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무한이 주위를 돌아봤다.
도천부가 대놓고 소소를 공격하다니…….
연합 무력대는 부상자가 많았기에 행군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무한은 먼저 달려왔는데, 조금만 늦었더라면 소소를 잃을 뻔했다.
무한의 싸늘한 시선에 고영이 쩔뚝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종아리에 박힌 검편과 허벅지에 박힌 비도 때문에 연신 비틀거렸다.
고영도 무한에 대해 전해 들은 바 있다. 사촌형 고우를 죽인 고수를 죽였다는 소식을 시작으로 무수한 전공이 들려왔다. 믿기지 않았지만, 마천주와도 겨뤘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런데 지금 날아오는 모습을 보니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다. 고영은 잔뜩 위축되어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무한은 소소에게 다가갔다. 소소는 여기저기 부상을 입고 지친 상태였다. 무한이 품에서 요상환을 꺼내 건네며 물었다.
“어찌된 일이야?”
소소가 이를 빠드득 갈며 말했다.
“도천부, 저놈들이 천하방을 장악하고 기천부를 공격하고 있어.”
“…….”
“이제 더 이상 천하방이라고 할 수 없어. 천하방이 아니라고.”
소소가 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우선 쉬고 있어.”
무한이 고영에게 몸을 돌렸다.
고영이 움찔하며 다시 한 발 물러섰다.
“나, 나를 어찌할 셈이냐.”
무한이 싸늘한 시선으로 고영을 바라봤다.
“내가 널 어찌할 거라 생각하지?”
“나, 나를 해치면 도천부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착각하고 있군. 네가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도왕의 직계다. 당연히…….”
고영의 말에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을 오해했군. 너는 해칠 가치도 없다는 뜻이었다.”
무한의 말에 고영이 어리둥절해하였다.
해칠 가치도 없다고? 그럼 나를 살려준다는 건가?
‘역시 도천부를 무시할 수 없는 거겠지.’
고영은 제 맘대로 해석했다.
“천하방의 방규에 형제를 해친 자는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지.”
“……!”
“너는 방규에 따라 처리될 것이다.”
고영은 의아해하였다.
방규에 따라 처리한다고? 그럼 일단 방까지 간다는 뜻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심 안도하며 무한을 노려봤다.
‘어리석은 놈! 방으로 돌아가면 참마대를 모두 동원하더라도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아니, 참마대주가 가만 둘 것 같으냐? 아들이 죽었는데?’
그때, 비도를 맞고 쓰러진 가릉산이 꿈틀하며 신음을 흘렸다.
고영이 돌아보니 가릉산은 죽지 않았다. 비도 손잡이 부분으로 등판이 찍혔을 뿐이다.
“이놈들을 살려준다고? 귀영대를 해쳤어. 죽여야 해”
소소가 반박하다 말고 무한의 눈을 봤다.
깊고 서늘한 눈에 차가운 분노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나를 믿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모두가 보는 앞에서.”
***
천하방 성밖마을로 마차 한 대가 수레를 달고 들어왔다.
수레에는 두 사람이 갇혀 있었다.
오가던 사람들이 궁금하여 다가가서 보고는 크게 놀랐다.
“저자는 고영 아닌가?”
“참마대주 아들도 있어.”
마차를 모는 이는 커다란 삿갓을 쓰고 있어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마차와 수레를 따라 몰려왔다.
마차를 몰고 있는 무한은 성밖마을 풍경을 보며 그사이 또 달라졌음을 느꼈다. 어딘가 모르게 쇠락한 기운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차에는 부상당한 소소가 타고 있었다.
이윽고 마차가 천하방 정문에 멈춰 섰다.
“멈춰라!”
수문장이 마차를 저지했다.
무한이 삿갓 끝을 들어 수문장을 보았다.
“검천부주?”
수문장이 뒤쪽 수레를 보고는 당혹해하였다.
도천부 고영과 가릉산이 피투성이가 되어 수레에 갇혀 있다.
