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85화 (185/250)

185화

백 명 가까운 흑의인들이 모여 진을 이루자 강대한 살기가 도관을 뒤덮었다.

늙은이가 굳은 얼굴로 무한을 향해 말했다.

“나는 만마동주 자혈이라고 한다. 네가 천마와 겨루고도 살아남았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지. 그 나이에 불가능한 성취였으니까. 적이지만, 네 성취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면서 만마진을 이룬 흑의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자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현경의 고수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뼈를 묻는다. 대신 반드시 이자와 상청의 수급을 베야 한다.”

자혈의 비장한 어조에 흑의인들의 무표정한 얼굴에 살기가 피어올랐다.

“개진(開陣)!”

이어진 자혈의 외침에 흑의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러자 상청이 공동 제자들을 향해 외쳤다.

“칠성연환진으로 대응하라!”

순식간에 제자를 수십 명이나 잃은 상청의 분노는 더없이 컸다. 무한에게 제자의 복수를 맡길 수 없었다.

상청의 외침에 기습을 받고 우왕좌왕하던 공동 제자들이 진형을 갖춰갔다.

공교롭게도 무한은 양 진영 사이에 선 셈이 됐다.

급박한 상황이었으나 무한이 상청에게 검례를 취하며 말했다.

“저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공동 도사들께서는 잠시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무한이 정중하게 청하자 상청은 잠시 갈등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만마진이 어떤 진인지 알아보고 부딪혀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무한이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감당 못 하겠으면 바로 물러나시게.”

일전에 냉랭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어조였다.

그 사이에도 흑의인들은 공간을 좁히며 무한을 압박해왔다.

흑의인들이 일으킨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공간에서 귀곡성이 울려왔다. 동시에 사방에서 칼바람이 들이닥쳤다.

무한이 진세를 살폈다.

흑의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수십 년을 고련한 일류고수다. 만마동주 자혈을 비롯한 몇몇은 진경의 고수로 보였다.

‘사대비지 한 곳의 전력이 이 정도라니.’

무한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백여 명에 불과했지만 공동파를 피로 씻겠다고 한 소리가 허언이 아니었다.

그런 자들이 진을 펼치니 중첩된 살기만으로도 사람을 살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쉬쉭!

한 무리의 흑의인들이 무한을 향해 달려들며 검과 도를 휘둘렀다. 서로 다른 병기임에도 찌르고 베는 합격이 정교했다.

날선 검마다 무한을 죽이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었고, 그 의지를 따라 기운이 먼저 다가왔다.

만마진은 일종의 차륜진이었다. 서너 명 많게는 칠팔 명이 함께 움직이니 공세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스스슥!

무한의 검이 움직였다. 검이 허공을 가르며 죽음을 원하는 의지들에 맞섰다.

카캉!

의지와 의지가 충돌하며 강렬한 기음이 터졌다.

검이 부러지고 흑의인 둘이 튕겨나갔다.

“으음…….”

만마진을 지휘하는 자혈이 침음성을 터뜨렸다.

무한의 검에는 내공이 실려 있지 않은 듯한데도 강력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무한과 만마진의 격돌을 지켜보는 상청도 크게 놀랐다.

그가 보기에 만마진은 변화가 무쌍하고, 환영과 환청을 불러일으키는 마의 기운까지 담은 괴이한 진이었다.

그런데 무한은 비무를 하기라도 하듯 자연스럽게 검을 맞받아쳤다.

일각이 흐르고 진세가 더욱 거칠어졌다. 흑의인들이 분출하는 마기가 짙어지며 주위가 어둠에 잠식되는 것만 같았다.

그때, 자혈이 뭐라뭐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무한은 날아드는 병장기 사이를 유영하듯 움직이다 자혈이 주문을 외우자 흑의인들의 눈빛이 이상하게 바뀌는 걸 느꼈다.

각자 분출한 마기가 서로 상승작용을 하며 다시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크아아악!”

어느 순간 마기가 극에 달한 흑의인 둘이 좌우에서 괴성을 지르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퍼엉!

