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무한이 손을 내밀자 청석에 꽂혀 있던 경천신검이 날아가 손에 잡혔다.
수레의 앞을 막아선 무한이 검을 세웠다.
달려드는 참마대를 보며 무한이 나직이 읊조렸다.
“협으로 의를 세우고…….”
쿠쿵!
경천신검이 진동을 하자 하늘이 울렸다.
심상치 않은 조짐에 참마대가 주춤하였다.
나직이 읊조리는 말이었지만 집법당은 물론 바깥에 있는 이들까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한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도 모두 안다. 이는 검신 심양조가 천하방을 창설하며 했던 말이다.
“의로써 세상을 구한다!”
쿠쿠쿠!
경천신검에서 하얀 검강이 치솟아 하늘로 솟구쳤다.
“아앗!”
참마대가 주춤 물러섰다.
절대검강!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지만 모두의 머릿속에서 한결같은 생각이 스쳤다.
저건, 막을 수 없다!
무한이 마지막 말을 읊조렸다.
“이로써 천하방이 존재할 것이다!”
콰앙!
하늘로 치솟던 검강이 어느 순간 터졌다. 하얀 섬광이 주위를 덮는 것만 같았다.
순간 무한의 신형이 사라졌다.
아니, 순간적으로 수많은 무한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
“막아라!”
가첨이 도를 앞세워 무한을 향해 달려들며 참마대를 독려하였다.
무한은 가첨의 공격을 무시하고 스치듯 지나쳤다.
“엇!”
무한이 스쳐가는 순간 가첨이 황급히 도를 들어 막으려 했으나 눈앞이 화끈하더니 세상이 어둠으로 덮였다.
가첨이 어리둥절해하다 이어서 전해오는 눈을 파내는 듯한 고통에 머리통을 부여잡고 뒹굴었다.
“아아악!”
“크아, 내 눈! 눈이 안 보여!”
무한이 스쳐갈 때마다 참마대 무사들이 눈 주위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집법당 마당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을 이뤘다.
무한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참마대의 눈을 베어나갔다.
고동후가 놀라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데 어느 순간 무한이 앞에 섰다.
“너는 천하방 현판을 볼 자격이 없다!”
무한이 냉랭하게 내뱉고는 경천신검을 그었다.
스윽!
고동후 역시 진경의 강자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도를 휘둘러 막으려 했으나 무한의 일검에 눈이 베여 피눈물을 흘렸다.
순식간에 고동후와 서른 명 가량의 참마대가 맹인이 되어 땅바닥을 뒹굴었다.
고영과 가릉산은 아버지들이 자신들을 구하러 왔다가 장님이 되는 걸 보고 넋이 나갔다.
“…….”
변위초를 비롯해 바깥에서 한발 물러서서 지켜보던 이들이 경악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 눈 똑똑히 뜨고도 검이 어찌 움직이는지 보지도 못했다.
무한이 변위초를 향해 나직이 물었다.
“변 당주, 지금 천하방이 존재합니까?”
변위초는 모골이 송연하여 대답하지 못했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바로 맹인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과연 천하방을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변위초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나는 죽는 날까지 천하방 현판을 보고 싶네.”
무한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함께 지켜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함께 지켜가야 한다는 말에 변위초가 울컥하였다.
그러잖아도 천하방이 왜 이리 되었을까 스스로에게 묻던 변위초였다. 자신은 중립을 지킨다고 했으나 실은 외면하고 있었다고 은연중 자책하고 있었다.
고변장이 들어오면 냉정하게 방규에 따라 처리했다지만…… 사실 허울 좋은 변명에 불과했다.
현실은 강자는 마음대로 고변하고, 약자는 집법당 문턱을 넘지 못했다.
변위초는 자신이 이런 현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해왔음을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기울어가는 천하방을 개탄하고만 있었다.
‘함께 지켜간다… 그걸 잊었어.’
변위초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렀다.
***
기천부.
