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무한은 화경에 들어서며 이미 하단전 내단이 형성되어 있었다.
내단이 기운을 받아들여 맹렬히 회전하며 날뛰는 기운을 다스렸다.
이렇게 다스린 기운을 곧바로 경천심결을 통해 오장육부와 사지백해로 퍼뜨렸다. 그러자 뒤틀렸던 오장육부의 기운이 바로 잡혀갔다.
경천심결에 의해 유도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가자 날뛰던 기운이 이에 밀려 속속 단전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한 차례 기운을 정화한 뒤 곧바로 전신에 퍼져 있는 기운을 단전으로 끌어들었다.
내단이 한층 단단하게 응축되더니 한줄기 기운이 쑤욱, 중단전까지 밀고 왔다.
그러자 중단전 옥당에서 빛이 터지며 맹렬한 기운의 소용돌이가 일더니 콩알만 한 기운의 덩어리로 응축하였다.
중단전 내단이 형성된 것이다!
완연한 화경을 이루었으나 무한의 기운은 멈추지 않았다.
마천주와의 접전으로 전신이 강기로 바뀔 뻔한 무한이다. 전신 세맥까지 퍼져 있던 기운들이 몰려와 중단전 내단을 중심으로 회전하다 스며들었다.
무한은 기운을 다스려 중단전 내단을 강고히 하는 한편 자신이 들어갔던 의식의 세계를 떠올렸다.
무한의 의식이 어둠 속에 잠긴 순간은 실제로는 길지 않았다.
마천주를 향해 생사지검(生死之劍)을 찌른 뒤 들어간 의식의 세계는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으니 찰나이자 영원이었고, 공간이 없으니 경계도 없었다.
그 속에서 의식은 자유로웠으나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이 아무 생각 없이 허공 속에 존재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무한의 중단전이 맹렬하게 회전하더니 기운이 인당을 향해 올라갔다.
동시에 정수리 백회가 열리며 천기가 내려왔다. 두 기운이 인당에서 마주치자 태극의 형세로 회오리치다 천천히 합일하였다.
잠시 후.
무한이 눈을 떴다.
형형했던 안광이 사라지고 평범한 눈빛이다.
그러나 그 눈빛은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듯 깊고 그윽하였다.
무한은 자신이 무음의 세계에 있는 듯한 착각을 하였다.
십여 장 밖에서 대막혈사와 마천주가 격돌하고 있었다.
섬광이 터지고, 시뻘건 혈랑아와 마천주의 검이 부딪혀 주위가 초토화되고 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
그제야 자신의 일 장 앞에 고벽후가 버티고 있음을 깨달았다.
신강을 다녀온 고벽후는 기연을 얻었는지 막대한 내공으로 무한 주위에 기막을 두르고 있었다.
무한이 일어나자 고벽후가 뒤를 돌아보곤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몸을 날렸다.
고벽후가 날아간 곳으로 시선을 돌린 무한이 크게 놀랐다.
운기조식에 들어가기 전보다 더 큰 혼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천하방?’
마천도를 상대하는 자들은 일시 후퇴했던 천하방 무력대였다.
무력대가 조를 이뤄 마천도의 진영을 휘젓고 다니는 중이다.
앞을 가로막는 적을 진세로 가둬 무참히 도륙하며 나아가다, 강적을 만나면 곧바로 옆으로 빠지며 마천도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채챙!
“크아악!”
다른 한쪽에서도 비명성이 연달아 들려왔다.
동사철이 아들 동오은과 함께 분전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난주 무림인들은 마천도들과 정면대결을 하였기에 희생이 컸다.
고벽후는 곧바로 난주 무림인들이 싸우는 곳으로 날아가 반월도를 후려쳤다.
투캉!
반월도에서 뿜어져 나간 도강이 향한 곳은 난주 무림인을 무차별로 학살하고 있는 흑귀였다.
흑귀는 고벽후의 도강이 날아오자 곧바로 간을 휘둘러 쳐냈다.
콰앙!
강기가 터지며 눈부신 섬광이 일었다.
고벽후의 참전으로 흑귀의 움직임이 제한되자 난주 무림인들의 기세가 살아났다.
“죽여라!”
“대주를 구하라!”
마적들이 병장기를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길을 뚫으려 하였다.
무한이 돌아보니 자신의 뒤에 운객과 혈랑이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콰앙!