놀랍게도 그들의 몸이 터져버렸다. 마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자신의 몸을 터뜨린 것이다.

흑의인들의 육신이 터지며 퍼져 나온 혈무가 진세를 따라 회오리치며 무한의 주위를 감쌌다.

동시에 귀곡성이 커지며 기이한 기운이 무한을 향해 좁혀 들었다.

상청의 안색이 급변하였다.

“스스로를 제물 삼아 펼치는 진이라니!”

무한도 내심 크게 놀라며 검풍을 쏟아내 혈무를 쳐냈다.

흑의인들의 육신이 터지며 분출한 혈무에는 원념(怨念)이 짙게 배어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원념에 사로잡혀 미쳐버릴 것 같았다.

퍼엉!

재차 두 명이 앞뒤에서 달려들며 육신을 터뜨렸다.

흑의인들은 만마진의 마기에 잠식되어 자신의 죽음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런 미친…….’

무한은 마천의 잔혹함에 다시 한 번 치를 떨었다.

자혈이 여기에서 뼈를 묻겠다고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들은 무한이 죽을 때까지 동귀어진을 노릴 것이다.

‘이건…… 상대의 영혼을 노리는 진이다!’

제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고수라도 눈앞의 상대가 육신을 터뜨리며 원념을 쏘아내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또다시 마기에 이성이 잠식된 흑의인 셋이 날아들며 육신을 터뜨렸다.

주위를 맴도는 원념의 혈무가 짙어지자 무한은 마치 피의 연못에 서 있는 듯했다.

혈무에서 배어나오는 원념이 무한의 영혼 깊숙한 곳을 흔들었다. 마치 어둠이 깨어나듯 심연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던 마기의 존재가 느껴졌다.

무한은 날아드는 병장기를 피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자신 내부에서 일어나는 마기에 당황하였다.

그때, 자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마(神魔)는 본질이고, 신마는 나 자신이며, 신마를 각성하면 거칠 것 없이 영육이 자유로우리라.”

자혈이 주문을 외우자 흑의인들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지고 눈빛이 검붉게 물들었다.

이어 동시에 대여섯 명이 달려들며 자폭하였다.

그러면서도 병장기로 공격하였기에 무한은 피할 수도 없었다.

‘크윽!’

흑의인들이 자폭하며 분출한 원념의 혈무에 의해 무한 내면의 마기도 점차 증폭되어갔다.

동시에 무명공의 한 구절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연근(練筋), 연골(練骨), 연혈(練血)을 통해 수라의 육신을 이루고 연정(練精), 연기(練氣), 연신(練神)으로 수라의 정신에 닿는다…」

연혈을 이루기 위해 살폈던 무명공의 내용은 무척이나 잔혹했고,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 그 무명공의 내용이 저절로 이해가 되었다.

‘무명공이 마천의 무공 연원이었어!’

동시에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무한은 경천심결을 연성하며 무명공의 원리와 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아낸 바 있다.

경천십이식이 공격일변도의 패도적인 무공인 것도 무명공의 잔혹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했다.

내심, 경천십이식의 원천이 무명공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해왔는데…….

무명공이 마천의 무공이라면…… 할아버지 심양조의 무공 뿌리가 마천인 셈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무한의 심안(心眼)이 깨어나고,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신이고, 무엇이 마인가?’

목소리는 점차 커지며 계속 되풀이 하여 물었다.

‘무엇이 신이고…….’

연이은 흑의인들의 합공을 막아내면서도 정신은 물음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사이 무한의 눈빛이 점차 검붉게 변해갔다.

침중한 얼굴로 무한과 만마진의 격돌을 지켜보던 상청이 크게 놀랐다.

“심마?”

그가 보기에 무한은 일종의 주화입마에 들기 직전이었다.

그때, 허공에서 도호를 외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량수불!”

하늘에서 울리는 듯한 진중한 도호 소리에 상청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어 상청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상청, 제자들에게 칠성연환진을 펼치며 황도경(黃道經)을 소리 내어 외우게 하라!”

상청이 정신을 차리고 손을 번쩍 들었다.

