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회의를 마치고 서로 갈 길을 가는데 전경목이 무한을 따라왔다.
“이번에도 구명지은을 얻었으니 어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전경목은 이제 무한을 극진히 대했다.
“제가 천하대전에 출두하기를 요청했을 때 와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걸로 이미 충분히 보상을 받았습니다.”
전경목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귀환하면 승룡대주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오. 아니, 천하방 섬서지부가 존재할지도 모르겠구려. 고향에 돌아가 무관을 열 생각이오. 혹 지나면 꼭 들러주시기 바라오.”
무한히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무관의 이름은 승룡무관이겠군요.”
“그 이름을 지키기 위해 죽은 이가 어디 한둘이오? 내가 어찌 감히 그 이름을 쓸 수 있겠소.”
“그래야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조약평을 떠올린 무한의 말에 전경목이 희미한 웃음으로 답하곤 예를 취하더니 몸을 돌려 멀어져갔다.
***
칼이 다리를 노리고 쓸어왔다.
소소는 귀영보를 펼치며 뒤로 돌아 검을 그었다.
서걱!
“크윽!”
도천부 무사는 팔을 베이자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주위에 아직도 네 명의 도천부 무사가 버티고 있다. 그들은 포위를 하고 소소의 앞길을 저지할 뿐이다.
소소는 마음이 급했다.
귀영대주 전옥이 죽음을 각오하고 길을 열어주었는데 십 리도 못 가서 발목이 잡혔다.
‘어쩌다 기천부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천하방에 귀환하자마자 소소는 도천부에 억류되었다.
천하방은 이미 예전의 천하방이 아니었다. 장로원은 해체되었고, 감찰단은 물론 집행부 등 모든 조직의 권한이 일시 중단되었다.
모든 것은 도왕이 주재하고 결정하였으며, 그 뒤에는 손우자가 있었다.
도천부에 연금된 상태에서 이 같은 상황을 들은 소소로서는 도무지 도왕과 손우자의 행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천부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아버지 강유는 기천부 장원을 폐쇄한 상태였다. 천기자의 절진 덕분에 아직 무너지지 않았으나 손우자가 직접 나서 파훼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천부 내부 사정은 알 수가 없었다.
‘비밀통로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너무 안이했다. 설마 기천부의 직계인 자신을 누가 어찌하랴 하는 생각에 정문으로 들어서다 무기를 빼앗기고 도천부 안가에 연금되어버렸다.
고강후가 죽은 뒤 도천부는 도왕의 둘째 고성후가 부주로 올라섰다. 고성후는 냉혹했다.
고강후의 남은 두 아들 고수와 고현이 돌연 실종되었으나 아무도 찾지 않았다. 소소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이 이미 죽었음을 확신했다. 도천부에서 고강후의 세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도천대는 방주의 직속 무력대로 편입되고 신악강이 여전히 대주를 맡았다.
강소소가 연금되어 있는 동안 고영이 찾아와서 매일 심문을 하였다.
“비밀통로가 어딨는지 너는 알고 있잖아. 대면 살려줄게.”
그러면서 소소를 음흉한 눈길로 쓸어보곤 했다.
소소는 도천부에서 자신을 살려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도왕은 천기자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천기자가 치매가 아니라는 건 손우자가 이미 파악했다. 그러나 운신을 하지 못하는 처지라는 것까지는 모른다. 그러니 함부로 굴지 못하고 있다.
누워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천기자가 거침없이 날뛰는 도왕과 손우자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소소가 연금되고 사흘이 될 무렵 귀영대 결사조가 구출을 하러 왔다.
귀영대주 전옥이 직접 나서서 길을 뚫어 소소를 구출하였다. 그러나 이미 폐쇄된 장원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었기에 성 밖으로 도주해야 했다.
소소와 귀영대 결사조는 도천부의 추격을 따돌리며 감숙으로 향했다. 서안이 본거지라는 걸 도천부도 알고 있으니 차선으로 무한에게 직접 향했다.
도천부 참마대가 쫓아왔다. 몇 날 며칠을 쫓기며 귀영대 결사조는 하나 둘 스러졌다.
