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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78화 (178/250)

178화

크지 않았다. 아니 가까이 있어도 간신히 들을 수 있는 나지막한 소리였다.

그러나 무한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마천주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이 굳었다. 안색은 하얗게 질렸고, 몸은 무엇인가에 구속된 듯했다.

쉬쉭!

그사이 소마의 쇠꼬챙이 같은 검과 혈랑의 부러진 혈랑아가 마천주의 전신을 향해 쇄도하였다.

콰아아아!

마천주의 전신에서 기파가 터짐과 동시에 신형이 사라졌다.

느릿느릿 나아가던 무한의 검이 벼락같이 꺾이며 허공 어딘가를 찔렀다.

놀랍게도 검이 나아가는 허공에 마천주가 있었다.

마천주는 굳은 얼굴로 양손을 움직여 태극을 그리며 찔러오는 무한의 검을 받아냈다.

기이잉!

마천주가 손으로 그린 태극의 공간에 무한의 검이 갇혔다.

동시에 소마의 검이 마천주의 목을 가르고, 혈랑아가 옆구리를 훑었다.

십이가주와 장로들은 물론 백 장 밖에서 보고 있던 마천도들이 크게 놀랐다. 세 사람의 합공에 마천주가 당한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돌연 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묵빛 장영이 마천주의 전후좌우 사방에 형성되었다.

쿠오오오.

무한과 소마, 혈랑은 검과 혈랑아가 묵빛 장영과 부딪히는 순간, 거대한 힘에 사로잡힌 착각을 받았다.

묵빛 장영은 병장기에 이어 무한과 소마, 혈랑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

혈랑은 묵빛 장영에 끌려들어가는 순간, 엄청난 압력에 짓눌려 그대로 고깃덩이가 되고 말 거라는 걸 직감했다.

“크아아아!”

고함을 지르며 혈랑아를 회수하려 했으나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반면, 소마는 동귀어진이라도 하려는 듯 묵빛 장영으로 밀고 들어갔다.

무한은 여전히 머릿속에 울리는 심어에 사로잡혀 묵빛 장영과 대치하였다.

소마는 밀고, 혈랑은 끌어당기고, 무한은 대치하는 힘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우연하게 만들어진 구도에 마천주도 일시에 어쩌지 못했다.

마천주의 묵빛 장영은 천마신장의 절초 마불포황(魔佛包荒)으로, 장영에 닿은 모든 것을 끌어들여 분쇄하는 절기였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인(引)자결을 운용하여 끌어당기면 소마의 검이 기세를 더해 거침없이 밀고 들어올 것이다. 초혼강신을 펼친 소마의 검은 무시할 수 없다.

소마의 검을 밀어내려는데 무한의 검에서 나온 기운이 이를 막고 팽팽하게 대치하는 중이다.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혈랑이 혈랑아를 회수하겠다고 끌어당기니 힘이 분산되고 있다. 그러니 이대로 계속 있을 수도 없었다.

‘저놈부터 죽여야 한다!’

마천주는 본능적으로 선택을 하였다.

소마는 어차피 금지된 마공 초혼강신을 펼쳐 원기를 다하면 죽을 것이다. 혈랑은 안중에도 없다.

하지만 무한은 다르다.

무한의 나직한 한마디에 마천주는 죽음을 느꼈다.

천마신검에 이어 천마신장을 깨친 후 마천주는 천하에 적수가 없을 것이라 자부했다. 본산의 마천도를 이끌고 중원으로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그가 하마터면 허망하게 당할 뻔했다. 마천주에게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마신장은 생사경의 무공.

마천주는 생사의 경계가 허물어진 경지를 가는 중이다. 그런 그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는 건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마천주가 결심을 굳히고 마불포황의 마지막 수 파(破)자결을 운용하였다.

콰앙!

묵빛 장영이 터지며 공간이 순간적으로 오그라들었다가 확산하였다.

“크아아아악!”

그러지 않아도 혈랑아를 뽑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혈랑이 삼십 장이나 튕겨나갔다.

쇠꼬챙이 같은 검을 밀고 들어가던 소마도 십여 장이나 밀려났다. 장영이 터진 여파로 옷이 너덜너덜해졌다.