비록 봉쇄하였지만 천하사패의 일원으로 기천부의 뿌리는 깊었고, 천하방 곳곳에 이목이 있었다. 무한이 집법당에서 벌인 기행은 바로 강유에게도 전해졌다.
“협으로 의를 세우고, 의로써 세상을 구한다. 이로써 천하방이 존재할 것이다…….”
무한의 말이 강유의 가슴을 후벼 팠다. 알고는 있었지만 오래전 잊어버린, 그래서 그저 껍데기만 남아 있는 말이었다.
“나도 천하방 현판을 볼 자격이 없겠군.”
강유가 자조하듯 웃었다.
“그런 놈에게 무인의 길을 포기하라 했으니…….”
강유가 천기자를 찾아가 무한의 행보를 전했다.
천기자가 클클, 웃으며 강유에게 말했다.
“그래, 어찌할 셈이냐?”
“봉쇄를 풀겠습니다. 맹인이 되고 싶지는 않군요.”
늘 무심한 아들답지 않게 농담을 하자 천기자가 다시 한 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부딪혀 볼 때도 됐다. 손우자, 그 녀석이 내 꼴을 보고 어찌 나올지 보자.”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인 천기자다. 그래도 손우자는 천기자를 두려워하여 정천맹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도왕과 손우자가 서로 경원시하면서도 손을 잡고 있는 것 또한 천기자 때문이다. 두 사람에게 천기자는 가장 큰 위협이었다.
강유가 기천부 봉쇄를 풀고 귀영대를 소집하였다.
“결사조 소식은 들어왔는지요?”
귀영대 부대주 전무가 결사조를 이끌고 나간 자신의 형 전옥의 소식을 물었다.
강유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대주 전옥은 중상을 입고 요양 중이네. 나머지 대원들은…….”
강유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나마 비밀통로를 통해 지원조를 보낸 덕분에 죽기 일보직전의 전옥을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의 복수를 할 시간이 왔네. 귀영대를 완전무장 하고 봉쇄를 풀게.”
***
쾅!
고성후가 책상을 내리쳤다.
“뭐라? 동후가 눈 병신이 됐다고!”
우애가 깊은 형제는 아니지만 도천부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은 명색이 도천부주다.
형 고강후 밑에서 숨죽이고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무던히 참고 또 참았다. 드디어 도천부주의 자리에 올라 실권을 장악했는데…… 무한이 대놓고 도천부의 체면을 깔아뭉갰다.
“어린놈이…… 세상이 바뀐 걸 모르고 날뛰는구나!”
예전에는 다른 삼패를 따르는 문파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하지만 이제 대부분의 문파가 탈퇴하고 남아 있는 문파는 도천부를 지원하고 있다.
물론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은 문파들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도천부가 아니라 도천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무한의 행보를 이대로 두면 흔들릴 수 있다. 아직도 검신의 명성을 잊지 않은 늙은이들이 있으니까.
‘진작 제거했어야 했어.’
검신이 죽었을 때 손우자와 함께 강력하게 무한을 제거하자고 했는데, 고강후가 반대했었다.
결국 제 발목을 잡은 셈이지.
이제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고성후가 바짝 굳은 표정으로 눈치를 보고 있는 심복에게 말했다.
“혈염에게 일러라. 오늘 밤 그놈 머리를 보고 싶다고.”
***
손우자는 손에 쥔 보고서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심무한이 돌아오자 기천부가 봉쇄를 풀었다?’
둘이 내통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천기자와 무한이 손을 잡는 건 그로써는 달가운 상황이 아니다.
강유가 후견인 노릇을 대충 할 때 의심했어야 했는데…….
손우자가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몸은 하나인데 신경 써야할 건 너무 많았다. 마천도, 흑천도, 그리고 이제는 천하방에 앉아서 정천맹까지 조율해야 한다.
손우자가 책상서랍을 열어 하얀 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사르르… 전신에 퍼져가는 쾌감이 피로를 씻어 내린다.
‘이번에 아예 끝장을 내야겠구나.’