마지막 남은 대주 전옥이 갈림길에서 말했다.
“여기까지인가 보군요. 아가씨, 반드시 살아 귀환하셔야 합니다.”
소소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전옥은 강경했다.
“기천부 장원의 진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전멸할 것입니다. 어서 가세요.”
전옥이 등을 떠밀었다.
소소는 눈물을 머금고 홀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매복이 깔려 있었다.
몇날 며칠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쫓긴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소소가 자신을 포위한 도천부 무사들을 노려보았다.
영악하게도 삼 장 거리에서 버티다 소소가 공격하면 그제야 저지한다.
‘살을 내주자.’
소소가 어금니를 콱, 깨물고 방금 팔을 베인 도천부 무사를 향해 귀신처럼 다가갔다.
“멈추시오!”
팔을 베인 무사가 슬쩍, 물러나고 양쪽에 있던 무사들이 협공을 하여 소소를 막으려 들었다.
순간, 소소가 허공으로 솟구쳐 몸을 돌리더니 귀영천리 신법을 극성으로 펼쳐 뒤에 남은 무사를 공격하였다.
무사 역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바로 도를 그어 소소를 막으려 들었다.
소소는 검을 내리찍어 무사의 도를 누르며 비수를 날렸다.
“크윽!”
“헉!”
소소와 무사의 입에서 동시에 고통스런 비명이 흘렀다.
무사의 가슴팍에 비수가 꽂혀 있었고, 소소는 무사의 도에 허벅지를 찍혔다.
‘하필이면….’
빠른 경신법이 아쉬운 판국에 다리를 다치다니.
소소는 바로 신법을 펼쳐 숲으로 뛰어들었으나 다리가 저려 절뚝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뒤로 남은 도천부 무사 셋이 맹렬히 추격하며 호각을 불었다.
정신없이 질주하여 숲을 벗어나자 개활지였다.
‘이런…….’
숲 옆으로 마차가 다닐 만한 관도가 지났다. 도주하려면 숲으로 가야 하는데 오히려 넓은 길로 나와 버린 것이다.
소소는 감숙 방향이라 짐작되는 곳으로 달렸다. 그러나 머지않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고영이 한 무리의 도천부 무사들과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소를 본 고영이 씨익, 웃었다.
“괜찮았어? 나의 토끼몰이 솜씨가 대단하지 않아?”
그런 고영을 본 소소의 두 눈에 시퍼런 독기가 흘렀다.
고영이 이 자리에 있다는 건 귀영대주 전옥이 죽었다는 뜻이다.
믿을 수 없었다. 전옥은 진경의 고수로 기천부 제일검이다. 고동후의 참마대가 예상보다 강력한 무력을 지녔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빠져나올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참마대의 추격을 막기 위해 뒤에 남았고, 참마대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건…… 전옥이 쓰러졌다는 뜻이다.
소소는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전옥은 여느 가신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천기자 때부터 기천부를 지켜왔기에 친삼촌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전 대주를 어찌했느냐?”
“흥! 그놈? 투항하면 알려주지.”
고영은 뭐가 그리 흐뭇한지 연신 미소를 띠었다.
“내가 말했지. 너는 내 손바닥 안에 있다고.”
그러면서 양손을 벌려 화해하자는 몸짓을 하였다.
“강소소,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이제 그만 하지?”
“미친 놈!”
기껏 선심을 썼는데 욕설이 돌아오자 고영의 인상이 굳었다.
“거기까지만 해라. 더 이상 반항하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강소소를 바라보는 고영의 눈빛이 음험하다.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걸 보니 네가 천무관 수재라는 걸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구나.”
소소는 고영의 말을 흘리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이십 명이 추격해왔는데 지금 남아 있는 자들은 여섯이다. 그 중 하나는 팔이 베였으니 정상 전력에서 제외한다면…… 다섯이다.
얄밉게도 고영은 직접 나서지 않는다. 수하들을 갈아 넣은 후 안전하게 과실을 따는 놈이다. 그러니 다섯을 해치우기 전까지 지켜만 볼 것이다.
아니, 넷인가?