놀랍게도 무한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으나 실상 가장 심한 타격은 무한이 입었다.

소마는 밀고 들어가며 형성한 기운이 파자결의 기운을 상쇄했지만, 무한은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터진 파자결의 기운이 전신을 관통한 것이다.

“……!”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 무한은 자신이 죽었음을 자각하였다.

이는 만독곡에서 죽음 직전에 느꼈던 것과 또 달랐다.

완전한 죽음.

멸절(滅絶).

공(空).

허(虛).

……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세계였다.

육신은 사라지고 한 가닥 정신만 남았다. 정신은 어둠만 인지할 뿐 아무런 작동도 하지 않았다.

무한은 선 채로 죽음을 맞았다.

***

마천의 본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협곡.

광풍대주 광포가 초조한 얼굴로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마천의 본진.

소마가 갇혀 있는 곳을 알아보기 위해 광풍대에서 경공과 잠입술이 뛰어나다는 일조장과 삼조장, 사조장을 보냈다.

조장 급을 정탐으로 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워낙 사안이 중요하니 어쩔 수 없었다.

조장들이 잠입하고 얼마 후 마천 본진에서 난리가 났다. 사방에 횃불이 켜지고, 마천도들이 우왕좌왕 몰려다니는 게 보였다.

‘들켰나?’

아끼는 조장들이다. 실력을 의심치 않지만 저 많은 마천도들을 헤치고 살아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상황을 모르고 섣불리 뛰어들 수도 없었다.

“다른 적이 온 모양이야. 엄청난 고수 같군.”

옆에 있던 사천대주 사추선이 말했다.

두 사람이 이끌고 온 광풍대와 사천대 이백 명이 뒤에 대기하고 있다. 명만 떨어지면 곧바로 달려들 준비를 마친 상태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저기에 들어간다는 말이오?”

광포는 아무래도 수하들이 들킨 것이라 여겼다.

“그냥 밀고 들어갑시다.”

“방금 자네 입으로 미쳤다고 하고, 그 미친 짓을 하려는 겐가?”

사추선도 조바심으로 입술이 타들어갔지만, 그래도 무모하게 돌진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주군의 마지막 수야. 헛되이 죽을 수는 없어.’

사추선이 내심 중얼거리며 이 자리에서 오도가도 못 하는 처지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 했다.

사천대와 광풍대는 난주성 인근에서 마천의 추격을 따돌렸다.

그러나 뒤따라온다던 소마가 오지 않아 행적을 탐문하다 마천의 본진에 억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하러 왔다.

마천의 본진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사천대와 광풍대가 소마의 주력으로 마천에서 최고의 정예라고 하지만 전멸을 각오해야 할 상황이다.

사추선은 당장 난입하자는 광포를 진정시키고 본진에서 가까운 곳에 숨어서 정탐조를 보내고 기다리는 중이다.

“안 되겠소. 가봐야겠소.”

광포가 참다 못 해 광풍대에게 돌격신호를 내리려 하자 사추선이 팔을 잡았다.

“온다.”

혼란스러운 본진을 빠져나와 달려오는 신형이 눈에 들어왔다.

“추혈이야.”

광포는 광풍일조장 추혈을 바로 알아보았다.

잠시 후. 추혈이 달려와 보고하였다.

“주군은?”

“검천부주가 주군을 구해서 나오는 중입니다. 그리고 천주가 본진에 있습니다.”

“검천부주가 주군을 구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급합니다. 천주가 나섰습니다.”

“뭐?”

사추선은 크게 놀랐다.

마천주는 본산에 있을 때도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별로 없었다.

친정(親征)을 온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인데 본진에 머물고 있다니 의외였다.

수장이 본진에 머무는 건 군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마천도들에게 천주는 하늘이다.

천주가 본진에 있다는 건 하늘이 땅에 내려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뼛속까지 마천도인 사추선에게는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사추선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러지 않아도 희박했던 성공 가능성이 거의 불가능을 수렴하였다.

‘저 많은 인원에 천주까지…….’

사추선은 끝장이라는 걸 알았다.

광포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광풍대!”

“예!”

눈치 없는 광풍대가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했다.

“가자! 주군을 구하자!”

