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84화 (184/250)

184화

“그런 말씀은 없으셨소. 다만 당분간 공동산에 머물러 주기를 바라셨소.”

“…….”

무한은 난감해하였다.

마천의 대군이 나온 이후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언제까지 공동산에 머물 수는 없는 일. 그러나 도움을 받았으니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일단 산 아래 마을에서 머물며 지켜보겠습니다.”

“감사하오.”

무한은 구도사와 말을 마친 뒤 사추선을 찾았다.

“여기서 작별을 고해야겠군요.”

“부주의 도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사추선이 표정을 가다듬고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다음에 만날 때 적이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광풍사천대가 부주에게 칼을 겨누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추선이 잘라 말했다.

무한은 곧바로 남궁우와 함께 산을 내려왔다.

부두 마을에 이르러 다시 객잔에 들자 남궁우가 이상하게 생각했다.

“일 다 끝난 거 아니었어?”

무한이 구 도사의 부탁을 들려주었다.

“역시…… 음흉한 도사들이라니까. 내놓고 치료하기는 뭐하니까 뒤로 슬그머니 청을 들어주고, 자신의 안위를 부탁한 거잖아.”

“덕분에 소천주가 살았잖아. 그가 십이가주 절반만 회유해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지.”

“지금 여기 처박혀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인데…….”

“소소와 형소가 돌아오면 연락을 해올 거야.”

무한은 소소와 형소를 검천부 식솔들이 있는 서현으로 보냈다.

‘지금쯤이면 귀영과 무흔도 돌아왔어야 할 텐데.’

남궁우가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가까운 현에 가서 소식을 좀 알아봐야겠어.”

공동파를 가면 천하의 소식이 다 있겠지만 서로 좋지 않게 헤어졌으니 그럴 수가 없다.

남궁우가 가고 무한은 운기조식을 하였다.

마천주와 겨루며 죽기 직전까지 갔다.

그때 얻은 심득은 스치듯 지나가 희미한 여운만 남아 있다. 틈이 날 때마다 당시를 되살려 봤지만 별반 성과는 없었다.

당시를 돌이켜보다 운객을 떠올렸다. 운객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희한한 사람이야.’

운객은 혼전장을 수습하는 와중에 슬그머니 사라졌다. 기운을 끌어 봐도 감지되지 않는 걸 보면 근처에 없는 게 분명했다.

‘내상이 만만치 않았겠지.’

어딘가에서 요양 중이리라.

이런저런 잡념이 피어오르다 끊기고, 무한이 몰아지경에 들었다

남궁우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마천이 열한 갈래로 나뉘어 중원으로 넘어왔어.”

“흑천의 동태는 어때?”

“그게 이상해. 흑수애에 마냥 웅크리고 있어. 사천으로 진출했던 무력대도 다 불러들였다는데?”

남궁우는 진소향의 귀환으로 흑천의 내분이 격화된 게 아닐까 추측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확실치는 않아. 여기는 변방이라 소식이 늦어. 근데 의외인 것은 정천맹이야.”

“정천맹?”

“어마어마한 소식을 물어왔다고. 놀라지 마.”

남궁우가 기대하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권왕이 맹주로 취임하고 동정호 군산을 총단으로 삼았어.”

“……!”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왔던 모양이야. 마천 침공을 계기로 표면화 한 것뿐이지.”

무한은 권왕의 얼굴을 떠올렸다.

의뭉스럽게 패천부에 웅크리고 있더니 이런 수를 준비하고 있었던 건가.

어찌 되었건 이로써 권왕과 손우자가 한편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다만, 서로를 이용하는 사이인지, 아니면 아예 무림 공멸이라는 뜻까지 함께 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무한이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면 정천맹의 군사가 손우자인가?”

“아니. 공손승! 하지만 손우자의 수족이니 뭐, 거의 손우자가 장악했다고 봐야지.”

“천하방은?”

“권왕이 떠나면서 천하방 문파의 삼분의 일이 정천맹으로 넘어갔어. 확, 줄어든 셈이지.”

무한이 내심 씁쓸해 하였다.

자신이 해체하기도 전에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자신이 천하방을 해체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을 때 할아버지는 그저 웃기만 하였다.

