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혈귀와 마인들은 멈추지 않았다.
무한은 검으로 그들을 상대하였다.
대체 그들이 무엇을 위해 목숨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들은 손우자가 보낸 괴인들처럼 이지를 상실한 자들도 아니다. 포악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지만 표정 한구석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담겨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 아쉬움 등 온갖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그들이 무한만을 노리고 달려든다는 것이다. 무한을 보는 순간 백상인 일행은 물론이고 연합무력대를 쫓을 생각을 지워버린 듯했다.
‘이게 즉견추살령인가?’
그러나 죽어가는 건 혈귀와 마인들이었다.
챙!
서걱!
일검에 한 명씩 어김없이 쓰러져갔다. 사방에서 달려들며 검으로 찌르고 도로 베려 들었으나 그 어느 하나 무한의 몸에 닿지 못했다.
혈귀와 마인들을 베며 무한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갔다.
눈빛은 냉혹하게 빛나고 각성한 천목혈은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며 인성을 버려야 했다. 무한은 과거 수련을 하며 철목을 베듯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시신이 쌓이고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북쪽 길 입구에 서서 이를 보는 백상인 일행은 가슴이 서늘했다.
무인의 길을 걷는 그들도 이처럼 무시무시한 싸움을 보기는 처음이다.
수백 대 일의 싸움이었으나 전황은 압도적으로 무한의 우위였다.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덧없이 스러져가는 목숨이 중첩이 되자 기괴한 공포가 전장을 짓눌러왔다.
지금 이 전장에서 인간은 존엄한 존재가 아니었다.
무한의 살육을 보는 백상인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어떻게 저 중압감을 이겨내고 있는 거지?’
백상인 역시 혈전을 헤쳐 나오며 수많은 이를 죽였다. 살기 위해서 죽여야 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죽음에 대한 공포와 중압감을 느꼈다.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자괴감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니 저렇듯 한 자리에서 수많은 이를 죽이는 무한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지금 무한이 베는 건 상대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백상인의 예상과 달리 무한의 마음은 한없이 고요하였다. 무의식의 평정 상태였다.
삼도봉에서 깨달음을 얻고 생사경에 든 무한에게 삶과 죽음은 별다를 게 없었다. 지금의 무한은 아수라지옥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검에 찔려 쓰러져가는 자들이 짓는 악귀 같은 표정도 한순간일 뿐이다.
차가운 시신으로 땅바닥을 뒹구는 이들에게는 그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망자의 얼굴에는 희노애락이 걷히고 본연의 모습만 남아 있었다.
어느덧 날이 밝았다.
그리고…… 시산혈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전장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놀랍게도 무한의 전신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기괴하게 보이는 광경이었다.
마지막 혈귀가 쓰러지자 무한은 잠시 눈을 감았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였다. 그러곤 천천히 걸어왔다.
무한이 다가오자 백상인 일행이 주춤하였다.
무한이란 존재가 사신(死神)처럼 느껴진 것이다. 사신이 다가와 말했다.
“부상은 어떻습니까? 움직일 수 있습니까?”
방금 수백의 목숨을 거둔 이답지 않게 차분한 음성이었다. 그러니 더욱 괴물 같아 보였다.
“갑시다.”
사신이 바로 몸을 돌려 앞장서 걸었다.
***
북쪽 험로를 뚫은 연합무력대 본대도 악전고투한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수많은 시신을 남기고 수습도 못했다.
백상인이 아는 현무대원의 시신을 보고 멈추자 무한이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지금 이 전장에서는 누구나 공평해야 해.”
차분하지만 무척이나 생경스럽게 들렸다.
백상인은 맞는 말이라고 하면서도 내심 울컥하였다. 자기도 모르게 반발심이 들어 돌아보다 깊고 서늘한 무한의 눈과 마주쳤다.
‘아!’
눈앞에 있는 존재는 이제까지 알아왔던 무한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겨울산이 서 있는 듯했다.
그 산이 자신을 바라보며 살아서 걸으라고 한다.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잠시 일었던 반발심이 스러지고 백상인은 걸음을 옮겼다.
“서둘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비록 부상을 입었지만 경신법을 펼칠 수 있습니다.”
일행 중 한 명이 무한에게 말했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이미 싸움은 끝났습니다.”
저 앞에도 절대고수가 한 사람 있으니까요.
두 명의 절대고수가 한 자리에 나타난 이상 승패는 갈린 셈이다. 무한은 이미 기운을 퍼뜨려 싸움이 끝났음을 알고 있었다.
사실 삼량진에서 가장 길고 참혹했던 싸움은 혈귀와 마인을 상대한 자신의 살육전이었다.
잠시 후, 과연 무한의 말대로 저 멀리 북쪽 험로 입구 평원에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무한 일행이 험로 협곡을 나오자 몇몇 사람이 다가왔다.
군장 문우승이 백상인을 덥썩 안으며 반겼다.
“백 조장! 살아 돌아와 다행이네.”
장로 백승포의 아들을 사지로 보내놓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스스로 자원했고,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대원들을 잃었습니다.”
백상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문우승은 자신의 실책을 알아챘다. 여기서 귀중하지 않은 목숨은 없다. 자칫 위화감을 일으킬 뻔했다는 생각에 문우승이 안색을 고치고 다른 결사대원들에게 가서 똑같이 반겼다.
무한은 그런 문우승을 이해했다.
위계질서가 첩첩히 쌓인 천하방에서 무력대주에 이르는 건 실력으로만 되는 게 아니다. 문우승이 방금 보인 행동은 조직에 몸담은 자에게 배인 습(習)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왔나?”
