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크윽!”
달아나는 흑의인의 등을 찍은 도사가 뒤따라오던 다른 흑의인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
선경을 방불케하는 공동산 도관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쫓지 마라!”
공청자가 내공을 담아 소리를 치자 그제야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줄었다.
퍼엉!
상청과 자혈이 싸우는 곳에서 굉음이 터지고, 두 사람의 신형이 멈췄다.
상청이 비틀거리다 멈춰선 채로 운기에 들어갔다. 앉을 여력도 없었던 것이다.
자혈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상청을 노려보기만 했다.
두 사람 다 전력을 다했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양패구상한 것이다.
“이 악귀야! 목숨을 내놓아라!”
그때 중년 도사가 달려들어 자혈의 목을 치려고 했다.
공청자가 죽장을 들어 막았다.
“태사숙조…… 이놈 때문에 수많은 제자들이 죽었습니다!”
중년 도사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공청자에게 항의하였다.
“이 자는 사술에 능하다. 자신을 죽이는 자에게 원념을 쏘아 죽이는 사술을 지녔다. 이 자를 죽이면 너도 죽는다.”
공청자의 말에 중년 도사가 검을 내렸다.
“이 자를 천도동에 가둬라.”
공청자가 자혈의 요혈을 점하고 제자들에게 이르고는 무한에게 다가왔다.
“진인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공청자가 아니었다면 주화입마에 들었을 수도 있었다.
무한이 예를 취하자 공청자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에 대해 산도에게 들었네. 과연 인중룡이라 할 만하군. 덕분에 피해를 줄일 수 있었네.”
“산도 어른을 아시는지요?”
무한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산도를 비롯한 오도는 무한이 검천부 식솔을 빼낼 때 홀연히 천하방을 떠났다.
공청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도우라고 할 수 있지. 자네를 만나면 곤륜산으로 찾아오라고 했네.”
무한이 재차 놀랐다.
자신이 공동파를 찾을 것을 산도가 어찌 알았을까?
“그의 산술은 참으로 놀랍지. 자네와 공동파의 인연을 내다보고 일러주더군.”
“아!”
무한이 산도의 도력에 대해 내심 감탄했다.
“무량수불!”
공청자가 장내를 수습하는 공동 제자들을 보다 탄식하듯 도호를 외고는 말했다.
“오늘은 다행히 자네 덕분에 위기를 넘겼지만 천하에 피바람이 부니 공동파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네.”
그러면서 무한을 보았다.
“마천주가 천마지경에 이르렀으나 자네가 오늘 얻은 심득을 놓치지 않는다면 조만간 그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네.”
무한 역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산도를 찾아가게. 곤륜산 상도봉에 있을 것이네.”
공청자가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잠시 후, 상청이 운기조식을 풀고 다가왔다.
“부주의 도움에 감사하오.”
“받은 것을 돌려드렸을 뿐입니다.”
“사숙조의 뜻일세.”
소마를 치료한 것을 말했는데 상청은 모른 척했다. 명문정파로서 마천의 소천주를 살려낸 걸 드러내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무한도 더 거론하지 않았다.
상청의 안색은 창백하였다.
“들어가서 제대로 요양을 하시지요. 저는 이만 산을 내려갈까 합니다.”
상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이 정천맹과 함께한다지만, 그렇다고 검천부와 대립할 생각은 없네.”
“저 또한 구파일방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권왕과 손우자의 행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 뿐이지요. 장문께서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상청이 뭔가 말하려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참고하겠네.”
무한은 상청과 헤어져 산을 내려오다 산문에서 남궁우를 만났다.
남궁우는 오다가 광진이 운기조식 하는 걸 보고 호위를 하고 있었다.
무한이 오자 광진이 일어나며 말했다.
“두 분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공동산을 지날 때 꼭 들러주시기 바랍니다.”
정중하게 예를 취하고는 죽은 사형제들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 산에서도 도사들이 내려와 부서진 산문을 정리하고 시신을 수습하였다.
