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무한은 곤륜산에서 그간 얻었던 무수한 심득을 정제하였다.
쳐내고 쳐내고 쳐내다보니 어느 순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 무수한 느낌과 얻음이 실제로는 지나가는 비바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텅 빈 머릿속에 다시 들어온 심득은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그동안 풍운조화공이나 산수진결, 조화지도 등을 익히며 산과 강, 천지자연의 조화 등 천하만물에 관해 얻은 깨달음은 많았다.
또한, 천심공을 익혀 앞에 앉은 이의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짚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충분히 자연과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의 본바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걸 비바람 치는 산봉우리에서 깨달았다.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아는 건 지금 날씨가 어떤지를 아는 술수에 불과했다.
동시에 무한은 자신의 본바탕을 얼핏 보았다.
너무나 비인간적인 자신의 본바탕에 크게 놀라야 했다.
운무가 걷히면 본래의 광경이 드러난다. 비바람 불고 해가 뜨고 져도 여전한, 본래의 그 광경 또한 본바탕이 아니었다.
자신을 잘 알고 있다 여겼는데 그게 아님을 깨닫자 수많은 인간 군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대부분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쓸려 살아간다. 심지어 수행을 한 도사나 무의 극의에 다다른 고수조차 그랬다.
살수 운객처럼 감정과 생각을 잃고, 특이하게 본바탕으로 살아가는 이도 있었다.
보고 듣고 느끼지 않은 걸 안다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오도처럼 본바탕에 다다른 자를 만났던 건 그야말로 기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한은 곤륜산에서 자신의 본바탕을 보고 가야 할 길을 깨달았다.
그랬기에 마천주가 패마에서 혼마로 바뀌었을 뿐, 본질을 벗어던진 탈마의 경지를 못 벗어났음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천마지경은 하늘과 마가 하나 되는 신마합일(神魔合一)의 경지!
마천주는 딱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신마합일을 통해 거듭나야 하는데… 마천주의 본색, 본바탕 이를 잡고 있다.
마천주는 권력을 쥐기 위해 혈족을 암계에 빠뜨려 죽이고, 수많은 이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넣고도 이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자였다.
무한이 이런 생각을 하며 상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한쪽에서 버럭, 고함이 터졌다.
“거, 그만 입 닥치고 밥이나 먹지?”
천산파를 숭상하듯 떠벌리는 상인들의 수다가 이어지자 듣기 싫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 곳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중 딱 봐도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상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상인들은 물론 다른 이들까지 입을 다물자 반점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험상궂은 사내 일행이 식사를 마치고 반점을 나갔다.
곧 구석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챙이 넓은 가죽모자에 피풍의를 걸치더니 슬그머니 일어나 사내 일행을 따라갔다.
무한이 가볍게 한숨을 쉬곤 일어나 그들을 따라갔다.
어느새 밤이었다.
험상궂은 사내들은 목적지가 있는지 바삐 서둘러 길을 갔다.
마을을 벗어나 잡풀이 있는 길로 접어드는 그때, 뒤따르던 이들이 사내들을 멈춰 세웠다.
“이보게, 잠시 멈추게.”
뒤따르던 이들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사내들이 아예 경신법을 펼쳤다.
쫓던 두 사람 중 키가 큰 자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어두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이 밤에 길을 나서야 하다니… 그 고달픈 목숨을 내게 맡기는 게 어떠한가~.”
동시에 두 사람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앞선 험상궂은 패거리보다 훨씬 빠른 신법이었다.
무한은 무명신법을 펼치며 그들이 하는 양을 보았다.
험상궂은 사내 패거리는 두 사람을 떨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어느 순간 뒤로 돌아서 병장기를 뽑았다.
세 자루의 박도가 겨누는데도 쫓아온 두 사람은 도를 뽑지 않고 쳐다만 봤다.
험상궂은 사내가 외쳤다.
“왜 쫓아온 것이냐?”
“네놈이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밥맛이 떨어졌잖아~.”
키 큰 사내가 여전히 흥얼거렸다.
“흥! 네놈, 마천도 맞지?”
험상궂은 사내가 눈알을 부라리며 박도를 흔들었다.
