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76화 (176/250)

176화

운객은 엄청난 기운이 은형막을 찢고 들어오자 재빨리 거뒀다.

바로 신형이 노출되고 마천도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놈을 데려와라!”

마천주의 명이 떨어지자 마천도들이 운객을 포위하고는 병장기를 앞세워 밀어붙였다.

도무지 파고들 틈이 없는데다 소마까지 부축한 운객도 어쩔 도리 없이 계속 밀려 뒷걸음질 쳤다.

잠시 후 수천 마천도가 원형으로 에워싼 한가운데 무한과 혈랑, 운객이 섰다.

그사이 마천주는 수하들이 가져온 태사의에 앉아서 잡아놓은 물고기를 보듯 여유로운 얼굴로 무한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워싼 마천도들이 밝힌 횃불과 화톳불로 주위는 대낮같이 환했다.

“놈들을 직접 하문하시겠습니까?”

마의를 걸친 음침한 인상의 문사가 마치 무한 등이 이미 제압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듯 보고했다.

“명색이 소천주인데 천도들 앞에서 신문할 수는 없지. 천도들을 백 장 밖으로 물려라!”

마천주가 명하자 갈의문사가 소리쳤다.

“불을 밝히고 백 장 밖에서 대기하라.”

마천도들이 화톳불과 횃불을 꽂아두고는 백 장 밖으로 물러났다.

마천주를 따라왔던 네 명의 흑의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기운을 흘렸다. 그러자 두터운 기막이 형성되더니 음파가 차단되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마천주가 운객이 부축하고 있는 소마를 향해 손짓을 하였다.

허공을 격하고 소마를 점혈하자 무한이 찍어놓은 수혈이 풀렸다.

“크윽!”

소마가 신음성과 함께 깨어났다.

자신을 부축한 운객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다 무한을 보자 상황을 이해했다.

“나를 앉혀줘라.”

운객이 소마를 바닥에 앉혔다.

이런 상황에서도 소마는 웃는 듯 보였다.

마천주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천주, 여기가 네 무덤이라고 하지 않았나? 독마, 그 녀석이 자신 있다고 고집을 부리기에 맡겼더니 그새 빠져나갈 궁리를 해? 역시 소천주답군.”

소마가 주위의 지형을 휘휘 둘러보고는, 이어서 멀리서 주위를 에워싼 마천도들에게 시선을 주고는 말했다.

“죽을 자리로 나쁘지는 않군. 저기 있는 놈들을 모두 순장을 시켜준다면 생각해보겠소. 십이가주는 꼭 같이 묻어주시오.”

마천주가 픽, 하고 웃었다.

“그건 곤란하군. 삼도천은 혼자 건너야겠어.”

그러더니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을 그었다.

순간, 무한이 경천신검을 내밀었다.

치치칙!

마천주와 소마 사이. 정확히는 소마 일 장 거리에서 마천주가 쏘아보낸 암경과 무한이 발출한 기가 부딪혔다.

마천주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무한을 보았다.

“네놈이 왜 마천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냐?”

“인연 때문이라 해둡시다.”

무한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수천의 마천도가 에워싼 채 살기를 흘리고 있었으나 무한은 거리낌이 없었다.

“역시 소천주가 중원과 내통하고 있었군.”

마천주가 옆에 늘어선 십이가주와 장로들을 향해 말했다.

십이가주와 장로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소마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혁련후! 아무리 제 발 저리더라도 그렇지. 마천의 종가(宗家) 소가를 간자로 모는 건 심하지 않느냐?”

이어 부릅뜬 눈으로 마천도들을 주욱, 훑어보고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미소였다.

말대로 원래 마천의 종가는 소가였고, 나머지 가문은 가신가문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며 가신가문이 마천도들이 믿는 신앙을 지키는 호교가문이 되며 위상이 바뀌었다.

오래전 소가의 가세가 크게 몰락했을 때 처음으로 호교가문에서 마천주가 나왔다.

곧바로 소가에서 다음 대를 잇긴 했으나, 그 이후 호교가문에서도 마천주를 이을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전대 마천주가 승천한 뒤 십이호교가문이 소마의 나이가 어리다는 걸 이유로 마천주의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이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결국 중원 원정에서 가장 공을 세운 이를 추대하기로 하는 희극까지 벌인 뒤 혁련후가 자리에 올랐다.

마천은 지금 그 후유증을 앓고 있는 중이다.

