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천마지경이라…… 방주가 걷고 있는 경지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군요.”
“내가 가는 길이 보이나?”
도왕이 형형한 눈빛을 발하며 무한을 주시하였다.
투명하게 빛나는 보석 같은 눈이 무한의 심신을 뒤흔든다.
무한은 의식을 전신에 퍼뜨려 도왕의 진언(眞言)에 맞섰다.
‘확실히 경지가 달라졌어.’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해 보였다.
지난번에도 천하전 광장에서 만났다. 무한이 경천신검을 정식으로 쥐었던 날이었다. 그때 도왕은 화경이었는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생사경에 이르렀다.
일평생 수련하여 간신히 진경을 이루는 게 대부분이다. 진경 이후에는 아예 기한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기와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한 발씩 나아갈 뿐, 그게 옳은 길인지, 얼마나 가야 하는지는 결과를 이룬 뒤에야 알 수 있다.
무한의 성취는 무척이나 특이하여 이제까지 없던 경우다. 특히 진경 이후의 빠른 성취는 불가사의하다고 할 수 있다.
무한은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심안을 깨우는 천목투심술을 익히게 하였고, 천하제일인의 심결을 바탕으로 수련했으며, 반선(半仙)이랄 수 있는 오도(五道)로부터 심신수양을 지도받았다.
진경 이후 중요한 깨달음은 의식의 영역이다. 무한은 고벽후, 소마 등 고수들과의 접촉을 통해 일찍이 무공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넓혔고, 검마를 통해 기를 다루는 운기법의 무한함을 깨달았다.
또한 운객의 기습, 만독곡의 혈전, 마천주와의 격전 등 세 차례 생사를 넘나들며 인간을 초월한 인식의 세계를 접했고, 흑천노조로부터 천심공을 익히며 인식의 영역 자체가 무한 확장되었다.
이런 가운데 육신 또한 지화령석과 천기조양환, 천독단에 의한 세 차례 환골탈태를 겪으며 심신이 완전한 조화를 이뤘기에 지금과 같은 성취가 가능했다.
이 모든 게 불과 십년 사이에 이뤄졌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변화였으나 자의반 타의반 세상과 괴리되어 살았던 무한이기에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이뤄냈다. 마치 백지에 그림을 그린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주화입마를 겪지 않고 순탄하게 현재에 이를 수 있었다.
반면, 대개의 사람은 오욕칠정을 겪으며 세상과 자신을 반추하여 깨달음을 이뤄내고, 이를 통해 진경 이후의 수련을 이어나간다.
주화입마는 불완전한 깨달음에서 비롯되며, 이는 경지가 올라갈수록 위험 또한 높아간다.
한 호흡에 선인이 되었다가 다시 한 호흡에 마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혹시……?’
무한의 천목혈이 열리며 도왕을 주시하였다.
도왕이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말에 무한의 의식이 대응하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무한이 도왕의 물음에 답했다.
“내 길도 보이지 않는데 남의 길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남의 길을 봐야 내 길이 바른지 알 수 있지 않겠나?”
도왕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깥을 바라봤다.
시선이 닿은 곳은 무한을 따라온 알 수 없는 살기덩어리가 도사린 데였다.
도왕의 시선이 닿자 살기덩어리가 눈 녹듯 스르르 사라졌다.
다시 무한을 향한 도왕이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권왕을 내보낸 이유가 궁금해서 온 게냐?”
내보낸 거라고? 무한은 약간 어리둥절해 하였다.
“네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권왕이 도전해왔다. 싸우던 도중 우리는 화경을 넘어설 수 있었지. 싸움을 계속할 경우 결국 양패구상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제의했지. 따르는 문파를 데리고 천하방을 떠나라고.”
도왕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하전 광장을 살피는 것 같았으나, 의식의 눈은 성밖마을까지 내다보는 듯 깊은 시선이었다. 마치 마지막으로 자신의 영지를 돌아보는 제왕의 눈빛 같았다.