공동산에서 내려온 무한과 남궁우는 부두마을 객잔에서 짐을 찾았다.
“이제 어디로 가지?”
“곤륜산.”
“헉! 그 먼 곳을 왜?”
“만나야 할 분이 있어.”
산도가 괜히 자신을 찾아오라고 한 게 아닐 것이다.
“후우. 너를 만나고 역마살이 들었나봐.”
남궁우가 한숨을 쉬었다.
***
곤륜산.
웅장한 산세를 타고 영험한 기운이 흘렀다.
“저 많은 봉우리 중에 상도봉을 어떻게 찾지?”
남궁우가 거대한 산세에 기가 질린다는 듯 말했다.
“저기야.”
무한이 산세를 살피곤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로 향했다.
중턱 즈음에 이르자 갑자기 안개가 어리고 길이 끊어졌다.
무한이 안개 너머를 향해 외쳤다.
“어르신, 제자 무한이 왔습니다.”
잠시 후, 안개가 걷히고 길이 드러났다.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날 수 있는 외길을 따라 들어가자 폭포가 떨어지는 계곡이 나왔다.
폭포가 작은 천을 이뤄 흘러가는 계곡 옆에 모옥이 한 채 있었다.
무한이 모옥으로 다가가자 산도가 걸어 나왔다.
“이제 왔구나.”
무한과 남궁우가 산도에게 다가가 예를 올렸다.
“기운이 많이 바뀌었군.”
산도는 무한의 성취를 알아보았다.
“가르침을 얻으러 왔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일러줄 건 없다. 네 스스로 찾아야지.”
그러면서 모옥 위쪽 봉우리를 가리켰다.
“며칠 머물며 아침마다 저 봉우리에 올라 운기조식을 하고 내려오거라.”
그러고는 다시 들어가버렸다.
남궁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무한을 보았다.
“운기조식이나 하고 가라니. 그러려고 이 먼 곳까지 부른 거야?”
“이유가 있겠지.”
다음 날부터 무한은 상도봉에 올라 운기조식을 하였다.
워낙 높은 봉우리였기에 일기가 하루에도 수차례 바뀌었다. 여름이라 다행이지 한겨울이었다면 제아무리 고강한 내공을 지녔더라고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무한이 상도봉에서 운기조식을 하는 사이, 남궁우는 산도와 바둑을 두거나 책을 읽으며 지냈다.
처음 며칠은 바깥세상의 일이 끊임없이 떠올라 집중할 수 없었다.
‘검천부 무인들과 멸마대는 서안에 당도했을까?’
형소와 소소에게 검천부 무인들과 멸마대를 이끌고 서안으로 와달라고 했다.
마천이 본격적으로 중원을 침공하고 있었으니 검천부는 물론이고 흑천으로 간 부모의 안위가 걱정됐다.
억지로 생각을 비우고 최근 얻은 심득에 집중하려고도 했다.
무한은 최근에 여러 차례 심득을 얻었다. 그러나 그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시 느꼈던 생각에 집중할수록 오히려 아득해지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산꼭대기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것에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점차 머릿속이 비어갔다.
나중에는 운기조식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멀리 산세를 바라보기만 하는 날도 있었다.
무한이 점차 말이 없어지자 남궁우가 걱정하였다.
“저러다 주화입마에 드는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저 녀석의 성취는 전례가 없는 것이다. 급하게 오른 만큼 위험하다고 봐야지.”
산도가 말없이 산을 오르는 무한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무한은 아예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남궁우가 식사를 챙겨 올라갔으나 무한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러기를 며칠.
아침나절 봉우리를 자욱하게 덮었던 운무가 걷히고 해가 드러나며 산 아래 세상이 멀리까지 보였다.
멍하니 산 아래를 굽어보던 무한이 갑자기 정좌를 하고 운기조식을 하였다. 날이 저물고 밤이 찾아왔는데도 무한은 운기조식을 하였다.
그렇게 새벽이 밝아오고 먼동이 텄다. 밤새 운기를 하던 무한의 얼굴에 햇살이 비쳤다.