공동 제자들이 북두칠성의 방위를 따라 움직이며 황도경을 외웠다.

공동 제자들이 외우는 황도경에는 북두칠성의 힘이 실렸다.

“크윽!”

만마진을 지휘하던 자혈이 피를 울컥, 토했다.

그는 자신의 마기로 만마진의 기운을 조종하고 있었는데 북두칠성의 기운을 실은 황도경 소리와 부딪히며 내상을 입었다.

그 역시 진경의 고수였으나 수많은 공동제자들의 힘이 실린 칠성연환진을 홀로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동시에 만마진이 순간적으로 흔들렸고, 무한은 자신의 정신을 옭매던 물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만마동주 자혈이 허공 어딘가를 보며 외쳤다.

“공청자, 역시 살아 있었구나! 어서 나와라. 오래 묵은 은원을 풀자!”

자혈의 말이 끝나기도 한 사람이 장내에 나타났다.

여기저기 꿰맨 누더기 같은 도복을 입은 노도(老道)가 죽장을 짚고 천천히 걸어왔다.

허연 백발에 청수한 얼굴을 한 노도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상청이 노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숙조를 뵙습니다.”

노도는 공동파의 원로 공청자였다.

공청자가 쓰러진 시신을 훑어보고는 크게 탄식하였다.

“자혈, 어찌하여 다시 피의 수레바퀴를 돌리려 하는 겐가?”

공청자의 목소리에는 오랜 수행을 한 선기가 담겨 있었고, 그로 인해 장내를 짓누르던 마기가 밀려나는 듯했다.

무한은 여전히 흑의인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자혈이 진을 제대로 조종하지 못하자 흑의인들의 마기도 점차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크흐흐…… 피의 빚은 피로 받아야 하는 법!”

자혈의 눈이 검붉은 마기로 잠식되어갔다.

“내 아들을 죽인 공동파를 두고 어찌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말이냐?”

공청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당시 자네 아들로 인해 공동 제자들도 수없이 목숨을 잃었다네. 이만 돌아가게.”

“흥! 어림없는 소리!”

자혈이 고함을 지르며 공청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청이 황급히 공청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퍼엉!

자혈이 후려친 강기가 상청이 휘두른 일권과 부딪히며 굉음이 터졌다.

그 여파로 공청자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공청자는 무공보다는 도법(道法)에 정진한 학도(學道)였다. 오랜 수행으로 지닌바 기운은 정순하지만 무공 경지로만 보면 그리 높다고 할 수 없었다.

자혈과 상청이 격돌하며 강기가 연달아 터졌다.

무한은 흑의인들과 격전을 벌이면서도 장내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구 도사의 태사부인가보군.’

공청자가 무한을 향해 말했다.

“신마는 원래 하나일세.”

무심히 내뱉는 한마디에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무명공의 내용이 몸으로 체득되며 만마진의 마기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느꼈다.

오히려 마기를 주재하고 조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파앙!

무한이 검을 바닥 옥석에 꽂자 맹렬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지며 가까이 있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튕겨나갔다.

“이럴 수가!”

정신을 잠식하던 만마진의 마기로부터 깨어난 흑의인들이 크게 놀랐다. 자신들조차 만마진이 이렇듯 극악한 진법인 걸 몰랐던 듯했다.

마공을 익히고 마의 힘을 숭상하는 마천도들도 자신들의 목숨은 귀하다.

절대고수를 잡는 진법을 연구하라는 마천주의 명에 의해 만마동에서 오랜 수련을 해왔는데 그 끝이 동귀어진이라니.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흑의인들이 일제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만마진의 마기에 잠식되었다 풀려난 허약한 정신 상태에서 공동파 제자들이 황도경을 외우며 펼치는 칠성연환진의 기운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한은 달아나는 흑의인들을 굳이 쫓지 않았다. 오히려 마천주에 의해 농락당한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마천주…… 인간을 농락하는 악마 그 자체로구나!’

백여 명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마천주에게 새삼 분노하였다.

그러나 공동 제자들은 그럴 수 없었다. 수많은 제자들이 죽었기에 일제히 달려들어 마천도들을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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