다섯 중 하나가 고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가릉산이다. 참마대주의 아들로, 이놈 역시 막판까지 몰리지 않는 한 직접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나 혼자 죽을 수 없지. 같이 가자.’
소소는 죽음을 결심했다.
연이은 부상으로 이미 기진맥진한 상황이다. 추격자는 고영만이 아니다. 어차피 붙잡힌다면 고영과 동귀어진이라도 하는 게 낫다.
소소가 문득, 비웃었다.
“너는 천무관이 알아주는 둔재였지. 어떻게 출관했는지 늘 의문이었어. 도왕의 손자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쫓겨났을 걸?”
소소가 도발하자 고영의 눈꼬리가 쑤욱, 올라갔다.
“문향전에서는 돌머리 소리를 들었지 아마? 가릉산, 너도 알지? 아, 너도 돌머리였지. 둘이 막상막하였었어. 큭큭.”
소소가 말하다 말고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웃자 고영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실제로 그들은 문향전의 돌머리였다.
고영보다 가릉산이 먼저 벌컥, 외쳤다.
“저년이 죽고 싶은 게로구나!”
고영이 참마대 무사들에게 외쳤다.
“뭐하고 있나? 저년을 내 앞에 데려와 무릎 꿇려!”
무사 넷이 우르르 몰려나오는데 소소가 갑자기 땅을 박차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쉬쉭!
이어 비도가 날자 무사들이 산개하였다.
순간 소소가 고영을 향해 날아오며 외쳤다.
“이거나 받아라!”
퍽!
언제 쥐었는지 소소의 손에 반자 가량의 죽통이 들려 있었는데 퍽, 소리와 함께 황금빛 모래가 무사들을 덮쳤다.
고영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황급히 소매를 저었다.
“비황사(飛蝗砂)!”
소소가 지닌 최후의 암기였다.
황금빛 모래는 독성이 무척 강해 살을 파고들면 바로 중독된다.
고영은 돌머리였으나 아버지 고동후가 심혈을 기울여 무공을 가르치고 영약을 먹였기에 지닌 바 내공만은 높았다. 장력을 펼치며 호신강기를 일으키는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가릉산 역시 소소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바로 옆으로 비켜났다.
‘역시 거리가 멀었어.’
비황사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넓은 범위의 적에게 효과가 있는 암기였다. 무사들 때문에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어 도박을 했으나 아무래도 비황사의 이점을 살리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 다음 수도 예상해두었다.
소소가 자신의 애검을 고영에게 던졌다.
“흥! 이기어검이라도 하는 거냐?”
느릿하게 날아오는 검을 보며 고영이 도를 뽑았다.
콰직!
어느 순간 허공에서 검이 박살이 나며 파편이 흩어졌다. 소소가 검에 장치된 기관을 작동시켜 검을 부숴버린 것이다.
파파팟!
“어엇!”
고영이 도를 휘둘러 막았으나 파편을 모두 막지는 못했다. 도로 방비한 상체와 정강이까지는 막아냈으나 왼편 종아리에 파편이 박혔다.
“으윽!”
고영이 비틀하자 가릉산이 소소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여버리겠다!”
그때였다.
쉭!
어디선가 비도가 날아와 가릉산의 등에 박혔다.
“커흑!”
가릉산이 그대로 엎어졌다.
모두가 깜짝 놀라 비도가 날아온 쪽을 보았다.
무려 오십여 장 거리에서 누군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무한?’
익숙한 몸짓에 소소는 그만 다리가 풀렸다.
고영도 무한을 알아보았다.
“아…. 도, 도망… 아니 퇴각한다!”
말이 끝날 때는 이미 십여 장 달려 나간 뒤였다.
그러나 다시 비도가 날아왔다.
고영이 도를 들어 방비하였으나 소용없었다.
비도는 꿈틀꿈틀 살아있는 뱀처럼 날아와 고영의 허벅지를 물었다.
“크윽!”
그러지 않아도 소소의 파검에 종아리에 파편이 박혔는데 허벅지에 비수까지 꽂히자 고영이 중심을 잃고 나뒹굴었다.
그사이 무한이 와서 섰다.
무한이 싸늘한 눈빛으로 고영을 보았다.
“오랜만이다. 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