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91화 (191/250)

191화

문우승은 군장임에도 군막조차 설치하지 못하고 커다란 나무 아래 야숙을 하고 있었다.

“검천부주 아니신가?”

무한이 나타나자 내심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난주 무림이 지원을 올 겁니다. 대주들을 모아주시겠습니까?”

무한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원군이 온다는 희소식에 대주들이 하나둘 급히 달려왔다.

그들도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걸 절감하고 있었다. 이제는 선택을 할 시점이다.

“검천부주!”

무한을 본 대주들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어렸다. 승룡대주 전경목은 눈물을 글썽거리기까지 했다.

무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좋지 않은 소식을 들을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약평이…… 갔네. 며칠 전 싸움에서…….”

전경목이 말을 잇지 못했다.

조약평은 천무행에서 함께 악전고투를 했던 승룡일조장이다. 얼마 전에 다시 만났을 때 반갑다고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선연하다.

무력대 일조장은 부대주 다음으로 무위가 뛰어나니 서열 삼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조약평이 죽다니…….

“부상당한 조원들을 피신시키고 홀로 적을 막다가 전사했네.”

무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약평이 죽임을 당했지만 그전에 그가 죽인 마천도 또한 수없이 많을 것이다.

누군가를 죽이려는 자는 자신의 죽음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아는 이의 죽음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전쟁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었다. 누가 죽고 사느냐만 남아 있을 뿐.

다른 대주들도 숙연한 분위기였다. 그들 역시 대원들을 일할 이상 잃었다. 살아 돌아간다면 누군가에게 죽음을 전해야 하는 건 그들의 몫이다. 그러니 전경목의 심정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조 일조장이 원하는 바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서 돌아가는 것일 겁니다.”

무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무력대주들조차 이렇듯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상황까지 왔다면 일반 대원들은 더할 것이다. 연합무력대에 필요한 건 사기였다.

“난주 무림이 지원하고자 오고 있습니다. 새벽에 당도하면 연락을 보내올 겁니다. 그러면 곧바로 포위망을 무너뜨리고 나가야 합니다.”

“아!”

누군가는 안도의 탄성을 지르고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의적인 표정을 한 이가 물었다.

“몇이나 오는 게요?”

그는 지원대가 난주 무림이라는 말에 맥이 빠진 듯했다.

천하방 정예 무력대들도 고전하고 있는데 일반 무인들이 와봐야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표정들이었다.

“삼백 명입니다.”

“아…….”

이번에는 절망 섞인 탄식을 흘렸다. 다른 이들도 말문을 닫았다.

지금 남아 있는 오백 명에 삼백 명을 더해도 천 명이 안 된다. 그러나 세 길을 틀어막은 마천의 병력은 일천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백 명이라면…… 지금 세 길을 에워싼 마천도들은 헤아릴 수도 없소. 혈지와 만마곡이 선봉에 서서 공격하고 있지만 그 뒤를 마천 본산의 무력대가 받치고 있소.”

그러자 전경목이 나섰다.

“그렇다고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지 않소! 난주 무림에서 동아줄을 드리워준다는데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이오?”

“그게 썩은 동아줄이라면 차라리 여기서 방어를 강화하고 본방 지원군을 기다리는 게 나을 수도 있소.”

“더는 못 버티는 걸 알잖소!”

대주들 간에 설전이 벌어졌다.

“모두 조용하시오! 내가 아직은 군장이오!”

문우승이 버럭, 고함을 질러 대주들을 제지하였다. 그러곤 무한을 향해 물었다.

“혹, 작전계획은 있소?”

무한이 궁여직의 계획을 들려주었다.

두 곳의 길을 평소와 같이 방어하는 척하며 남은 대원들이 한 곳을 신속하게 뚫는다는 말에 모두가 공감을 하면서도 우려하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누군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 판국에 누가 허장성세 역할을 맡겠소? 사지로 가는 임무 아니오?”

평소라면 무력대주 입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약한 소리가 나왔다.

무력대는 작전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그런데 마천에게 계속 쫓기고 고립된 채 싸우다 보니 의지가 꺾인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요? 대원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이란 말이오?”

“방이 둘로 쪼개졌소. 그런데 무슨 명분으로 희생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이오?”

두 사람이 언쟁을 하는 걸 보고 무한이 나서서 말했다.

“자원을 받기로 하지요. 저도 지원하겠습니다.”

“안 되오!”

전경목이 반대했다.

“부주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소. 부주는 천하방의…… 마지막 보루요.”

모두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사실 모두가 뭐가 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다.

출정을 나왔는데 방이 쪼개지다니……. 게다가 계속되는 접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천하방에 무슨 변고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검천부주까지 잘못된다면, 방은 그야말로 끝장날 것이오.”

무한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연합무력대를 찾으면 천하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이들도 모르다니…….

“본방과 연락이 안 됩니까?”

무한이 묻자 대주들이 문우승을 쳐다봤다.

문우승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본 군장이 실수를 했소. 난주에서 퇴각할 당시 군사가 먼저 도주하였지 않소?”

전쟁을 부추기던 족제비 군사가 퇴각할 때 가장 먼저 사라져버렸다.

무한이 남궁우를 시켜 잡아서 문우승에게 넘기라고 했는데?

“무력대 기강을 세우기 위해 진영 이탈로 목을 쳤소.”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전서구나 전서응 등 본방과의 비상연락망 수단을 족제비 군사가 독점하고 있었다. 족제비 군사에게 묻지도 않고 목을 치는 바람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전령을 보내긴 했는데 무사히 방에 도착했는지 모르겠소.”

사실 본방의 소식은 뒷전이었다. 잠깐 눈 붙이고 일어나면 바로 싸워야 했다. 쫓고 쫓기며 계속되는 접전에 다른 것들은 돌볼 겨를도 없었다.