고벽후와 멸마대 형제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연추산을 비롯한 멸마대 형제들은 격전을 치른 듯 피범벅이었으나 고벽후는 무한과 마찬가지로 멀쩡했다.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무한이 담담히 말했다.
고벽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듯 무한의 어깨를 짚고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철혈의 매라고 부르지만…… 사실 나는 창공을 나는 매가 부러웠네.”
무한의 시선이 창공을 향했다.
고벽후의 말에는 깊은 함의가 담겨 있었다. 무한이 고벽후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철혈의 매가 한낱 매를 부러워하였다니 이상하군요.”
고벽후가 입꼬리를 쓰윽, 올리며 말없이 웃었다.
살육전을 치른 무한이 마성에 물들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이다.
궁여직이 다가와 포권을 하였다.
“대주, 무사귀환 하셔서 다행입니다.”
“부대주의 작전이 들어맞았군요. 예상보다 많은 인원을 구했습니다.”
“두 분 절대고수 덕분이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작전도 통하지 않았을 겁니다.”
막적과 막흉이 피범벅 된 병기를 들고 나타났다.
막적은 부상을 입었는지 배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어제 초저녁에 참혼구참에게 내상을 입은 그가 싸움에 나서서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기는 했다.
“부주, 무사했구려.”
난주 무림의 대표 동사철도 무한의 귀환을 보고 황급히 달려왔다.
마천과의 접전에서 대승을 거둔 사람들은 밤을 꼬박 새운 격전에도 불구하고 눈빛이 살아 있었다.
무한이 살아남은 자들을 둘러보았다.
기묘한 무리였다. 연합무력대와 난주 흑백도, 마적 출신과 낭인들…… 출신은 모두 달랐지만 함께 싸웠기에 서로의 상처를 돌봐주고 있었다.
무한이 귀환하자 자연스레 수뇌부 모임 자리가 됐다.
고벽후가 수뇌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푹 쉬라고 하고 싶지만 상황이 급박하니 어쩌겠소. 연합무력대 구출은 성공했으니 이제 또 다음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소? 여러 세력이 모인 만큼 생각도 다를 터, 기탄없이 의견을 말해보시오.”
“우리는 주군을 찾아갈 것이오.”
막적이 말했다.
혈랑이 위리고성에 있는 걸 알았으니 찾아가겠다는 뜻이다. 수하가 부상당한 주군을 찾겠다니 말릴 수 없다.
동사철이 복잡한 시선으로 무한을 보며 물었다.
“천하방 무력대는 어찌할 생각이오. 먼저 방침을 정해야 우리도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소.”
무한이 문우승에게 물었다.
“다음 행보는 계획해 두셨소?”
“원래는 공동산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마천의 추격을 한숨 따돌렸으니 방으로 복귀하겠소.”
천하방이 쪼개졌으니 연합무력대에게 주어진 임무도 힘을 잃었다. 이 상황에서 통솔이 불가능하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난주무림이 공동산으로 가겠소.”
동사철이 말하면서 궁여직을 보았다. 낭인들의 대주는 무한이었으나 실질적으로 궁여직이 통솔하니 의사를 물어본 것이다.
궁여직은 다시 무한을 보았다.
“나는 연합무력대와 같이 방으로 갈 생각입니다.”
대체 천하방이 어찌되었는지 가서 확인해야 했다. 무한이 궁여직에게 말했다.
“대원들의 의사를 묻고 계속 합류하겠다면 난주무림과 함께 공동산으로 가는 게 좋겠소.”
그러면서 동사철에게 말했다.
“난주무림에도 책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사철은 궁여직의 작전을 직접 보고 참여도 했던 만큼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던 바입니다. 아무래도 표국을 하던 장사치인지라 이런 쪽으로 머리를 쓰는 건 부족하구려.”
“대주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궁여직이 무한을 주시하며 말했다. 강렬한 눈빛에는 언젠가는 다시 찾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다시 볼 겁니다.”
무한이 짤막하게 한마디 하자 궁여직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겠습니다.”
고벽후가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자 갈 길이 정해졌으니 정비가 된 곳부터 떠나기로 합시다.”
“고 대형은 어디로 가실 겁니까?”
고벽후가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세워 하늘을 가리켰다.
“고원을 순찰할까 한다.”
철혈의 매 노릇을 하겠다는 말에 무한이 빙그레 웃었다.
고벽후와 무한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대충 내심을 짐작한다. 굳이 말을 돌린 걸 보니 아마도 소마의 행적을 찾을 생각인 듯했다.
‘이 사람들 앞에서 소마와 손잡겠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
천주와 맞서고 있기는 하지만 소마 역시 마천의 사람이니까.
수뇌부 회의가 끝나고 이어 연합 무력대주들이 모였다.
“우리는 산서로 귀환하겠소.”
산서 무력대주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음을 통보하였다.
산서 무력대는 산서 정파가 주축이 되어 있는데 출신 문파 대부분이 정천맹으로 넘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섬서 승룡대주 전경목에게 향했다.
전경목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역시 귀환할 것이오.”
단호한 말에 무한은 그의 마음이 천하방에서 떠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천무행 작전으로 승룡대의 절반 이상을 잃었는데 이번에도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전경목으로서는 참담한 심정일 것이다.
문우승은 바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본방의 명도 없이 연합무력대를 해체한다는 부담이 컸던 것이다.
그러자 무한이 나섰다.
“그렇게 하시죠.”
무한이 매듭을 짓자 군장 문우승도 말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