천기자만 제거하면 천하방 따위야 어찌되든 상관없다. 심무한이 절대고수가 되었다지만, 무공이 뛰어나다 해서 죽지 않는 건 아니다.
애써 심무한이 별게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왠지 그놈의 눈빛이 자꾸 떠오른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이 또렷하다.
‘네놈도 같이 죽여주마.’
***
썰렁한 검천부에 소소와 둘뿐이다. 둘이 늦은 저녁을 먹었다.
건량을 삶은 부실한 상차림에 소소가 말했다.
“차라리 기천부로 가자.”
소소의 말에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 싸울 수는 없지.”
“싸운다고?”
“도천부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소소의 얼굴이 질렸다.
“도천부 무력대가 삼백이야. 네가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감당하기 어려워.”
“걱정하지 마. 혼자 싸우지는 않을 거야.”
“지원군이 있어?”
무한은 담담히 웃을 뿐이다.
얼마 전 그 이상의 마인도 죽였다. 다만 도천부 무력대는 목숨을 끊을 수 없다는 게 문제지.
“도왕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자기 아들과 손자를 해쳤는데 두고 보지 않겠지.”
“그러잖아도 만나러 갈 거야.”
무한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소소에게 말했다.
“문 꼭 걸어닫고 있어.”
“그런 말하니 네가 남편 같아.”
“하하. 형소가 들으면 화내겠다.”
형소가 소소를 좋아한다는 건 셋 모두 아는 사실이다. 무한의 말에 소소가 피식, 웃었다.
“그 녀석은 너무 어려. 가끔 보면 아직 어린애라고.”
둘이 같이 붙어 다니다 소소도 정이 들었는지 형소를 밀어내지 않는다.
“아무튼 다녀올게.”
‘어딘가 모르게 횅하네.’
내성은 천하사패와 천하방 주요기관이 몰려 있는 곳이다. 패천부와 수많은 문파가 정천맹으로 옮겨 가며 내성에서 근무하던 사람들도 대거 빠져나갔다.
무한이 어두운 밤길을 걸어 도왕의 거처로 걸어갔다.
“……!”
무한의 걸음을 멈췄다. 살기를 느낀 것이다.
상대는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대놓고 무한을 향해 쏘아왔다.
의아했다. 천하방 내성에서 암살을 시도한다고?
무한이 기운을 퍼뜨렸다. 놀랍게도 무한의 감지 능력으로도 적이 어디 은신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나가 아니야!’
적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만 느낄 수 있을 뿐 정확한 수조차 감지되지 않았다.
무한이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 걸음을 옮겼다.
살기가 무한을 따라왔다.
‘기묘하군.’
무한이 도왕의 거처 천하전에 이를 때까지 살기는 떠나지 않았다.
천하전에 이르자 지키고 있던 수문장이 막아섰다.
“방주께서는 저녁에 접견을 하지 않으십니다.”
무한이 서서 의식을 퍼뜨렸다.
살기덩어리는 주위에 흘러 다니고 있었고, 여전히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무한의 의식이 천하전에 닿았다.
그러자 안에서 노쇠한 도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여보내라.”
수문장이 마지못해 문을 열고 무한을 들여보냈다.
쿵!
무한이 들어서자마자 문이 굳게 닫혔다.
너른 광장 너머 천하전이 어둠 속에 서 있다. 광장 가 화로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
무한이 광장에 한 발 내딛자 천하전이 열리고 도왕이 걸어 나왔다.
예의 붉은 장포를 입은 도왕이 천하전 높은 계단에 서서 무한을 내려다보았다.
무한이 걸어서 광장을 가로지르자 도왕도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도왕의 시선은 무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광장 복판에서 마주쳤다.
“네가 절대지경에 들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군.”
도왕의 시선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절대지경에 든 건가?’
도왕의 전신에 흐르는 기운이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마천주와 겨뤄봤다지?”
여전히 무심한 어조임에도 한 조각 궁금함이 담겼다.
“천마지경이 어떤 경지인지 궁금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