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무한이 풍개를 바라보았다.
개방에서 자신을 적대시할 이유는 없다.
이어서 구파일방의 명숙들을 둘러보았다.
‘점창, 곤륜, 개방, 종남…….’
네 곳에서 온 자들의 눈빛에서 이미 말을 맞췄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손우자가 손을 썼으리라.
풍개가 무한을 향해 물었다.
“흑천 본거지 흑수애에는 왜 간 것이오?”
“…….”
“하아… 흑천의 핏줄이라는 게 사실이오?”
무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풍개를 응시했다.
“태어나면서부터 거지인 사람은 없소.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지. 하지만 핏줄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오.”
“흥! 그렇게 간단한 말로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오.”
무한이 풍개를 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행적이 수상하다면 이를 입증할 증거를 가져와야 할 거요. 추론으로 나를 음해한다면 개방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풍개가 흥분하여 책상을 탁, 치며 소리쳤다.
“새파란 애송이가, 뭐라? 개방에 책임을 물어?”
가만 지켜보고 있는 공동파 장문 상청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한이 어리긴 해도 검천부주의 신분으로 이 자리에 있다. 풍개가 중년이 지난 나이라 하나 새파란 애송이라는 말은 선을 넘었다.
무한이 정색하고 풍개를 향해 말했다.
“개방이 검천부를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걸 미처 몰랐군.”
기운을 올리지도 않았건만 진중한 어조에 풍개가 약간 위축됐다. 무한이 마천주와 겨루는 고수라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그러나 이미 기호지세다.
“부주야말로 천하방 총군사를 모함하였소. 그거야말로 책임을 져야 할 사안이지.”
그러면서 도움을 청하듯 공손승을 바라보았다.
이로써 풍개가 군사부와 손을 잡은 게 확실해졌다. 다만, 개방 전체의 뜻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았다.
공손승이 무한을 노려보며 말했다.
“부끄럽지만 지금 천하방은 서로 반목과 질시로 인해 와해되고 있소. 이래서 총군사께서 정천맹을 추진하고 계시는 거요.”
‘정천맹?’
무한의 미간이 꿈틀하였다.
공손승이 상청과 여러 명숙을 향해 포권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천맹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리고 원하는 모든 문파가 가입하여 중원 무림의 안녕과 질서를 관장하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새로운 무림맹이 될 것이오.”
무한은 듣자마자 손우자의 속셈을 알 것 같았다.
무한이 천하방을 해체하겠다고 하자 선수를 친 것이다.
무한의 시선이 상청을 향했다.
상청과 구파일방 명숙들은 자신이 소마를 부탁하기 위해 온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을 시험하였다.
‘이미 정천맹을 결성하기로 합의를 봤구나.’
정천맹 결성을 합의하는 자리라면 장문인들이 왔을 것이다. 장문인이 아닌 중진들이 왔다는 건 실무를 논하기 위함일 것이다.
구파일방은 정마대전 이후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봉문하다시피 해왔다.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 마천과의 전쟁을 빌미로 새롭게 무림맹을 결성하고 강호의 패권을 잡으려는 것이다.
상청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한을 향해 말했다.
“마천 소천주를 치료하는 건 어렵겠소. 어찌됐든 그는 중원 정파 공동의 적이요.”
공동파 한 곳뿐이라면 어떻게든 설득을 해보겠지만 구파일방이 모여 있으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공동파로서는 다른 문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무한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에게 전말을 들은 남궁우가 화를 터뜨렸다.
“흥! 구파일방은 여전히 꽉 막혀 있어. 예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다니까. 정천맹? 자기들끼리 잘해보라지.”
하지만 구파일방이 주도하고 다른 세가가 참여하면 남궁세가 역시 참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사추선을 찾아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게 됐소. 공동파에서 치료를 거부했소.”
그러려니 했지만 도관 안으로 들이기에 한 가닥 희망을 품었던 사추선은 크게 실망했다.