“이게 무슨 일이오?”
“천하방 형제를 해친 자를 잡아왔소.”
수문장이 인상을 썼다.
지금 천하방은 도천부의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하방 형제라는 말이 생경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는 무한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차와 수레를 들이고 사람을 도천부로 보내 사실을 전했다.
무한은 천천히 마차를 몰고 집법당 앞까지 갔다.
집법당주 변위초는 침중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 맛이 썼다. 지금 천하방 상황만큼이나.
그는 어느 한편에도 기울지 않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왔다고 자부해왔다. 도천부와 패천부가 서로 알력을 빚을 때도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이제 패천부가 따르는 문파와 함께 정천맹으로 떨어져 나가고 도천부의 세상이 되었다.
“이제 그만둘 때가 된 모양이군.”
쓰디쓴 차를 삼킨 변위초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앞에는 추각주 선우휘와 판각주 허종성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그간 변위초와 함께 집법당을 지켜온 수뇌부다.
“이대로 물러나시면 안 됩니다. 집법당마저 도천부 손에 넘어가면…… 천하방은 끝장입니다.”
선우휘가 울분을 토로했다.
변위초가 선우휘를 향해 뜬금없이 물었다.
“자네는 아직도 여기가 천하방이라고 생각하나?”
“…….”
“천하방은 사라졌네. 어쩌면…….”
천하제일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 말일세.
변위초는 갑자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반평생을 몸 바친 천하방의 몰락에 공허함을 느낀 것이다.
“이리된 이상 험한 꼴 보기 전에 그만두는 게 낫지. 자네들은 어찌할 생각인가?”
변위초의 말에 허종성이 음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정할 수 없다면 집법당이 아니지요. 그간 당주 덕분에 소신을 지켜왔습니다만 앞으로는 그럴 자신이 없군요.”
같이 물러나겠다는 뜻이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선우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때, 무사 하나가 들어와 보고했다.
“검천부주가 죄인을 데려왔습니다.”
“……?”
세 사람의 시선이 무사에게 향했다.
“검천부주라니, 심 부주가 돌아왔단 말이냐?”
무사가 난감해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죄인이 도천부 고영 공자입니다.”
“뭐?”
세 사람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들은 곧바로 집법당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고영과 가릉산이 갇힌 수레가 서 있었다.
변위초를 보자 고영이 외쳤다.
“변 당주! 살려주시오. 저놈이… 저놈이 나를 죽이려 하고 있소!”
허벅지가 피투성이가 된 고영을 본 변위초가 미간을 찌푸리곤 수레 옆에 있는 무한에게 물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고영과 가릉산이 천하방 형제들을 해쳤기에 잡아왔습니다. 방규에 따라 처벌해주시지요.”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변위초는 어이가 없었다.
‘어디 딴 세상에 있다 왔나?’
천하방이 어찌 바뀌었는지 모른다는 말인가?
천하사패는 몰락하고 도천부가 지배하고 있다. 문패만 바꾸지 않았을 뿐 이제는 도천방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그런데 무너진 천하방의 방규를 집행해달라고?
아무리 방규가 있다 하더라도 힘이 우선이다. 고지식해도 정도가 있지…….
선우휘와 허종성도 기가 막힌다는 듯 무한과 고영을 번갈아 보았다.
무한이 변위초에게 고영의 죄상을 적은 고변장을 건넸다.
“고영은 사사로이 검천부 강소소를 가두고, 이를 구출하려는 귀영대 열 명을 해쳤습니다.”
변위초가 고변장을 읽고는 휙, 던져버렸다.
“처리할 수 없네.”
무한의 미간이 꿈틀하였다.
변위초가 냉랭하게 말했다.
“자네 왜 이러는 건가? 나보고 고영을 죽이라는 말인가?”
변위초의 행동에 선우휘와 허종성이 오히려 놀랐다. 평소 변위초와 사뭇 다른 태도였다.