“흐응. 마적이 흑도가 되고, 마천이 천산이 되고~ 세상이 다 그런 거지.”
키 큰 자가 조롱하듯 흥얼거리자 험상궂은 사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헛소리 마라. 마적이 아니라 고원의 사내로 부끄럼 없이 살았다!”
“정마~알?”
험상궂은 사내 옆에 있던 다부진 체구의 사내가 말했다.
“그만하면 됐소. 우리가 당신들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아오. 원하는 게 뭐요?”
그제야 키 큰 사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입문! 초달삼살(草達三殺)로 불리던 너희에게 기회를 주겠다. 천산파에 입문해라.”
초달삼살 막적, 막부, 막흉은 혈랑대 휘하의 마적이었다.
“으음, 우리를 알고 노렸구나!”
험상궂은 사내 막흉이 고함을 치고 달려 나가려는 순간 첫째 막적이 막았다.
“우리 같은 잡졸이 뭐라고 마천 참혼대의 고수가 둘이나 왔단 말이오.”
이번 침공으로 마천의 사대비지가 세간에 알려졌다.
그중 참혼애는 살수로 키워진 고수들로, 한결같이 비정하기 짝이 없어 단기간에 공포의 존재로 부상했다.
참혼애는 마천이 천산으로 개칭한 후 참혼대로 바뀌었지만 개개인은 예전처럼 일참(一斬), 이참(二斬) 이런 식으로 부른다고 했다.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던 키 큰 자, 구참이 돌연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그냥 죽여 버리면 좋을 일을! 왜 이러는 건지 나도 모른다니. 그저 노랫가락이나 흥얼거릴 수밖에~”
마지막에 다시 흥얼거리니 그야말로 가지고 노는 느낌이었다.
구참 옆에 있던 사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기회는 한 번이다. 혈랑과 난주 흑도가 있는 곳을 밝히고 투항해라. 그러면 천마께서 너희를 귀히 쓸 것이다.”
막적이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하. 내가 아니라 정보가 필요했군. 참혼대가 뻔질나게 감숙을 돌아다니고도 아직 주군이 어디 계신지도 몰랐단 말이냐?”
그러면서 옆에 있는 동생들을 봤다.
여기서 죽자는 눈빛이다.
그러고는 다시 두 명의 참혼대를 보며 말했다.
“좋다! 내가 일러주지.”
“오호~.”
막적이 가까이 오라는 듯 도를 흔들며 손가락을 세워 위를 가리켰다.
“저리로 가셨다. 너희가 따라가서 잘 계시냐고 인사드려주면 고맙겠다!”
그러면서 몸을 날려 벼락같이 도를 내리찍었다.
구참이 어이없다는 듯 흥얼거렸다.
“십이참, 이 마적 출신의 흑도들은 입문할 의사가 없나 보네~ 그냥 보내주는 게 낫겠네~.”
옆에 있던 십이참이 휙, 튀어나와 막적의 도를 막았다.
채채챙!
그리고 불과 몇 수 되지 않아 막적의 도가 날아갔다.
“크윽!”
막적이 손목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이 잔뜩 이지러졌다. 그래도 한때 혈랑대 밥을 먹으며 고원에서 침 좀 뱉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쉽게 도를 잃었다.
십이참이 마음만 먹었다면 벌써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아마도 고문을 하기 위해 살려두는 게 분명했다.
막흉이 튀어나와 막적의 앞을 막았다.
십이참이 싸늘하게 웃었다.
“순순히 무릎을 꿇는 게 좋을 것이다. 내가 십이참이다. 열두 번 베이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너 따위는 한칼이면 된다.”
막흉이 고함을 지르고는 도를 앞세워 한 발 내디디려다, 한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방금까지 으르렁거리던 십이참이 시선을 구참에게 향한 채 그대로 굳어 있지 않은가. 도를 막흉에게 겨눈 자세 그대로였다.
구참을 보니 역시 도 자루에 손을 댄 자세로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구참의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동시에 막흉도 자신을 짓누르는 강력한 기운에 멈춰야 했다.