무한이 전경목에게 말했다.

“천하방이 해체된 건 아닙니다. 천하방의 이름으로 출정 나왔으니 아직은 천하방 소속이지요. 검천부 또한 천하방의 일원으로 한 형제입니다. 위기는 함께 겪어야 진정한 형제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서 제 한 몸 건사하겠다고 빠진다면 그야말로 천하방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짝! 짝! 짝!

문우승이 박수를 치자 대주들이 따라서 박수로 합의를 하였다.

“대주들은 돌아가서 후방 방어를 할 대원들을 보내주시오. 그리고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시오. 새벽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소.”

잠시 후, 후방 방어를 위한 결사대가 속속 도착하였다. 그중에는 백상인도 있었다.

어느 정도 모이자 무한이 앞으로 나섰다.

둘러보니 대략 서른 명가량 모였다. 자원 형식을 취했으니 그 정도 모인 것도 이 상황에서는 대단했다.

“무슨 임무인지는 알 것이오. 형제들이 피로써 길을 뚫는 동안 우리는 뒤를 치려는 적을 막아야 하오.”

모두의 얼굴에 비장함이 흘렀다.

아무리 절대고수가 가세한다 해도 인간의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래서 중과부적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무한은 살아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들은 죽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 백상인이 말했다.

“이거 길을 뚫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어쩌지? 우리는 연극만 하면 되잖아.”

“그렇지!”

분위기를 바꾸려는 의도를 누군가 맞장구쳐줬다.

무한이 백상인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연극이라면 한번 해봤지.”

천무행에서 광포의 광풍대를 상대했을 때가 떠올랐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어둠 속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일었다.

궁여직은 지형이 험악해서 마천도들의 수가 가장 적게 배치될 수밖에 없는 북쪽 길을 탈출로로 택했다.

버리고 가는 길을 방어하고 있던 무력대원들이 은밀히 빠져나왔다.

그 빈자리를 무한과 결사대가 막아야 한다.

서남쪽 길에 결사대가 들어가고 동쪽 길에는 무한이 홀로 나섰다.

마천은 공동산으로 가는 동쪽 길에 가장 많은 인원을 배치했다. 그래서 일부러 가장 많은 적이 있는 곳을 택했다.

백상인은 가장 치열했던 전장으로 홀로 걸어가는 무한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너는 이미 천하제일인이야.’

무한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지자 백상인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의 전장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마천의 진영 뒤쪽에 화광이 충천하였다.

“……?”

마천 진영 세 곳이 모두 후미를 공격받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만한 인원이 없을 텐데? 하는 생각부터 스쳤다.

화공은 미리 듣지 못했는데 궁여직이 작전에 변화를 준 모양이다.

마천 진영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뒤쪽으로 병력이 몰려가고 잠시 함성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무한이 돌아보니 백상인 등 결사대가 간 서남쪽 길이나 연합무력대 본대가 간 북쪽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천의 입장이라면 당황스럽겠군.’

적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데 이쪽에서 몰려나가면 이번에는 자신들이 협공당하는 셈이 된다.

“신호탄이 올라올 때가 됐는데?”

궁여직은 최대한 적을 끌어낼 생각인 듯했다. 예상보다 한참 뒤에야 신호탄이 올랐다.

적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서였는지, 구할 수 있는 신호탄이 부족했는지 새벽하늘에 터진 신호탄은 색이 각각 달랐다.

‘일각!’

이 자리에서 일각만 버티면 된다.

그리고 결사대와 합류하여 북쪽 길 입구를 틀어막고 이각!

그사이 연합무력대가 혈로를 뚫고 난주 무림이 후방에서 길을 터주는 작전이다.

궁여직이 험로를 택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고벽후를 앞세워 강력하게 무력으로 압도하면 숨을 곳이 많은 북쪽 길이기에 마천 진영의 이탈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 도주하는 적은 쫓지 말라고 하십시오. 승리가 아니라 탈출이 목표입니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라! 그게 궁여직이 요구한 바였고, 문우승을 통해 모두에게 전달했다.

무한이 좁은 협곡 길에 깔린 새벽어둠을 주시하였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척후를 먼저 보낸 것이다.

무한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어 커다란 비명이 터졌다.

“크아악!”

발목이 잘린 척후 두 명이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질렀다.

이를 보는 무한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대명제만 통하는 전장이다.

척후가 매복에 걸렸다고 판단했는지 마천에서도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다.

무한이 서남쪽 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게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이 들렸다.

‘저쪽은 본대가 밀고 들어오는가 보군.’

그렇다면 서른 명으로는 역부족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이 길이 열리면 북쪽으로 간 연합무력대의 후미가 잡힌다.

‘상인아, 조금만 버텨라!’

그저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다.

그때 북쪽 길에서 신호탄이 솟았다. 마천의 신호탄이었다. 그러자 앞쪽에 부산한 움직임이 일었다.

‘마천도 연합무력대가 어찌 나올지 예상하고 준비를 했구나.’

신호탄의 의미는 분명했다.

- 천하방이 이쪽으로 탈출하니 후미를 쳐라!

이제부터 무한과 결사대의 역할이 중요하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어둠 속에서 늑대처럼 다가오는 인영들이 보였다. 그중 몇이 아직까지 신음성을 흘리고 있는 척후를 살펴보고는 주위를 경계하였다.

쉬쉭!

무한의 비도가 날았다.

컥!

짧은 비명과 함께 세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동시에 적도 매복이 극히 소수라는 걸 알아챘다.

“쳐라!”

누군가 외치자 어둠 속에 늑대처럼 웅크리고 있던 마천도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켜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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