무한은 다른 의미로 놀랐다.
‘손우자의 농간이 아니었다고?’
도왕이 무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이었다.
“물론 손우자가 조정을 하기는 했다. 그 결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볼 수 있었지.”
“이제 명실공히 천하쌍패가 되었군요.”
“아니.”
도왕이 고개를 저었다.
“앞날이 어찌될지 나는 모른다.”
“무슨 소리입니까?”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내 길도 보이지 않는데 남의 길을 어찌 알 수 있냐고. 나는 네게 천하방을 넘길 생각이다.”
“……?”
“내가 구차하게 천하방주 자리에 연연할 거라 생각했나? 반쪽짜리지만 천하방을 유지한 건 네게 건네주기 위함이었다.”
뜻밖의 말에 무한은 도왕을 바라만 볼 뿐, 뭐라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기껏 권왕을 축출하고 도천부가 장악한 천하방을 자신에게 넘긴다고?
“네 입으로 천하방을 해체할 것이라 공언했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군.”
무한을 바라보는 도왕의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났으나 어딘가 모르게 공허했다.
도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읽을 수가 없었다. 천목혈로도 도왕의 의중이 잡히지 않았다.
“천하방…….”
도왕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천하방이 나를 잡아먹고, 내 아이들을 잡아먹었다. 이어 내 손자까지 죽이고 있지.”
그러더니 문득, 스치듯 물었다.
“동후를 맹인으로 만들고, 고영을 하옥시켰다지?”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으나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순간, 무한은 도왕의 경지가 불안정하게 다가왔던 이유를 분명하게 깨달았다.
‘인과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구나.’
인간으로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영역을 넘고자 하는 이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다만, 제가 그들보다 힘이 강했기에 그런 결과가 나왔을 뿐이지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자식이자, 나의 업이었다. 어쩌면 그들 덕분에 지금 성취를 이뤘을 수도 있지.”
“……?”
“내게 미혼고를 쓴 자는 성후였다. 강후는… 그 어리석은 놈은 동생의 손아귀에 놀아났을 뿐이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천대주를 시켜 고강후의 목숨을 거둔 이가 도왕 자신이었으니까.
하늘이 도(道)를 내릴 때는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고(苦)를 내려 시험한다고 했다. 도왕은 골육상잔의 고를 겪은 셈이다.
도왕이 품에서 금패를 꺼내 건넸다.
“천하금령(天下金鈴)이다.”
천하금령은 방주의 여러 영패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방주 자체를 상징하는 신물이다.
“사흘 후 천하대전에서 방주 양위를 공포할 것이다.”
도왕이 금패를 건네고 말없이 돌아섰다.
무한은 광장에 서서 천하전 높은 계단을 오르는 도왕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
천하전을 나와 검천부로 돌아오는데 다시 살기덩어리가 따라왔다.
검천부 앞 광장 패방에 이르렀을 때 살기덩어리가 짙어지더니 무한의 앞을 막아섰다.
마치 짙은 안개와도 같은 살기덩어리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의식을 할 수만 있을 뿐이다.
‘사술?’
무한은 천하전에서 도왕이 살기덩어리 쪽을 응시하자 사라졌던 걸 봤다. 도왕은 살기덩어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오로지 무공에 전념했던 무한은 사술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무한이 잠시 생각하다 앞을 막은 살기덩어리 속으로 들어갔다.
‘……!’
음산한 기운이 주위를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주위 풍경이 바뀐 건 없지만 마음이 위축되고 순식간에 삶의 의지가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무한은 경천심결을 통해 전신에 기운이 퍼져 있다. 그러니 어지간한 살기에 침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무한을 감싼 살기덩어리는 기와는 상관없었다.
무한은 한없이 공허해지는 가운데 머릿속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를 들었다.
