고자 하다 어느 순간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것이 허상이고 어느 것이 실체인지……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전인미답의 경지.

누가 일러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니 스스로 나아가야만 한다.

이후 의식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며 수련을 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수련을 마치면 묵직한 불쾌함이 깃들었다. 혹시나 중독된 게 아닐까 하여 세심하게 몸을 관찰하였으나 어디서도 중독의 징후를 찾을 수가 없었다.

수련 후 불쾌감이 이어지다 운기조식 중 꿈과 현실을 넘나들곤 하였다.

죽은 아들 고강후가 피를 뚝뚝 흘리며 찾아오기도 하고, 의형 심양조가 측은한 얼굴로 자신을 보기도 했다.

그러다 깨면 묵직한 불쾌감이 남았다.

‘생사경으로 넘어가는 벽일까?’

새삼 검신의 조언이 아쉬웠다.

벽에 부딪힐 때마다 검신은 적절한 조언을 해주었고, 그랬기에 천하제이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

도왕이 잡념을 떨치고 정신을 집중하였다. 평소처럼 몸이 가벼워지다 사라지고 우주와 일체가 되어 가는데…… 어느 순간 벼락을 맞은 듯 머리가 깨어질 것만 같았다.

“으으!”

절로 입이 벌어지고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깨질 것 같았던 머리가 사라진 듯 아무런 느낌이 없고, 의식이 한없이 부풀었다.

그 와중에도 이상을 느끼고 운기를 하려 하였다.

온몸의 세포가 부풀어 오르며 기운이 폭주하였다. 제어하려 했지만 한없이 팽창하는 의식을 따라 기운 또한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주화입마?’

도왕은 문득 스치는 생각에 아찔하였다.

그때, 어디선가 불경을 외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불경이 아니라 범어 그 자체였다.

이윽고, 한어가 들렸다.

“눈을 떠라!”

도왕이 자기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그의 앞에 누군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봤는데 눈, 코, 입 아무 것도 없다.

무면(無面)의 사내가 도왕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렀다.

“크윽!”

심장이 쪼개지는 아픔에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대로 죽는 건가?’

의식이 가물가물 스러졌다.

다음 날.

도왕은 자신이 운기조식한 채 아침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련 후 느끼는 예의 묵직함에 잠시 소주천을 운기하자 정상으로 돌아왔다.

꿈이었지만 심장이 쪼개지는 아픔이 생생하다.

“후우…….”

깊게 들이마신 숨을 내쉰 후 자리에서 일어나 수련장을 나오자 시비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그제야 오늘 천하대전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천하대전을 소집했더라?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간밤의 생생했던 꿈의 여파 탓인가.

***

오시가 되자 천하전 앞 광장에 사람들이 속속 모였다.

언제부터인가 방에서 각 파에 지급한 출입패를 지닌 자에 한해 광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아무나 참관하여 천하대전의 분위기를 흐리면 곤란하다는 이유였다.

광장에 들어서지 못한 이들은 열린 대문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대전에 들어올 수 있는 이는 여전히 각파의 장문이나 위임받은 자들뿐이다.

갑작스레 소집한 천하대전이기에 모인 인원은 마흔 명 가량에 불과했다. 수는 적었으나 참석률로만 보자면 과거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오늘 도왕이 방주 자리를 양위한다는 소문 때문에 진위여부를 확인하고자 밤길을 달려온 문파도 있었다.

대전의 의자 배치도 바뀌었는데 가장 눈에 뜨인 변화가 천하사패의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한 자 높이의 단에는 방주의 자리만 남았고, 한 단 아래에 군사부 등 천하방 집행기관의 장들이 앉았다.

가운데 일 장 너비로 빈 공간을 두고 양 옆으로 의자를 배치하였는데 무한은 오른쪽 가장 앞줄 검천부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공교롭게도 머리만 돌리면 총군사 손우자와 눈이 마주치는 지근거리다.

무한과 마주친 손우자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뱀처럼 무심한 싸늘한 눈은 웃지 않았다.

둥둥둥!

광장에서 큰북이 울리고 오시와 함께 도왕이 들어왔다.

단에 오른 도왕이 예의 투명하고 형형한 눈빛으로 대전 안을 둘러보다 무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

무한은 도왕의 검은 동공이 크게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살기가 도왕의 전신에서 터져 나왔다.

“너! 네가 왜 여기 있느냐!”

도왕이 외마디 고함을 지르더니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등 뒤에서 붉은 도기가 솟구치더니 도왕의 머리 위에 혈천마도의 형상이 나타났다.

무한이 튕기듯 일어나며 호신강기를 일으키는 동시에 경천신검을 뽑았다.

“죽어랏!”

도왕의 고함과 함께 강기로 이뤄진 혈천마도가 무한을 향해 폭사되었다.

“아앗!”

“피해라!”

무한 주위에 있던 이들이 크게 놀라 몸을 날렸으나 혈천마도는 거치적거리는 건 모두 베어버릴 듯 크게 확장되어갔다.

‘이런!’

무한은 피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피하면 다른 이들이 죽을 판이다.

경천신검을 내세워 혈천마도를 받아냈다.

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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