그때, 천하방의 주인이 된 후 해산을 하겠다는 뜻을 품었는데 저절로 분열하고 있는 중이다.

“부주는 어찌할 거야?”

“…….”

“도왕은 이미 신망을 잃었어. 무공만 높다고 수장이 되는 건 아니지. 이번에 패천부가 나간 건 시작일 뿐이야.”

그럴 것이다.

마천의 침공이 본격화되면 모두 정천맹으로 달려갈 게 분명했다. 힘이 있는 쪽에 기대게 마련이니까.

“검천부도 이참에 독립하는 게 어때? 검천문! 멋있잖아.”

“으음. 좀 조용히 해줄래. 책사치고 너무 수다스럽잖아?”

무한의 핀잔에 남궁우가 헉, 하고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너, 지금 내게 뭐라 한 거야? 나보고 수다쟁이라고? 그런 농담도 할 줄 알았어? 푸하하.”

남궁우가 웃음을 터뜨리곤 말했다.

“부주, 좀 바뀐 거 알아?”

“…….”

“나는 좋은 변화라고 생각해. 처음 봤을 때는…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었거든. 뭐, 그래서 신비해 보이긴 했지만.”

무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자 남궁우가 눈을 찡긋, 하고 방을 나갔다.

“수다쟁이 책사는 그만 나갈게. 온종일 달렸더니 배고프다.”

***

공동파 태사부의 예측이 맞았다.

무한과 남궁우가 객잔 반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점소이가 황망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공동파와 관계있는 분들은 모두 피해요. 지금 본산에 난리가 났어요!”

무한이 부두로 나와 저 멀리 공동산을 보았다.

불이 났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귀를 열자 병장기가 부딪히고 기파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한은 바로 몸을 날렸다.

“같이 가!”

남궁우가 뒤를 따랐으나 무한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쫓아가지도 못하겠네. 별로 수련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나날이 무공이 높아지는 거지? 밥 먹고 숨 쉬면 그게 다 내공으로 가는 거야 뭐야?”

남궁우가 투덜거리며 공동산으로 향했다.

산 아래 산문은 이미 부서져 기둥만 반쯤 남았고, 산문을 지키던 젊은 도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으…….”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무한이 찾아보니 수풀이 우거진 쪽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둔탁한 무기에 맞았는지 가슴 부위가 짓이겨진 사람은 공동일수 광진이었다.

무한이 요상환을 먹이고 지혈을 하자 광진이 눈을 떴다.

“당, 당신은…… 아, 적이, 적이 나타났다고 본산에 알려야 하는데…….”

“이미 본산이 당했소. 적이 대체 누구요?”

“마천… 만마동에서 왔다고 했소.”

‘사대비지!’

소마가 들려준 마천 사대비지가 머릿속을 스쳤다.

지옥곡.

만마동.

혈지.

참혼애.

지옥곡이 마천에서 죄를 지은 자들을 모아둔 곳이라면, 만마동은 수련에 미친 자를 기르는 곳이다.

“죽지는 않을 것이오. 어서 운기조식을 하시오.”

무한이 광진을 으슥한 곳에 앉히고 다시 몸을 날렸다.

마치 한 마리 학처럼 절벽을 곧장 질러 올라간 무한이 도관의 담을 넘었다.

그러자 눈앞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공동파 도사들과 흑의를 걸친 마인들 간에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습을 받은 공동파 도사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크하하하. 겨우 이 정도였더냐? 그러고도 구대문파라고 우쭐댔구나!”

흑의인 하나가 미친 듯이 창을 휘두르며 상대를 조롱하고 있었다.

피로 물든 도복을 날리며 쇄도하는 창을 피하고 있는 이는 지객당주 상경이었다. 이미 부상이 심해 몇 수 버티지 못할 듯했다.

싸움은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위쪽 도관에서도 연신 비명성이 터졌다.

무한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발로 차서 창을 든 자에게 날렸다.

쉬익!

검이 날아오자 창을 든 자가 휙, 몸을 회전하며 창대로 검을 후려쳤다.

“웬 놈이냐?”

도사 차림이 아닌 무한이 나타나자 창을 든 자가 눈을 부라렸다.

무한은 말없이 경천신검을 뽑았다.