변위초는 이미 물러날 생각이었다. 만일 고영을 죽이면 자신은 물론이고 선우휘와 허종성에게까지 화가 미친다.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 한 수하들을 죽일 수 없었다.
변위초의 얼굴에 분기가 어렸다. 막판에 비겁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신이 한심했고, 이런 상황을 만든 무한에게 화가 났다.
무한이 담담하게 물었다.
“여기가 천하방 아닙니까?”
“…….”
이어 뒤를 돌아봤다.
집법당 앞에 사람들이 몰려와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모두 천하방도 아닙니까?”
그러면서 고영을 가리켰다.
“이 자는 천하방 형제를 해쳤습니다. 그러면 방규에 따라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로만 보자면 맞다.
하지만 지금 이런 말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무한이 억지를 부린다고 여겼다.
도천부와 기천부가 대놓고 싸우고 있는데 방규 운운하다니…….
몇몇은 무한이 주화입마를 당한 게 아닐까? 의심의 눈초리로 살폈다.
절대고수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심마에 빠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게 무림의 속설이었으니까.
그때,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참마대다! 참마대가 온다.”
“고동후가 직접 오고 있어.”
그러지 않아도 아들을 보내놓고 소식이 없어 궁금해 하던 고동후가 고영이 잡혀 왔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비켜라!”
고동후가 외치기도 전에 서슬 퍼런 참마대의 기세에 사람들이 우르르 비켜섰다.
“참마대는 멈추시오!”
변위초가 돌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여기는 집법당이오! 무력대를 끌고 난입한다면 방규에 따라 처리하겠소!”
“뭐라? 변위초! 네가 죽고 싶은 게로구나!”
고동후가 맞고함을 치며 거침없이 집법당 문을 넘어섰다.
순간, 어디선가 검이 날아와 고동후의 앞에 꽂혔다.
쿠웅!
검 한 자루가 집법당 청석 바닥에 꽂혔을 뿐이건만 땅이 흔들렸다.
사람들이 놀라서 어리둥절해하는데 무한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하방에서 집법당을 무시하는 자가 있을 줄 몰랐군. 그렇다면 그 검도 무시할 건가?”
그제야 사람들이 검을 알아봤다.
“경천신검!”
“겅천신검이다!”
경천신검이 어떤 검인가.
검신 심양조는 한 자루 경천신검으로 천하방을 일으켰다. 그렇기에 경천신검은 천하방의 상징이기도 했다.
지금 무한은 경천신검을 내세워 천하방을 무시할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고동후가 무한을 노려보다 어이가 없다는 듯 큭큭, 웃었다.
“네가 미쳤구나! 감히 내 앞에 검을 꽂아!”
고동후가 벼락같이 검을 뽑아 경천신검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듯 내리찍었다.
쾅!
그저 검을 내리찍었을 뿐인데 폭음성이 터지고 고동후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무한이 검에 담아둔 경력이 터지며 오히려 고동후의 도가 부서졌다.
고동후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무한이 절대고수에 올랐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믿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사실이다.
‘이, 이럴 수가. 어찌 저 나이에…….’
놀라운 무위였으나 고동후는 물러설 수 없었다. 자칫하다 외아들을 잃을 수도 있다. 참마대를 보며 외쳤다.
“쳐라!”
역시 아들 가릉산이 잡혀 있는 참마대주 가첨도 같은 입장이었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지만 이미 다른 이의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은 지 오래다.
“고영 공자를 구출하라!”
가첨이 명을 내리자 참마대가 우르르 난입하였다.
무한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사람들은 억지를 부린다고 여겼으나 무한이 일부러 고영을 데려와 집법당에 세운 이유가 있었다.
방규를 내세워 사람들 마음속에 천하방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실망스럽게도 그간 중립적인 처신으로 신망을 받아왔던 변위초조차 자신의 책무를 저버렸다.
그리고 지금 도천부는 수많은 시선이 지켜보는 앞에서 거침없이 무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