광포가 더 큰 목소리로 외치고 앞으로 튀어나가자, 광풍대가 뒤를 따랐다.

사추선은 평소 신중한 인물이었으나 광포가 돌격명령을 내리는 걸 말리지 않았다.

가능할 거라는 희망도 품지 않았다.

사추선이 길게 한숨을 쉬고는 이를 악물더니 몸을 돌려 형형한 눈빛으로 대기하고 있던 사천대를 돌아봤다.

자신 또한 저 자리에서 소마와 광포 그리고 그동안 자신을 따랐던 수하들과 함께 죽기로 마음먹었다.

사추선이 나직이 외쳤다.

“우리도 간다!”

사천대와 광풍대는 순식간에 마천의 본진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막는 이가 없었다.

“……?”

광포가 보니 둥글게 원진을 짠 마천도들의 시선이 반대쪽 자신들의 진을 향해 있었다.

남은 거리는 삼십여 장.

광포가 우렁찬 고함을 지르고 돌격하려는데 사추선이 잡아챘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광풍대와 사천대에게 수신호를 하였다.

돌격이 아닌 잠입신호에 광풍대와 사천대원들이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대로 따랐다.

사추선이 광포에게 말했다.

“안에서 큰일이 벌어진 모양이네. 모두 반대편 쪽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 최대한 가까이 가자고.”

광포가 보기에도 이상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광풍대와 사천대는 마천의 본진 가장 외곽에 스며들었다.

광풍대와 사천대는 애초에 마천도였기에 자연스럽게 본진에 섞여 들 수 있었다.

마천 본진은 십이호교가문에서 온 수많은 무인들로 이뤄져 있었기에 서로를 몰랐다. 게다가 혈랑과 운객, 무한이 본진을 휘젓는 바람에 서로 뒤섞여 있었다.

그러니 광풍대와 사천대가 섞여 들어오는데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밀지 말라고 눈짓하는 놈도 있었다.

- 저쪽입니다.

추혈이 광포와 사추선을 안내하였다.

그들이 당도한 순간은 마침 마천주와 무한, 소마, 혈랑이 최후의 결판을 내던 참이었다.

콰앙!

마천주의 마불포황의 장영이 터지고, 소마가 십여 장 튕겨 나오는데 두 사람이 달려들어 소마를 부축하는 게 보였다.

광풍이조장 지추원과 삼조장 곽기였다.

경공이 가장 빠른 일조장 추혈이 보고하러 가고, 이조장 지추원과 삼조장 곽기는 소마의 근처에서 암중호위를 하고 있었던 것.

초절정고수들의 싸움에 감히 끼어들지 못했던 지추원과 곽기는 소마가 재차 중상을 입자 일단 달려들어 구하고 봤다.

그 광경을 본 광포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다 죽여라! 주군을 구하라!”

우렁찬 목소리가 본진을 울렸다.

그러자 본진에 스며들었던 광풍대와 사천대원들이 병장기를 앞세워 앞으로 달려 나갔다.

비록 이백여 명이었지만 마천의 정예들이었기에 움직임이 남달랐다.

마천도들은 마천주와 무한 등이 벌인 경천동지할 무공에 넋이 빠져 있다가 광포의 고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천주님을 구하자!”

마천도들은 광포의 고함을 마천주를 구하자는 소리로 착각하고 와, 하며 원진의 중심으로 달려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광포가 당황하여 옆을 달리는 사추선에게 물었다.

사추선도 어이없었는지 뭐라 대답을 못하고 주위를 돌아보다 한 가닥 희망이 솟았다.

밀집해 있던 수많은 무리가 몰려가는데 누가 누군지 모르고 명령체계조차 없는 듯했다.

사추선이 광포에게 말했다.

“우리를 한편으로 여기는 것 같아. 십이가문 병력이 서로 섞인 모양이다.”

사실 이만한 규모의 병력에, 서로 다른 명령체계를 지닌 열두 무리가 섞인 혼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어둠과 현란한 횃불, 그리고 누가 누군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에서 마천도들은 앞만 보고 달려들었다.

사추선이 광포에게 말했다.

“광풍대는 주군을 호위하여 빠져나가라. 뒤는 사천대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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