그러자 창을 든 자가 흠칫하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 그놈이 있다. 심무한이라는 애송이가 여기 있다!”

그러자 위쪽 도관에서 네 사람이 흑의를 펄럭이며 날아왔다.

쿠쿵!

네 사람이 내려서자 바닥에 깔린 박석이 가루가 됐다.

중년에서 늙은이까지 나이 대였는데, 그중 나이든 늙은이가 무한을 노려보며 물었다.

“네가 검천부주 심무한이냐? 소천주는 어디 숨겼지?”

‘원래 내가 해결했어야 하는 일이었군.’

마천주가 소마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만마동 괴물들을 푼 모양이다.

무한 일행이 공동산으로 오는 바람에 공동파가 덤터기를 쓰게 됐으니 무한으로서는 태사부라는 이의 부탁 이전에 나서야 할 일이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내려가서 싸우는 게 어떻겠소?”

“흥! 착각하고 있군.”

늙은이가 코웃음을 치고는 공동파 도관을 훑어보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공동파 장문인은 나와라. 정천맹 개파대전에 네 수급을 축하예물로 보낼 것이다!”

늙은이의 광오한 외침에 공동파 도사들이 일제히 분노하여 소리쳤다.

“마도의 졸개들을 죽여라!”

싸움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때, 위쪽 구층탑 쪽에서 한 사람이 날아왔다.

허공에서 유유히 떨어지는 도사는 공동파 장문인 상청이었다. 그 역시 격전을 벌였는지 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상청은 바닥에 쓰러진 지객당주 상경의 앞에 서며 침중한 눈으로 혼전장을 돌아보다 돌연 고함을 질렀다.

“신성한 도의 시원에서 마귀들이 날뛰다니! 멈추지 못하겠느냐!”

역시 일파의 장문인다웠다. 웅혼한 내공을 실은 외침에 만마동의 고수들도 심혼이 울리는 걸 느끼고 잠시 움찔하였다.

무한을 상대하던 늙은이가 상청을 보고는 비웃었다.

“대체 어디 처박혀 있다가 이제 나온 게냐? 조무래기 몇을 해치운 모양인데…… 네 목숨값으로 치겠다. 죽여라!”

그러자 창을 든 사내가 상청을 향해 돌진하였다.

상청이 검을 옆으로 비껴 창을 쳐내자 두 명의 흑의인이 달라붙었다.

장문인이 격전장에 참여하자 여기저기 도관에서 도사들이 날아왔고, 흩어져 싸우던 만마동 고수들도 모여들었다.

너른 도관 마당은 순식간에 검기와 권풍이 비산하고 피가 튀며 팔다리가 날아가는 지옥으로 바뀌었다.

“크흐흐… 네놈은 내가 목을 따주지.”

늙은이가 휙, 하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함께 왔던 세 명이 무한의 뒤를 돌아 포위하였다.

포위망이 형성된 순간 어디선가 처연한 울음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주위의 시야가 흐릿해지고 어두워져갔다.

‘마진(魔陣)?’

어두운 기운이 뭉치더니 한 자루의 검이 되어 찔러왔다. 이어 수십 자루의 검과 도가 무한을 난자질하듯 다가왔다.

무한은 자신을 향해 몰아쳐오는 검과 도를 무심히 보다 벼락같이 진각을 밟았다.

쿠웅!

무한이 내딛은 박석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기파가 터졌다.

무한을 둘러싸고 틈을 노리던 네 명이 동시에 흠칫하고 한 호흡을 멈췄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무한의 검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동시에 사방팔방으로 검기가 날아갔다.

“크윽!”

흑의인 한 명이 검기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마진이 걷히고 늙은이와 두 명의 흑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뜬 늙은이가 입술을 떨며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들은 것과 다르잖아!”

늙은이가 서쪽 먼 하늘을 보고 중얼거렸다.

“만마동 전원을 투입한 이유가 있었구나…….”

탄식을 흘리고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공동파 도사들을 상대하던 흑의인들이 몸을 빼어 날아왔다.

무한은 검을 세우고 흑의인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자신이 감당하는 자가 많을수록 공동파에 피해가 덜 갈 것이다.

늙은이가 몰려든 흑의인들을 향해 외쳤다.

“만마진을 펼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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