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이튿날 아침.
“적염이 실패했다고?”
고성후의 미간이 잔뜩 우그러들었다.
이제까지 적염 일행에 들인 돈이 얼마인데 고작 애송이 하나 잡지 못하다니.
‘정말 절대지경을 이뤘다는 말인가?’
적염이 실패했다면 믿을 수밖에 없다.
더욱 충격적인 보고는 아버지 도왕이 무한에게 천하금령을 넘겼다는 사실이다.
고성후는 도왕의 거처에 이목을 깔아두었고, 그래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아왔다.
‘날 버리고 그 따위 놈을 택해? 자신의 아들을 맹인으로 만들고, 손자를 죽이려 하는 놈을?’
고성후가 내심 분노했다.
‘정 그렇다면 내 힘으로 갖겠다!’
여기까지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왔다.
고강후를 전면에 내세워 도왕의 눈을 가리고, 권왕과 밀약을 맺어 천하방과 정천맹으로 양분했으며, 손우자와 손잡고 도천부의 세력을 확장해왔다.
고강후는 자신이 모든 걸 틀어쥐고 있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고성후의 손바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허무하게 죽었다.
고성후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버지 도왕의 행보였다. 설마 자식인 고강후를 죽일 것이라 생각지는 못했다.
도천대주 신악강을 시켜 고강후의 목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몸조심을 하고 있는 중이다.
‘무력으로는 어려워.’
무한이 절대지경의 고수라면 도천부 무력대를 다 갈아 넣더라도 잡기 어렵다.
손우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라면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기분 나쁜 놈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다니…….
내키지 않는지 고성후가 잠시 망설이다 도천부를 나서 군사부로 향했다.
***
무한과 소소는 기천부로 향했다.
봉쇄를 풀었으나 기천부 앞 광장은 인적 하나 없이 썰렁했다.
강유는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간의 심고를 말해주듯 귀밑머리가 한층 희끗해졌으나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심했다.
소소는 귀영대주 전옥이 살아 있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동안 자기 때문에 전옥과 귀영대원이 희생됐다고 자책했는데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무한이 어젯밤 살기덩어리에 대해 말했다.
“사술을 쓰는 자가 있습니다.”
“좌도방문에 그런 사법이 있다고 들었다. 천하방에 사법을 들여오다니…… 좌도사들이 있던 곳이 어딘지 알 수 있겠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갔기에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천하방 내부인지 아닌지도 모호합니다.”
무한도 좌정에서 깨어나서 좌도사들이 있던 곳을 추정해봤으나 알 수 없었다.
“도천부 아니면 군사부겠군. 두 곳을 살피면 단서가 나오겠지.”
강유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천하방에서의 싸움은 무엇보다 명분이 우선했다. 도천부나 군사부가 좌도의 사법을 사주했다면 축출할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을 쥐는 셈이다.
“천기자 어르신을 뵐 수 있겠습니까?”
무한은 절대지경에 이르며 천기자의 머릿속에 있는 우미고를 제거할 자신이 생겼다.
“이제 곧 오시가 될 터이니 깨어나실 걸세.”
강유가 일어섰다.
무한과 소소가 강유를 따라 천기자의 거처로 갔다.
오시가 되자 천기자가 깨어났다.
강유가 천기자의 머리를 덮은 만년한옥을 벗기며 말했다.
“무한이 돌아왔습니다.”
천기자가 온종일 감고 있어 진물이 흐르는 눈을 떠서 무한 쪽을 봤다.
만년한옥을 뒤집어쓴 동안은 우미고도 활동을 못 하지만 천기자 역시 움직이지도 운기하지도 못하니 거의 산송장이나 마찬가지 신세였다.
무한이 기운을 퍼뜨려 천기자를 감싸며 말했다.
“제게 약간의 성취가 있어 우미고를 제거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우미고가 너무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기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는 없습니다.”
