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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77화 (177/250)

177화

마천주는 손바닥을 가슴에 세운 불가의 반장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적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고요한 자세였다. 심지어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무한이 날린 무수한 무형검이 그를 고깃덩이로 만들 것만 같았으나 옷깃조차 베지 못했다.

그는 그 자리에 있으나, 없는 듯 허허로웠다.

반대로 무한은 십이정경과 팔대기맥이 들끓어 전신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크읍!”

기어이 선혈을 한 움큼이나 토하고 나서야 폭주하는 기혈을 다스릴 수 있었다.

‘천마신장…….’

무한이 알고 있는 무학의 상궤를 벗어난 무공이었다.

무인의 길을 택한 후로 무한은 끊임없이 수련을 해왔다.

손우자를 상대하기 위해 천지를 돌아다니면서도 늘 무공에 대해 연구하고 무의를 파고들었다.

검천전에 있는 수많은 무서를 읽은 그는 걸어 다니는 장경각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전수로부터 당가의 비도술을 받은 뒤 단기간에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평범한 사람은 한 가지도 얻지 못할 온갖 기연을 얻었다.

천하제일인의 무학과 수련법.

오도(五道)의 가르침.

고벽후의 투술.

천기조양환의 공능.

검마의 기 운용술.

흑천노조의 천심공.

독왕의 천독단으로 인한 이차 환골탈태.

거기에 끊임없는 수련이 더해졌으니 약관을 바라보는 나이에 화경에 들 수 있었다.

이런 성취는 무림사에 없었으니 마음 한 구석에 오만함이 깃드는 것도 당연했다.

혈랑과 운객을 데리고 마천의 본진에 뛰어든 것에는 그런 오만함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방금 마천주와 겨루고 난 뒤 천외천의 경지를 느꼈다.

마천주의 천마신장은 인세와 그 너머를 가르는 거대한 벽과 같았다.

“…….”

밤의 고원에 침묵만 흘렀다. 횃불이 타오르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대부분은 무한의 경천격도, 마천주의 천마신장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마천주가 눈을 떴다.

“……!”

그의 눈은 세상 모든 것을 끌어 담을 듯한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 선제공격 하자. 다시 천마신장이 펼쳐지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소마의 전음이 무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소마의 신형이 하늘로 솟았다. 삼 장 높이의 허공으로 솟구친 소마가 검결지를 맺고는 마천주를 향해 날아갔다.

무한 역시 무명신법을 극성으로 펼쳤다. 이형환위라도 펼친 듯 마천주의 뒤에 나타나 경천신검을 찔러갔다. 아주 단순한 검초였다.

혈랑과 운객도 움직였다. 그들의 본능도 천마신장이 지극히 위험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둘은 좌우로 찢어져 마천주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운객의 신형은 사라져버렸고, 혈랑 역시 붉은 그림자만 남았다.

마천주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아오는 소마를 향했다. 두 눈에 일렁이는 깊은 어둠 어딘가에서 섬광이 터졌다.

마천주가 가슴에 세운 손바닥으로 반원을 그리며 밀어냈다.

고오오오.

마천주가 그린 반원의 궤적을 따라 허공이 일그러지며 소리마저 빨려드는 듯했다.

이어, 무수한 장영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소마는 어느새 거대한 무형검을 앞세워 오고 있었고, 무한의 경천신검은 극강의 뇌전을 뿌리며 마천주를 노렸다.

운객이 사라진 쪽에서 수백 가닥의 쇠꼬챙이 같은 검이 날아들고, 혈랑아는 걸리는 것은 모조리 찢어버릴 듯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네 방향에서의 공격이 거의 동시에 마천주에게 쏟아졌다.

순간, 어둠이 폭발했다.

검은 어둠이 세상을 덮은 듯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둠 깊은 곳에서 불길한 음성이 들렸다.

“탄(彈)!”

이어서,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묵직한 충격파가 터졌다.

쿠웅!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크윽!”