순간, 무한이 눈을 떴다.
천하가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을 듯한 눈빛이 흘러나왔다.
무한은 서서히 뜨는 해를 바라보았다.
무한이 산을 내려오자 남궁우가 반겼다.
“그대로 등선하는 줄 알았지 뭐야.”
무한이 산도를 찾아가 예를 취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산도는 비록 한마디도 일러주지 않았지만, 지금 무한의 상황에 가장 적절한 가르침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야 네 할아버지와의 약조를 마무리 지을 수 있겠구나.”
산도가 후련하다는 듯 말했다.
무한은 모옥에서 며칠 조섭을 하고 산을 내려갔다.
***
서안.
무한의 옛집 대청 앞 계단에 귀영이 앉아서 대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다.
“오라고 한 사람은 보이지도 않고…… 군식구만 바글거리네.”
귀영이 막 들어서는 멸마대원을 보며 중얼거렸다.
무한의 옛집에는 담철조와 공곤, 하기주와 귀영 등이 묵고 있었다.
집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검천부 무인들과 멸마대는 바깥 객잔에서 지내고 있었다.
서안 주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보고하느라 검천부와 멸마대원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대체 부주는 어디를 간 거야? 혹시 잘못된 건 아니겠지?”
공동파에서의 행적을 마지막으로 무한이 사라졌다.
“하암…… 엇!”
지루한 나머지 하품을 하던 귀영이 벌떡 일어났다.
열린 대문으로 무한이 들어선 것이다.
“부주!”
귀영이 휙, 날아가 앞에 섰다.
“드디어 오셨군요.”
무한이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 호위도 잘 있었습니까? 다들 왔나요?”
“하하. 제가 누굽니까? 맡은 바 임무를 완수했지요. 신검무적대를 찾느라 정말 고생했습니다.”
“흥! 나만큼 고생했을까? 나야말로 천지를 돌아다녀야 했다고.”
무한을 따라 들어온 남궁우가 퉁명스레 말했다.
무한이 왔다는 말에 하나둘 속속 모여들었다.
무흔이 슬쩍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바깥을 살피러 갔던 담철조와 공곤, 하기주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멸마대 연추산을 비롯한 오상, 장초, 홍염도 모습을 보였다.
무한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무사하였군요. 다행입니다.”
“부주, 덕분입니다.”
담철조가 말했다.
“그간 어디 계셨습니까?”
“그게 부끄럽게도…….”
담철조와 공곤은 무한의 명을 받아 각기 문파를 순례하던 중 기습을 받았다.
“그러다 이지를 상실한 적들에게 기습을 받았습니다.”
공곤이 벌건 얼굴로 말했다.
기습인데다 워낙 수가 많아 공곤은 수하를 잃고 중상을 입고 은신하여 상세를 돌보았다.
그러다 무한이 흑천에 전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검천부에 탈이 났음을 직감하고 우선 담철조를 찾았다.
그런데 담철조 역시 기습을 받아 중상을 입고 운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쫓는 자들이 있었다. 두 사람은 잠행을 하며 추적자를 피해 호남을 거쳐 천하방으로 향하다 무흔을 만났다고 했다.
무한은 새삼 무흔의 추적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 신검무적대의 대주들의 잠행을 찾아낸 것이다.
“이지를 상실한 자들이라면 저도 상대했지요. 손우자의 짓입니다.”
무한의 말에 공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총군사가 천하방을 망쳤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무한이 시선을 돌리는데 연추산이 물었다.
“혹시 고 대형 소식은 들었는가?”
“신강에서 돌아오셨습니다. 난주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군. 그러면 우리는 난주로 가겠네.”
연추산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숙이 마천도 천지이니 고벽후의 안위가 걱정된 것이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뒤따라 갈 것이니 먼저 가시죠.”
오랜만에 만났으나 회포를 풀 시간이 없었다.
“난주에서 보세.”
연추산과 멸마대 형제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무한이 하기주를 향해 물었다.
“신검무적대원 충원은 몇 명이나 되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