우미고 자체도 희귀한데 중독되었다가 회복된 예가 없으니 무한으로서도 완전한 회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천기자가 클클 웃으며 말했다.
“온전한 몸으로 죽는다면 그게 복이지. 나를 보게. 살아도 산 게 아닌데 뭘 더 걱정한다는 말인가.”
천기자가 선뜻 제의를 받아들이고는 강유에게 말했다.
“혹 내가 죽거든 일전에 얘기한 대로 처리하거라.”
“알겠습니다.”
강유가 예를 취하자 소소 역시 옆에서 같이 예를 올렸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두 사람의 표정이 잔뜩 굳었다.
“호법을 부탁드립니다.”
강유와 소소가 문밖으로 나가 지켰다.
무한은 누워 있는 천기자의 머리맡에 앉았다. 이어 양 손바닥으로 천기자의 머리를 감싸듯 한 후 눈을 감았다.
의식을 일으켜 천기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자 뇌 앞쪽에 잠들어 있는 우미고를 감지할 수 있었다.
우미고는 이미 천기자의 뇌와 동화되어 있어 경계가 불분명했다.
무한은 기운으로 우미고를 건드렸다.
우미고가 본능적으로 수축하는 순간 경계가 지어졌다. 무한은 이를 놓치지 않고 기운으로 막을 쳤다.
잠시 후.
천기자의 코로 좁쌀만한 우미고가 흘러나왔다.
우윳빛 몸을 한 우미고를 무한이 준비해왔던 약병에 집어넣었다.
수혈이 짚인 천기자는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
무한은 기운을 일으켜 천기자의 전신 경맥에 쌓인 탁기를 제거하였다.
“아버님!”
오시가 지나갈 무렵 초조해진 강유가 들어왔다가 운기조식을 하는 천기자를 보고 감격해 하였다.
옆에서 같이 운기조식을 하며 천기자의 운공을 돕던 무한이 눈을 떴다.
“고맙네.”
늘 무심했던 강유도 지금 이순간은 격정을 감추지 못했다.
천하사패 천기자가 깨어났다.
***
천하방에 수상한 소문이 돌았다.
도왕이 퇴진하고 검천부주 심무한에게 방주의 자리를 넘긴다는 소문이었다.
“그게 말이 돼? 이제 약관의 나이에 무슨 방주란 말인가?”
“마천주와 직접 겨룬 절대고수야. 솔직히 강호에선 강자가 최고 아닌가?”
“안 돼! 그의 출신을 봐. 흑천노조의 외손자라고. 천하방을 흑천에 넘길 셈인가?”
소문이 퍼지면서 천하방 곳곳에서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도천부 고성후를 지지하는 문파들이 회합을 가졌다는 소문이 돌고, 방주 휘하 집행기관의 장들이 일제히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설이 나돌았다.
사람들은 권왕의 독립 이후 그러지 않아도 나날이 위축되어 가던 천하방이 결국 끝장이 났다고 여겼다.
***
“손님이 왔어.”
검천부는 문을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이 검천전 앞으로 몰려들고서야 소소가 알아채곤 무한에게 와서 고했다.
“이리 들여보내.”
무한은 검각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혼원문주 홍주해와 숭양검문주 시전, 그리고 구중문 전대문주 관격후 세 사람을 비롯해 대여섯 문파의 수장들이었다. 그중에는 일선문주 우곽도 있었다.
무한이 집무실 빈청에 찾아온 이들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무슨 일로 이렇게 함께 오셨습니까?”
혼원문주 홍주해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도왕께서 부주에게 방주의 자리를 양위한다는 것이 사실이오?”
“제게는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허! 정말인가 보오.”
홍주해가 좌중을 돌아보며 놀란 얼굴로 탄성을 흘렸다.
숭양검문주 시전이 무한을 주시하며 물었다.
“부주께서는 양위를 받아들이실 셈이오?”
