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무한이 다시 비도를 날렸다.
쉬익!
비록 한 자루의 비도였지만 위력과 반향은 무척이나 컸다.
이번에는 단순히 한 사람을 겨냥한 게 아니었다. 내공과 무한의 정신이 비도에 실렸다.
비도는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달려오는 늑대들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순식간에 대여섯 명을 관통한 비도는 어둠 속 허공을 맴돌며 다음 먹잇감을 찾았다.
달려들던 무리들 사이에서 경고성이 터졌다.
“어검술이다!”
“절대고수가 숨어 있다!”
흉흉했던 기세도 주춤하였다.
그런데 뒤편에서 맹렬한 기운이 폭사되며 빠르게 다가왔다.
“멈추지 마라! 적은 한 놈뿐이다!”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호통소리와 함께 거구의 사내가 날아와 커다란 칼로 무한이 조종하는 비도를 후려쳤다.
쾅!
비도에 실린 무한의 기운과 사내의 경력이 부딪히며 폭음성이 일었다.
기운의 줄이 끊기며 비도가 땅에 떨어졌다.
먼 곳에서 날아와 작은 비도를 정확히 찍어 떨어뜨린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사내가 무한 쪽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냐! 숨어 있지 말고 나와서 나와 붙어보자!”
무한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사내가 인상을 썼다.
나이가 제법 든 고수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어리지 않은가.
사내의 시선이 무한의 뒤쪽을 향했다. 아무런 기운을 느낄 수 없자 무한에게 물었다.
“어린 나이에 대단한 경지군. 신분을 밝혀라.”
“내가 누군지 알고 싶으면 먼저 자신부터 밝혀야 하지 않나?”
“건방진 놈! 주둥아리를 찢어주지.”
사내가 돌연 앞으로 튀어나오며 도를 사선으로 내리쳤다. 거대한 체구답지 않게 무척이나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무한이 등 뒤의 검을 뽑아 아래서부터 위로 걷어내며 도의 진로를 살짝 비틀었다.
챙!
사내가 도를 감아 배를 가르려 들었다. 무한이 슬쩍 옆으로 미끄러지며 검을 뉘여 사내의 옆구리를 노렸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접전을 벌였다.
사내의 도법은 일가를 이룰 경지에 이르렀으나 이미 생사의 경지에 접어든 무한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중하게 대응했다.
사내에게는 도법 이전에 타고난 신력이 있었기에 종종 의외의 수를 펼쳐 무한을 놀라게 하였다.
몇 차례 접전을 하며 사내는 무한이 일부러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음을 알아챘다.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나이가 한참 어린 애송이에게 농락을 당하다니…….
“감히 나를 상대로 시간을 끄는 게냐!”
사내가 크게 고함을 지르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도에서 한 자 가량의 도강이 쑤욱, 밀려 나옴과 동시에 땅바닥을 쓸 듯이 회전하며 도강을 뿌렸다.
무한의 경천신검에서도 역시 한 자 가량의 검강이 솟았다.
콰쾅!
도강과 검강이 부딪히고, 사내는 일 장이나 뒤로 밀려났다. 사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쾌도를 펼치면 쾌검으로 맞받아치고, 도기를 쏘아내면 검기로, 도강을 날리면 검강으로 막는다.
이는 상대의 경지가 자신을 한참 초월한다는 뜻이다.
사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무한을 주시하다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네놈은?”
머릿속을 스쳐가는 한 인물.
천주와 겨뤘다는 천하제일인의 후계자는 마천도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내가 왜 진작 몰랐지?’
저 나이의 애송이가 단신으로 길을 막아섰을 때 바로 알아챘어야 했는데. 무한의 종적이 감숙에서 사라진 후 한동안 뜸하였기에 미처 연결 짓지 못했다.
무한은 검결지를 쥔 손으로 뒷짐을 지며 검을 늘어뜨린 자세로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사내가 도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네가 천주와 맞섰다는 심무한이로구나! 몰라봐서 미안하군.”