어둠이 걷히며 소마와 무한 그리고 운객과 혈랑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마천주는 선 자리에 그대로 있었는데, 반경 삼 장의 땅이 사방으로 균열이 가 있었다.

“크으으…….”

십여 장이나 튕겨나간 무한이 비틀거리다 신형을 세웠다. 안색은 하얗게 질렸고, 입가에서 선혈이 흘렀다.

운객은 십오 장 거리에 쓰러졌다가 억지로 일어나는 중이다.

혈랑은 십 장 거리에 반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두 자루의 혈랑아는 반 동강이 나 있었다.

오히려 소마는 건재했다. 십 장 거리에 서서 마천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역시 초혼강신은 인세의 힘이 아니군.”

마천주가 소마를 노려보며 음침하게 말했다. 짙은 어둠에 물들어 있었던 두 눈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너는 결국 죽게 될 것이다.”

소마가 웃었다.

“같이 갑시다.”

순간, 다시 소마의 신형이 사라졌다.

파파팟!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 마천주의 전신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흥! 빨리 죽고 싶어 날뛰는구나.”

마천주가 코웃음을 치고는 손을 휘저어 날아드는 기운을 해소했다.

소마는 멈추지 않고 연신 검결지를 꼬아 무형검을 날렸다.

그때, 소마에게 쇠꼬챙이 같은 검이 날아들었다.

“잠시 빌려주겠소.”

운객이 자신의 검을 소마에게 던진 것이다.

이미 무형검을 자유자재로 쓰는 소마이다. 하지만 손에 검을 들고 있으면 내력의 소모가 그만큼 줄어든다.

운객은 자신이 이미 깊은 내상을 입어 운공이 불가능한 상황이니 차라리 소마에게 검을 내준 것이다.

마천주라는 강력한 적을 앞에 둔 운명공동체이니 당연한 선택일 수도 있지만, 처음 보는 사이에 자신의 병기를 내준다는 건 운객이 그만큼 상궤에 벗어난 사고방식을 지닌 자라는 걸 알려준다.

“좋은 검이군.”

볼품없는 쇠꼬챙이 같은 검을 잡아챈 소마가 운객을 향해 한마디 하고는 검을 찔러갔다.

파파팟!

익숙지 않은 검이지만 기운을 담을 수 있으니 내력의 소모를 현저히 줄일 수 있었다.

그사이, 반무릎을 꿇고 있던 혈랑이 핏덩이를 퉤, 하고 내뱉고는 부러진 혈랑아를 들고 달려와 참전하였다.

“이 새끼! 내 도를 부러뜨려?”

마천주에게 대놓고 욕을 할 사람은 혈랑밖에 없을 것이다.

무한은 운객과 혈랑이 하는 양을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전신 근육에 배인 기운이 서서히 움직이며 경혈을 따라 흘렀다.

무한의 머릿속에 조금 전 상황이 빠르게 스쳐갔다.

경천신검에 뇌전의 기운을 응축하여 뇌강을 형성하였다. 화경에 이르며 풍운조화공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와중에 얻은 뇌강이다.

그런데 천마신장의 반탄력에 의해 오히려 자신이 당했다. 심지어 두세 배 더 강해져 돌아왔다.

‘그렇다면…….’

무한은 뭔가 천마신장을 상대할 단초를 얻은 듯했다.

하지만 어렴풋한 느낌뿐이다. 한 번 더 상대하면 알 것도 같은데 천마신장이 위력으로 보아 그때는 살아남기 힘들 것 같았다.

천마신장이 네 사람의 공격을 동시에 상대하느라 분산되어 그나마 목숨을 건졌지, 일대일로 부딪혔다면 요행을 바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데 또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천주의 천마신장은 완벽하지 않아.’

천마신장이 어떤 무공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어딘가 모르게 마무리가 부족한 듯했다.

운객은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마천주에게 다가가는 무한을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공격을 할 거면 급습해야지,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마천주는 천마신장을 연이어 펼칠 수는 없었던지 소마와 혈랑과 초식으로 겨루고 있었다.