그때, 마천주와 대막혈사가 싸우는 곳에서 굉음이 터졌다.
대막혈사가 머리를 산발한 채 뒤로 밀려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천마지경… 과연 대단하군.”
대막혈사가 질렸다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무한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천주는 소마와 자신, 운객과 혈랑을 상대한 뒤 연이어 대막혈사와 겨루고도 지치지 않아 보였다.
“크하하하!”
오히려 새로운 힘을 얻기라도 한 듯 광소를 터뜨리며 천마신검을 쳐들었다.
쿠웅!
검이 하늘을 찌른 듯 굉음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무한의 옆을 붉은 인영이 스쳐갔다.
“이 괴물아! 죽어랏!”
잠시 운기조식으로 내상을 다스리던 혈랑이 사부가 몰리자 참지 못하고 부러진 혈랑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강기를 자유자재로 쓰는 혈랑이기에 병장기가 부러진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내상을 입었기에 그 위력이 크게 약해진 상황이다.
“멈춰라! 네가 상대할 자가 아니야!”
순간적이나마 잠시 기운을 돌린 대막혈사가 마천주를 향해 달려들며 외쳤다.
그러나 혈랑은 듣지 않았다. 사부와 제자가 마천주와 동시에 싸우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놈아! 네가 합공하면 이 사부의 체면이 뭐가 되냐?”
“사부! 일단 죽여 놓고 생각하라고 가르친 걸 잊었어?”
두 사람이 후려치는 두 쌍의 혈랑아에서 늑대의 송곳니 같은 강기가 연달아 쏟아져 나오며 마천주의 전신을 덮었다.
“크흐흐… 대막혈사, 당신도 늙었군. 듣던 바와 다르네.”
마천주가 대막혈사를 비웃으며 천마신검을 허공으로 던졌다.
검이 살아있는 듯 허공을 유영하였다.
무한이 운객을 돌아봤다.
이대로 참전하면 운객을 돌볼 사람이 없다.
그때, 남궁우와 소소, 형소가 혼전장을 뚫고 달려왔다.
“무한아!”
무한은 그들을 보자마자 몸을 날리며 외쳤다.
“운객을 호위해줘.”
무한이 순식간에 삼십여 장 거리를 좁히는데 어디선가 검이 날아왔다.
“검천부주! 받으시오!”
피투성이가 된 사추선이 무한을 향해 검을 날렸다.
그의 옆에 축늘어진 채 광포의 부축을 받고 있는 소마가 손짓을 하였다.
검을 받으라는 뜻이다.
“……?”
무한은 생각할 겨를 없이 날아오는 검을 잡아챘다.
“으윽!”
무한은 한껏 내공을 끌어올린 상태였는데 검을 쥐자마자 내심 경악하였다.
‘이 검은?’
무한의 눈에 검신에 새겨진 검은 용이 눈에 들어왔다.
- 마천검은 천주의 천마신검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검이다. 네가 마공을 익혔다면 더 좋았을 것을…….
소마의 천리전성이 귀 속을 파고들었다.
‘마천검!’
마검이면서 마기를 제어하는 검!
검마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마천검이 무한의 손에 들어오다니.
마천검은 무한의 내공을 받아 가공할 마기를 뿌렸다.
경천신검이 정도의 신검이라면 마천검 또한 마가 혁련가의 보검이었다.
무한은 마천주를 향해 날아가면서 허공을 유영하다 혈랑을 노리고 날아드는 천마신검을 향해 마천검을 날렸다.
동시에 경천신검을 앞세워 천의격을 내리그었다.
콰쾅!
두 자루의 검이 격돌하여 폭음성이 터졌다.
동시에 하늘에서 쩌적, 소리가 나더니 새하얀 검강이 벼락처럼 마천주를 덮쳤다.
마치 하늘이 신벌을 내리는 듯 강렬한 검강이 덮치자, 마천주가 순간 당황하였다.
“경천십이식!”
무한은 방금 전 무한한 의식의 세계를 거치며 경천신검의 진정한 검의를 체득하였다.
이를 완벽히 구현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검의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천의격을 펼치자 그야말로 하늘의 뜻처럼 검강이 출현한 것이다.
무한이 손목을 감아 검을 휘두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지천격!’
그러자 땅이 갈라지며 검강이 솟았다.