그러더니 왼손을 들어 손짓하였다.
돌격 진형을 갖추고 대기하고 있던 마천도 사이에서 네 인영이 솟구쳐 앞으로 나오더니 사내의 뒤로 늘어섰다.
사내가 굳은 얼굴로 무한을 향해 말했다.
“나는 우창이라 한다. 수하들이 혈혈마도라고 불러주지. 이 자들은 혈지, 아니 혈혈대의 사대혈도(四大血刀)다.”
“심무한이오.”
우창이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하자 무한 역시 자신을 밝혔다. 우창은 자신의 예상이 맞자 한층 굳은 얼굴로 말했다.
“천주가 네게 즉견추살령(卽見追殺令)을 내렸다.”
“……?”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마천도들은 너를 보면 죽는 순간까지도 쫓아야 한다. 다시 말해…… 나와 혈혈대 역시 모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를 죽일 것이다.”
무한이 약간 어이없어 하며 말했다.
“대원들이 내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오?”
“내가 직접 키운 혈귀들이다. 화경의 고수도 잡을 수 있지!”
무한이 탄식을 하였다.
“어찌하여 수많은 목숨을 희생시키려 하는 것이오?”
“광오하군.”
혈혈마도가 분노하였다.
전력을 기울여 추살하겠다는데 오히려 적의 목숨을 걱정하다니. 혈혈대는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다.
혈혈대는 마천 사대비지 혈지의 후신이다. 대원 한 명 한 명이 혈혈마도 자신이 직접 키운 혈귀들이다. 혈혈대만으로도 중원 대파와 겨룰 자신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우창으로서는 무한의 말에 격분하였다.
“제아무리 절대고수라 하더라도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쫓기면 결국은 죽는다. 무공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낫다고 하나, 육신은 여전히 인간이니까. 혈귀들! 들었나?”
그러자 어둠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챙! 챙! 챙!
가만 들어보니 주먹으로 칼의 넓은 옆면을 치는 소리였다.
우창이 입꼬리를 비틀며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너를 보고도 살아 돌아온 자는 천주에 의해 죽게 될 터. 그러나 운 좋게 너를 죽이기라도 하면 엄청난 포상이 따른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부로 너는 평생 쫓기며 살 것이다.”
즉견추살령의 뜻을 이해했다. 무한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천주가 자신 앞에 혈로를 깔아놓은 셈이다.
우창이 사대혈도에게 말했다.
“내가 먼저 저자와 겨뤄보겠다. 혹 내가 패하거든, 혈귀들을 이끌고 저자를 추살하라.”
“아닙니다. 저희가 먼저 합공해보겠습니다.”
사대혈도 역시 무한을 보았으니 즉견추살령의 굴레에 들었다. 죽이든 죽든,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나를 부끄럽게 할 것이냐?”
혈혈마도가 눈을 부릅뜨고 수하들의 요청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이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혈귀들에게도 명을 내렸다.
“오늘 우리는 절대고수를 잡는다!”
챙! 챙! 챙!
주먹으로 칼의 옆면을 치는 소리가 다시 한 번 요란하게 들렸다.
우창이 삼 장 거리로 다가와 무한과 마주하더니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살기를 끌어 올린 듯 두 눈이 시뻘건 빛으로 번뜩였다.
‘마공?’
무한이 미처 생각을 잇기도 전에 혈혈마도의 도가 허공을 갈랐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였다.
스스스.
칼이 먼저 닿고 소리가 뒤를 이었다.
파파팟!
거대한 체구가 무색하게 경신법 또한 뛰어났다. 무한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아지며 혈혈마도의 도에서 도강이 솟구쳤다.
콰콰콰콰!
허공에서 폭음성이 들리며 도강이 무한을 향해 짓쳐들었다.
무한의 경천신검이 검망을 형성하며 도강을 쳐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십여 초를 겨루고 서로의 위치를 바꿨다.
“받아라!”
시간을 끌면 불리하다 생각한 우창은 벼락처럼 무한의 옆을 스치며 순식간에 상중하 삼단을 베었다.