초혼강신으로 원기를 뽑아 쓰는 소마가 마천주와 주로 격돌하고, 혈랑이 늑대처럼 주위를 맴돌다 결정적인 순간 공격하는 식이었다.

마천주는 두 사람의 공격을 느긋하게 상대하고 있었다. 끝장을 낼 수 있음에도 초식을 겨루는 건 소마가 초혼강신으로 자신의 원기와 잠력을 모두 소진하고는 스스로 무너지기를 바라는 듯했다.

무한이 가세하면 승기는 못 잡아도 평수를 이룰 것 같은데, 내딛는 한 발 한 발이 더없이 느려 보이니 운객은 답답했다.

그러나 실상 마천주는 오히려 다가오는 무한에게 잔뜩 신경을 곧추세우고 있었다.

분명 다가오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다. 걸리는 기운조차 없는데도 본능이 경고하고 있다.

그로서도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한은 걸어가면서 천심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천심공은 상대의 속을 읽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는 심령을 제압할 수도 있다.

무한은 천심공의 기운을 쏘아 보내며 마천주의 의식을 분산시키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여전히 천마신장을 파훼할 방법을 찾았다.

거리가 좁혀지자 철판 같은 장력이 날아왔다.

천심공의 기운에 불안을 느낀 마천주가 참다못해 장력을 날린 것이다.

무한이 스르륵, 미끄러지듯 무명신법을 펼치며 방위를 바꿨다. 이어서 검을 들어 천천히 찔러갔다.

검은 느릿느릿 마천주를 향해 다가갔다. 기운조차 실지 않았다.

경천신검에 담긴 것은…… 생사를 가르겠다는 무한의 의지뿐이었다.

그것은 비도술을 깨치며 얻은 극의였다.

격중 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다. 반드시 생사를 가르겠다는 의지를 담았고, 그 의지에 따라 비도는 누군가의 생사를 갈랐다.

지금 무한의 경천신검에 담긴 의지는 비도를 날릴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여유로웠던 마천주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불안의 실체를 느낀 것이다.

‘저놈! 반드시 죽여야 한다!’

무한이 보기에는 어리지만 장차 심양조를 넘어선 고수가 될 것이라고, 마천주는 직감하였다.

무한은 천독단을 복용하고 이차 환골탈태한 후 화경의 길에 들어섰다. 이는 중단전 수련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경지의 경계는 딱 잘라 구분할 수 없었다. 더욱이 화경 이후의 경지는 누구도 이끌어 줄 수 없는, 스스로 깨치고 나아가야 하는 경지다.

그러기에 무한도 어느 순간 자신이 화경의 길을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공교롭게도 이때 커다란 심적 변화도 연달아 일어났다.

할아버지 심양조 사후 무한은 천지간에 홀로 남겨진 신세였다. 고립된 상황에서 분노의 칼을 갈며 살았다.

그런데 외조부 흑천노조를 만나고, 이어서 어머니와 해후했다. 그리고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까지 만나고 의붓동생이라는 새로운 인연도 생겼다.

무한 자신은 달라진 것이 없건만 주위가 바뀌면서 그의 내면세계 또한 크게 바뀌었다.

이전까지 천하방을 해체하고 혈육의 복수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무한의 시선은 그 너머 무언가를 향하고 있었고, 어느 순간 자신이 무의 극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너무나 광막한 세상이 펼쳐졌다.

머릿속에 담긴 수많은 무공 하나하나가 각각의 무의를 품고 있었고, 그 무의의 끝을 보는 것 또한 지난한 일이었다.

흔히 만류귀종이라고 하지만, 한 갈래의 끝을 보는 것 또한 평생을 수련해도 어렵다.

그런데 마천주의 천마신장과 격돌한 후 머릿속이 명료해졌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깨달은 것이다.

생사를 가른다!

누군가 머릿속에 대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마치 주문처럼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심어(心語)가 기어이 무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생사를 가른다!”

무한의 검이 마천주를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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