하늘과 땅에서 검강이 솟구치는 광경을 본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급한 대로 운기조식을 마치고 깨어난 운객은 미동도 하지 않고 무한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무한이 검을 다시 한 번 감아 쳤는데 하늘 저 멀리서 기음이 터졌다.
동시에 마천주가 황급히 반원을 그려 묵빛 장영을 떨쳐내는 모습이 보였다.
묵빛 장영이 세상을 가르듯 하늘과 땅으로 향하며 날아드는 검강을 막았다.
이어, 마천주가 손을 휘젓자 천마신검과 마천검이 동시에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흥!”
혈랑이 자신의 부러진 반월도를 던져 마천주와 마천검 사이의 기운을 끊었다.
동시에 무한이 손을 휘젓자 마천검이 날아와 잡혔다.
오른손에 경천신검, 왼손에 마천검을 쥔 채 허공으로 부상하는 무한은 마치 천신과도 같았다.
마천주가 차가운 눈빛을 뿌리고 무한을 보더니 갑자기 스르륵, 사라졌다.
무한이 허탕을 치고 다시 땅으로 내려서는데 하늘을 울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십이가주는 복귀하라!”
마천주의 차가운 목소리가 밝아오는 새벽하늘에 울려 퍼졌다.
사대수신호위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십이가주들은 명이 떨어지자마자 일족을 지휘하여 퇴각하였다.
새벽 여명에 피아 구분이 가능해지자 싸움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밤새 격전을 치렀기에 모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수많은 시신을 남기고 마천도들이 서서히 퇴각하였다.
그 자리에 남은 세력은 셋.
천하방 무력대와 소마의 광풍사천대, 그리고 난주 무림인들이 삼각형을 이루고 대치하였다.
방금까지 함께 싸우기는 했으나 서로 아군이라 할 수는 없는 사이였으니 당연했다.
무한이 소마를 향해 다가가 마천검을 건넸다.
“고맙소.”
소마는 피범벅이 된 광포의 부축을 받고 앉아 있었다.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을 벌릴 수 없는 듯 기괴한 미소만 지었다.
무한에게 날린 천리전성이 그의 마지막 남은 기운이었던 것이다.
하얗다 못해 퍼렇게 질린 소마의 낯빛을 보니 이미 반쯤은 저승에 발을 걸친 듯했다.
“…….”
무한이 기운을 흘려 소마의 상태를 살폈으나 한 줌의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아 허깨비와도 같았다.
“크윽!”
가슴이 갈라지고 팔다리에 수도 없이 창상을 입은 광포가 소마를 보고 굵은 눈물을 흘렸다.
“비켜 봐라.”
어느새 다가왔는지 대막혈사가 혈랑의 부축을 받고 서 있었다.
대막혈사가 소마를 보더니 혀를 찼다.
“네놈 애비와 안면이 좀 있지. 하지만 지금 네 상태는 나도 어찌할 수 없구나. 초혼강신으로 혼백이 깨졌으니…….”
그러면서도 손을 치켜들었다.
광포가 도를 들어 막으려 하자 사추선이 팔을 잡았다. 대막혈사에게 악의가 없다는 걸 알고 지켜보기만 했다.
대막혈사가 소마의 가슴 대혈을 짚더니 뭐라뭐라 주문을 외웠다.
소마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어찌되는 겁니까?”
“강신술로 떠나려는 혼백을 일단 잡아두었다. 소마를 살리려면…… 공동산으로 가라.”
“예?”
“공동파에 부탁해보라는 뜻이다.”
“…….”
사추선이 난색을 표했다.
명문정파 공동파가 마천의 소천주를 살려 줄 이유가 없지 않나.
무한이 사추선에게 말했다.
“갑시다!”
무한은 마천주와 겨루며 폭주하는 마천을 저지할 사람은 소마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마천주와 소마가 겨룰 때 십이가주들은 분명히 참전하여 소마를 해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보고만 있었다.
그들 역시 전대 천마의 적자이자 소천주를 제거하려는 마천주의 독주가 달갑지 않은 것이다.
“삼칠 스물하고 하루를 버틸 수 있다. 그전에 당도해야 한다.”
대막혈사가 일러주고 혈랑을 부축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한이 장내를 돌아봤다.
밤새 혼전이 벌어진 고원에 시신이 널렸다.
그 사이로 남궁우와 소소, 형소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