놀랍게도 그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 죽어라… 죽음만이 내게 평안을 줄 것이다……
축 처진 육신과 실낱같은 의지로 생을 이어간다는 게 한없이 고통스럽고 허무하다는 생각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택하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무한은 몰랐지만 살기덩어리는 열 명의 좌도사들이 이뤄낸 의념살기였다.
보통 사람의 경우 의념살기에 당하면 생의 의지를 잃고 자살을 선택한다. 그야말로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완벽한 암살이다.
천리를 어기는 의념살기를 시전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또한, 실패할 경우 시전자들이 죽을 수 있다.
살기덩어리에 휩싸인 무한이 어느 순간 주저앉아 좌정했다.
의념살기는 강력했으나 무한의 의지 또한 굳건했다.
무한의 의식은 마천주와 겨루다 들어간 무한한 어둠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주위를 의식하자 자신을 에워싼 살기덩어리를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살기덩어리의 한쪽 끝에 길고 가느다란 선이 보였다.
무한의 의식이 어딘가로 이어진 선을 따라갔다.
어둡고 침침한 공간.
한가운데 희미한 빛이 내리는데 바닥에는 팔괘가 그려져 있었다.
팔괘 한가운데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고 주위로 여덟 명이 좌정하고 있었다.
‘음양팔괘…….’
무한의 의식은 가운데 두 사람이 음양을 대표하고 주위 여덟 명이 각각 팔괘의 한 괘를 대표한다는 걸 인지하였다.
무한의 의식이 어둠의 공간을 비집고 팔괘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팔괘 한가운데 음양을 대표하던 두 사람의 눈이 확, 뜨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벌어진 두 눈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이어 주위 각 괘를 대표하던 이들이 입에서 피분수를 뿜으며 뒤로 넘어갔다.
동시에 무한의 의식이 현실로 소환되었다.
***
“대체 무슨 속셈일까?”
소소가 탁자에 놓인 천하금령에 노려보며 잔뜩 미간을 찌푸리곤 연신 중얼거렸다.
“…….”
무한 역시 도왕의 의중을 생각하는 중이다.
천하방주의 자리를 자신에게 넘길 줄은 몰랐다.
아니, 천하방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고, 그랬기에 제대로 양위가 이뤄질지도 의문이다.
“천하방은 이미 도천부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어. 군사부는 손우자의 수족이나 다름없지. 천하금령이 있어봐야 허수아비 방주에 불과하다고. 책임은 지고 실권은 없는…… 그런 걸 노린 걸까?”
소소가 중얼거리며 도왕의 의도를 분석하였다.
문파 연합으로 이뤄진 천하방에서 방주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물론 방주의 명을 직접 수행하는 집행기관이 있기는 했으나 각 문파가 독자적으로 움직였기에 그 힘은 그리 크지 않았다.
권왕이 따로 떨어져 나간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천하방은 문파 연합 성격이 강한 데 비해 정천맹은 맹주와 집행기관 위주로 체계를 잡았다. 권왕은 강력한 맹주였다.
무한은 소소의 분석을 들으며 다른 생각을 했다.
‘나보고 고성후와 손우자를 제거하라는 뜻이구나.’
자신과 손우자가 공존할 수 없다는 걸 아는 도왕이다. 고성후는 자신에게 미혼고를 쓰고, 형 고강후에게 누명을 씌웠다.
그러나 이미 한 차례 자식의 목숨을 거둔 바 있는 도왕으로서는 골육상잔의 고를 다시 겪고 싶지 않았으니 무한에게 넘긴 것이다.
그 둘을 제거하면 천하방에 남는 게 뭘까?
아마 남는 문파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방이 해체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천하방 해체는 무한이 바라던 바다. 하지만 마천과 흑천이 중원을 넘보는 지금 이 시기는 아니다.
소소가 결론을 내렸다.
“아무튼 좋은 의도는 아니야. 너를 사지로 보낸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