구참 뒤편 어둠 너머에 누군가 있었는데 돌아볼 수가 없었다.
“누, 누구냐!”
십이참은 아직 기세에 제압되지 않았기에 억지로 소리를 내질렀다.
어둠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십이참이라고 했나?”
“…….”
“참혼대는 몇 명이지?”
“…….”
“나도 열두 번을 벨 수 있다.”
“……!”
“앞으로 한 번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 한 번 베기로 하지.”
“…….”
십이참은 억지로 움직이려 했는데 이상하게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압당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는 극도의 공포가 온몸을 굳혀버린 것인데, 십이참은 그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공포는 인지하기 이전 몸이 죽음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라는 걸.
“천주는 어딨나?”
어둠 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십이참은 대답 대신 억지로 시선을 들어 구참을 보려 했다. 둘이서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도를 든 손목이 뚝, 떨어졌다.
쨍그랑!
“흐억!”
십이참보다 보고 있던 초달삼살이 더 놀라 기겁하였다.
아무리 밤이지만 주위 사물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다. 별도 있고, 이제 막 달도 뜨고 있는데…….
그러나 아무도 십이참의 손목이 어떻게 떨어졌는지 보지 못했다.
굳이 말하자면, 그냥 떨어졌다.
심지어 떨어진 손목에서 피가 튀지도 않았다. 마치 얼어버린 듯 피와 혈관, 뼈가 선명하게 보였다.
전대미문의 괴사에 모두 혼이 나갔다.
어둠 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주는 어딨나?”
십이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입이 굳어 말이 잘 나오지도 않았다.
“나, 난주에 계십니다.”
“이제 말이 통하는군. 난주에 남아 있는 마천, 아니 천산파라고 해야 하나… 몇 명이나 남았지?”
“천주, 아니… 천마 친위대 이개 무력대와 십이무력대 중 이개 무력대… 그리고 천주를 호위하는 사대수신호위와 그들이 이끄는 호위대…….”
공포에 질린 십이참은 아는 대로 술술 불었다.
그사이 구참은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새끼발가락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자 전신을 죄던 공포감이 한순간에 깨지고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크아앗!”
구참이 벼락같이 도를 뽑으며 단번에 삼 장을 날아가 내리그었다.
휘익!
도가 허공을 베고.
어둠 속에서 잠시 검의 환영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아!”
구참은 그만 자기도 모르게 도를 내렸다.
필사적으로 공포감을 깨고 일도(一刀)를 긋기는 했지만, 그건 죽기 전에 한 번 발악한 것일 뿐이었다.
상대는 그가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절대경지에 있는 존재였다.
“…….”
구참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순간 어둠이 사라졌다는 걸 느꼈다.
“크윽!”
열두 번을 대답하고 풀려난 십이참이 그제야 피가 터지는 손목을 부여잡고 신음을 터뜨렸다.
‘뭐지?’
왜 그냥 간 거지?
멍하니 어둠이 있던 자리를 본 구참은 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과연 살아있기나 한 걸까.
자신을 한순간 굳혀버린 절대 공포.
그런 것도 무공인가?
그러다 깨달았다.
상대가 자신을 살려둔 건… 길 가는 개미를 밟을지언정 일부러 잡아 죽이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너무나 하찮아서 자기 같은 존재는 죽일 생각도 들지 않았던 것이라고.
그럼에도 비참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서로 차원이 다르니까.
그런데, 뒤에서 인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막부가 막 주저앉으려는 막적을 부축하고 있었다.
막적은 사실 십이참과의 대결에서 내상까지 입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진 공포스러운 광경에 사로잡혀 굳어 있다가 어둠이 사라지자 푹 주저앉은 것이다.
막흉이 도를 앞세워 구참을 향해 세웠다.
“……!”
그제야 비로소 구참은 한없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찮은 미물들이 서로 죽고 죽이고, 잘났다고 하고 있었음을 느낀 것이다.
구참이 막흉을 향해 손을 흔들어 가라고 하고, 십이참을 부축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자 막부와 막흉이 막적을 부축하고 경신법을 펼쳤다.
스르륵.
무한이 홀연히 나타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