“아직 열흘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소. 공동산에는 공동파 외에도 도관이 많으니 알아봅시다.”
공동산은 도가의 시원지로 일컬어지는 만큼 곳곳에 수많은 도관들이 있었다.
수련과 수행으로 등선을 추구하는 우도(右道)는 물론이고 도술과 법술을 연마하는 좌도(左道)도 여럿이었다.
소마의 상세는 내상이나 외상이 아니라 초혼강신에 따른 혼백의 붕괴다. 회혼술에 능한 좌도 계파의 도관을 찾는 게 나을 수 있었다.
대막혈사가 강신술로 영을 강화하여 혼백을 붙잡아 주긴 했으나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이십일일이다.
공동산으로 오느라 열흘을 허비했으니 앞으로 열흘 안에 도관을 찾아야 한다.
무한의 말에 사추선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당장 내려갑시다.”
무한 일행은 산을 내려와 부두 인근 객잔을 얻었다.
사천대원 한 명을 소마 곁에 붙여두고, 나머지는 흩어져 좌도 도관을 수소문했다.
사흘째 되던 날, 무한은 산중 깊숙한 어느 계곡에서 산촌을 만났다.
“도사? 도사라면 우리 마을에도 있지.”
산촌의 촌장을 찾아 근처에 도관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뜸 자신의 마을에도 있다며 무한을 안내하였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아래 작은 모옥.
마침 밥을 짓는지 아궁이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구 도사, 집에 있는가?”
촌장의 말에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이마가 약간 튀어나온 도사는 머리를 정갈하게 묶고 태극이 그려진 흑의도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이 젊은 분이 도사를 찾는다기에 데려왔네.”
“멀리서 손님이 온다기에 밥을 짓고 있었소. 들어가서 식사부터 합시다.”
구 도사는 무한을 안으로 들였다.
작은 모옥 벽에는 갖가지 법구가 걸려 있었다.
잠시 후, 사내가 조밥에 채소만 놓인 소박한 밥상을 가져왔다.
무한은 사내가 마치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하니 내심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며칠 공동산을 뒤지며 도관을 찾아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내가 말했다.
“꿈에 원시천존께서 현몽하셔서 회혼술이 필요한 자가 올 것이라고 해서 기다렸소.”
무한은 구 도사의 말에 깜짝 놀랐다. 동시에 기대하는 마음이 일었다.
‘정말 좌도방문의 술법이 있는 건가?’
애초에 소마의 초혼강신을 진원지기나 잠력을 폭발시켜 쓰는 무공이라 생각했다. 대막혈사가 강신술로 소마의 혼백을 묶어 놓았다고 했을 때도 반신반의하였다.
그런데 구 도사란 사람을 만나니 정말 별세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도사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단을 만들어야 하니 사흘 뒤에 환자를 데려오시오.”
무한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했다.
부두 객잔으로 돌아온 무한이 산촌에서 만난 도사 이야기를 하자 사추선이 크게 기뻐하였다.
남궁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토를 달았다.
“으음… 왠지 사기 같은데? 원시천존이 현몽해서 우리가 올 거라고 일러주었다고? 그분이 그렇게 한가하던가?”
“남궁 공자, 소천주는 원시천존께서 충분히 관심을 보일 분이라오.”
사추선은 평소 냉정하고 논리적인 사람이었는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남궁우의 말에 반박했다.
일행은 사흘 후 산촌을 찾아갔다.
구 도사는 마을 뒤쪽 계곡에 제단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팔괘 형상으로 지은 제단 위에 소마를 눕히라고 하고, 굵은 향초에 불을 붙였다.
제단 위에는 노란 종이에 붉은 주사로 쓴 부적이 나부끼고 있었다.
구 도사가 소마의 상세를 보고는 말했다.
“초혼술을 과도하게 쓰는 바람에 본래의 혼이 손상을 입었소. 하지만 나의 회혼술이면 혼을 안정시킬 수 있소. 문제는 육신의 손상이오. 과도한 내상으로 백이 손상되었소. 이를 안정시키려면 내가고수가 필요하오.”