따따당!
무한이 검으로 도를 튕겨내며 스치듯 지나다 순간적으로 우창의 가슴과 복부를 찔렀다.
얼마나 빠른 움직임이었는지 우창이 감지했을 때 무한은 찌른 검을 회수하고 있었다.
“크윽!”
무한을 지나쳐 일 장이나 가서 선 우창이 비틀거리다 억지로 신형을 곧추세웠다.
내공 싸움에서도 초식과 빠르기 싸움에서도 그의 패배였다.
우창이 서서히 몸을 돌려 무한을 봤다.
‘졌다.’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거구가 흔들리고 있었다.
“완벽하군. 그게 대체 무슨 초식이냐?”
“심의삼재검, 찌르기.”
“크크크… 고작 삼재검 따위에 당하다니.”
자괴감이 들었는지 혈혈마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검법이 무슨 상관이겠소.”
무한의 담담한 말에 우창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우창의 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무한이 검을 세웠다. 저승으로 떠나는 우창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자 우창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고 동공이 풀렸다.
이어, 우창의 거구가 쿵, 하고 쓰러졌다.
그 순간 고함이 터졌다.
“쳐라!”
사대혈도가 외치며 일제히 무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혈혈대원들이 귀신처럼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들은 본래 혈지의 혈귀로 불렸다. 피에 굶주린 도귀들로 마천 내에서도 경원시하는 존재들이었다.
혈귀들이 붉게 물든 눈빛으로 살기를 뚝뚝, 흘리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무한은 그들과 어울릴 생각이 없었다.
이미 반각이 지났다.
휘리릭!
무한이 그대로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회전하며 날아갔다.
“크아아아!”
스스로 불러일으킨 살기에 취한 혈귀들이 괴성을 지르며 무한을 쫓았다.
그러나 한 번에 삼십여 장을 날아가는 무한을 따를 수는 없었다.
무한은 순식간에 혈귀들을 따돌리고 백상인 일행과 만나기로 한 지점에 당도했다.
“무한!”
저 멀리 서남쪽 길에서 달려오던 백상인이 무한을 보고는 외쳤다.
백상인 일행을 보는 무한의 눈빛이 서늘했다.
서른 명이 갔으나 돌아온 이는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백상인은 부상을 입었는지 제대로 경신법을 펼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의 무복은 계속된 혈전에 핏빛으로 물든 지 오래다. 묵은 피에 새로운 피가 더해졌다.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뒤를 바싹 쫓아오는 이들은 한번 부딪힌 바 있는 만마동 마인들이었다.
“먼저 가!”
무한이 백상인 일행을 보내고 그 자리에 섰다.
무한을 따라온 혈지의 혈귀들과 만마동 마인들이 무한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였다. 기필코 무한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듯 맹렬한 기세였다.
‘어쩔 수 없구나.’
무한이 내심 탄식하였다.
수많은 목숨을 거둬야 하는 마음이 무거웠다.
- 불인(不仁)의 길이다!
할아버지 심양조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할아버지 역시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겪었던 것이리라.
무한이 경천신검을 세우고 뇌전이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콰지직!
검면에서 일어난 파르스름한 뇌전의 기운은 무한의 내공에 갇혀 분출하지 못하고 축적되어 갔다.
“죽어랏!”
“크크크…….”
혈귀와 마인들이 무한을 덮치는 순간, 갇혔던 뇌전의 기운이 방출되며 눈부신 섬광이 터졌다.
동시에 검세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하늘에서 천둥이라도 치듯 쿠쿠쿵!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천십이식 최후의 절초 경천격을 제대로 펼치기는 처음이다. 거기에 뇌전의 기운을 더하자 위력은 배가되었다.
“크아악!”
사방에서 괴기스러운 비명이 터졌다.
뇌전의 기운에 관통된 자, 경천격 검세에 휘말려 팔다리를 잃은 자…… 수십 명이 한꺼번에 쓸려나가고 십여 장 주위가 초토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