무한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일선문주 우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인문파로 세가 없으니 가장 말석에 앉아 있었으나 기세만큼은 강력했다.
‘그간 성취가 있었나보구나.’
무한은 부주 취임 예방을 하며 우곽에게 일선문 비급을 건넨 바 있다. 이후 우곽은 검천부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사양할 이유가 없지 않소? 나는 부주를 천하방주로 받들고 싶소.”
무한은 찾아온 이들의 면면을 보고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이들은 평소 검천부에 우호적이었던 문파로 무한에게 지지 의사를 밝히러 온 것이다.
우곽이 자신의 뜻을 밝히자 홍주해가 말했다.
“노부도 같은 뜻이오. 부주가 이제 약관이나 절대지경의 무공을 성취했다는 것도 알고 있소. 허나 천하방 방도들이 납득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오.”
천하방 결성 당시부터 함께한 홍주해가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펼쳤다.
정천맹과 갈라지며 백여 문파가 순식간에 육십여 문파로 줄어들었다.
‘여기 대여섯 문파와 기천부를 지지하는 십여 문파를 제외하면, 사십여 문파가 도천부와 손잡고 있지.’
만일 무한이 방주로 취임하면 고성후가 독자적으로 새로운 방파를 세우면 그만이다.
이 자리에 있는 방파는 혼원문과 숭양검문, 구중문을 제외하면 약소문파들이다. 도천부 세력이 빠져나가면 천하방이라는 이름 자체가 무색해진다.
“흥! 말이 양위지 사실은 이를 빌미로 방을 다시 한 번 쪼개겠다는 뜻 아닌가? 껍데기만 넘겨줄 생각인 게지.”
숭양검문주 시전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무한이 건네준 천기자의 단약을 복용하고 주화입마에서 살아난 바 있다. 전형적인 무부로 은원이 분명하였다. 구명지은을 입었으면 그 목숨은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였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그간 알게 모르게 무한으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그래서 검천부와 함께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다만, 한 사람이 의외였는데 구중문 전대문주 관격후였다.
관격후는 할아버지 검신에게도 선배라고 할 수 있는 원로 중에 원로다.
관격후는 천무행 당시 죽은 현무대주의 부친이다. 무한과의 접점이라면 장로전에서 천무행 작전에 대해 같이 공박하였던 게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관격후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모두를 돌아보며 예를 취하고는 말했다.
“노부는 구중문을 이끌고 천하방을 위해 평생을 바쳐왔소. 여러분이 잘 아시리라 믿소. 그런데 천하방은 내 아들을 사지로 몰고 제대로 해명조차 하지 못하고 있소.”
관격후의 얼굴에 비장한 기운이 어렸다.
“협으로 의를 세우고, 의로써 천하를 구한다!”
무한이 집법당에서 외쳤던 천하방의 취지를 늙은 무인이 또박또박 되뇌었다.
“나는 오늘 이 시간부로 검천부에 의탁할 것이오! 비록 노구이나마 마다하지 말고 받아주시오!”
관격후가 빈청 가운데서 반무릎을 꿇고 포권하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무림의 대선배가 무릎을 꿇다니!
검천부에 의탁한다는 의미는 검천부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다.
구중문주의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전대문주가 검천부에 의탁한다면 구중문으로서는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다.
구중문은 원래도 천하방에서 수위에 속하는 성세를 지닌 문파였는데 정천맹과 갈라진 뒤에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무력을 지니고 있다.
무한이 깜짝 놀라 황급히 주인석에서 내려가 관격후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관격후가 완강히 거부하였다.
“부주가 승낙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무한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찌 대선배를 가솔로 모시겠습니까? 다만 검천부에 어른이 없으니 노사(老師)로 모실 수는 있습니다.”
무한의 말에 좌중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사라면 구중문의 입장을 고려하면서도 관격후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방안이었다.
관격후가 검천부의 노사로 머문다면 구중문 역시 검천부와 함께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는 무한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힘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