“그건 내가 할 수 있소.”
구 도사가 무한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해봅시다. 우선 이걸 익히고 계시오.”
무한이 보니 내공으로 경혈을 바로 세우는 기공술서였다. 황정기공과 비슷하였기에 무한은 한 번 보고 방법을 알 수 있었다.
무한이 바로 기를 운용하는 연습을 하자 구 도사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으음. 백을 다루는 기술을 알고 있으셨던 게요?”
황정기공은 할아버지 심양조가 세상에 나가면 안 된다고 한 비급 가운데 하나였다.
이제 보니 좌도방문의 기공과 맞닿아 있었기에, 비급이 세상에 나갔을 때 일어날 혼란을 막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작은 인연일 뿐이오.”
“그렇소?”
무한은 말을 아꼈다.
구 도사도 그런가보다 넘기고는 회혼술에 집중했다. 그는 동물의 피가 담긴 그릇을 들어 사방에 뿌리고는 소마가 누워 있는 제단 앞에서 서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제단에 그려진 팔괘에서 기운이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무한이 옆에 있는 사추선과 남궁우를 보았다. 그들은 그런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참 주문을 외던 구 도사가 손에 든 불진으로 소마의 전신을 몇 차례 훑더니 무한에게 말했다.
“지금이오. 어서 백을 잡아주시오.”
무한이 제단 위로 날아가 소마 앞에 좌정하고는 양손을 펼쳤다.
기운을 끌어올려 소마의 경혈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가닥가닥 끊어진 터라 새로 경혈을 그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무한은 몰아지경에서도 구 도사가 준 기공서가 황정기공 못지않게 현묘하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이런 고수가 왜 산촌에 처박혀 사는 거지?’
두 시진 후.
무한이 제단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구 도사가 손을 저어 허공에 매달린 부적을 모으더니 불을 붙여 태웠다.
“이제 됐소. 혼백을 안정시켰으나 날계란을 그릇에 담아둔 것과 마찬가지이니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오. 이대로 사흘을 둔 후 옮기시오.”
사추선과 사천대원 세 사람이 사흘 동안 소마의 곁을 지켰다.
나흘 째 되는 날.
구 도사가 마을의 한 집을 빌려 소마를 옮겼다. 그는 소마의 상세를 보곤 사추선에게 일렀다.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지켜봐야 하오.”
이어서 무한에게 말했다.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소?”
구 도사는 무한을 자신의 집으로 안내하였다. 모옥 앞 석탁에 앉자 구 도사가 차를 내왔다.
“검천부주, 부탁이 있소.”
무한은 흠칫, 놀랐다.
구 도사는 그동안 소마나 사추선의 신분은 물론이고 자신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구 도사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공동파의 방계요. 좌도방문의 술법에 너무 빠져 무공을 게을리 하는 바람에 본산에서 쫓겨났소.”
“아… 그렇군요.”
“실은…….”
구 도사가 민망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태사부께서 제게 저분의 치료를 맡겼소.”
“태사부라니요?”
“굳이 별호를 밝힐 것까지는 없다고 하셨소. 다만, 저분이 완쾌되면 부주에게 부탁을 해보라고 하셨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지요. 먼저 후의를 베풀고 부탁을 해오는데 성심껏 들어드리지 않는다면 도리가 아니지요.”
구 도사가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태사부께서는 조만간 공동파에 겁난이 닥칠 것이라며 부주의 도움을 청했소.”
“……?”
“나는 산속에서 술법이나 연마하는 좌도사일 뿐이오. 태사부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기필코 일어날 일이오. 태사부께서 이르기를 이번 겁난은 멸문지화에 버금가는 것이라며 걱정하셨소.”
마천이 본격적으로 중원을 침공하면 수많은 문파가 사라질 것이다. 공동파와 같은 대파가 멸문당하는 일은 흔치 않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 또한 아니다.
“태사부께서 말씀하신 시기가 언제쯤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