세월이 흐르며 소마가 성장하자 혁련후의 독주를 견제하고자 하는 마천 원로 사이에서 소가로 양위해야 한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나오고, 이는 혁련후와 소마가 대립하는 단초가 되었다.

소마가 마천십이가주와 장로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혁련후는 혁련가 전대 가주 혁련무를 죽이고 천주의 자리를 찬탈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지. 십이가주와 장로들도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하였으니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무슨 헛소리냐!”

마의문사가 호통을 쳤다.

“궁책! 혁련무를 사지로 몰아넣은 계책은 네가 낸 것 아니냐?”

“흥! 소천주, 추하구나. 차라리 목숨을 구걸하는 게 어떠냐?”

“하하. 내 목숨이 뭐가 대단하다고 구걸까지 한단 말이냐? 언제든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갑자기 소마의 전신에서 기혈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펑, 퍼펑!

주요 대혈에서 퍼런 빛이 터져 나오며 소마가 천천히 일어났다.

분명 양다리가 부러지고 단전까지 부서졌는데도 소마의 전신에서 맹렬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마천주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과연 초혼강신(招魂降神)의 수법까지 터득하고 있었군. 하지만 이제 기어이 죽겠구나. 동귀어진을 할 상대로 누구를 택하고 싶으냐?”

소가의 초혼강신은 선대의 혼을 불러 몸의 팔대기문을 모두 열어 잠력을 폭발시키는 공법이다.

잠력이 모두 발휘되면 원기를 잃고 죽을 수밖에 없는 최후의 절초이기도 하다.

“독마 따위가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내가 바란 건 네놈이 직접 나를 신문하는 거였지. 영악하게도 얼굴조차 비치지 않더군.”

소마가 독마의 모진 고문을 버틴 이유가 마지막 순간 사실을 밝힐 자리에 마천주를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돌연 무한이 나타나는 바람에 동귀어진의 수가 틀어지고 말았다.

후일을 도모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의외로 마천주가 나타나 길을 막으며 이렇게 대면하게 됐다.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났으니 어쨌든 버틴 보람이 있군.”

푸르스름한 기운이 소마의 전신에 흘렀다. 이따금 튀는 푸른 불꽃은 귀기(鬼氣)였다.

마천주가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그래서 내가 너를 끝내 믿지 못한 것이다. 언제고 뒤통수를 칠 놈이라는 건 진작에 알았지.”

“검마가 죽어가며 부탁하더군. 혁련가의 배신자를 처단해달라고.”

“크크크.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마천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마지경에 오른 뒤 그는 스스로를 천하제일인이라 여겼다. 당연히 신강의 패자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중원에 진출하여 온 천하를 호령하는 권좌에 앉을 생각이다.

오랜 숙원을 이루는 길에 조무래기 몇 해치우는 건 귀찮은 일일 따름이다.

“천마신장에 당하고도 이리 오래 살아있는 놈은 네가 마지막일 것이다.”

마천주가 음침한 괴소를 흘리며 한 발 내디뎠다.

십이가주와 장로들이 모두 뒤로 물러났다.

마천주에게 내려오는 세 가지 독문무공.

천마신검과 천마신장, 그리고 천마지(天魔指).

그 어느 하나만 익혀도 천마의 위에 오르는 데 부족함이 없다. 마천주는 천마신검에 이어 천마신장까지 대성함으로써 마천의 역사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고수로 등극했다.

소마가 나서려는데 무한이 한 발 앞서 나섰다.

“비켜라!”

소마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상대하는 동안 도주해라. 초혼강신으로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야.”

육신이 망가져 기습이 아니면 초혼강신으로도 마천주를 상대하기 어렵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소천주가 혈족을 죽인 저 배신자를 없애기 전에, 마천의 천마가 얼마나 강한지 겨뤄보고 싶군요.”

무한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마천주의 네 호위가 안에서 오가는 소리를 막고 있는 기막을 뚫고 고원에 울려 퍼졌다.

멀리서 궁금해하며 이쪽을 지켜보던 마천도들이 일제히 야유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천마시여! 저놈을 죽여주시옵소서!”

엎드려 경배하는 마천도까지 있었다.

마천주가 신의 대리인이라면 천마는 반신이나 마찬가지다. 마천주라고 해서 모두 천마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천주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심양조가 맹랑한 손자를 두었구나. 애석한 일이로군. 심씨의 대가 여기서 끊어질 터이니!”

약관에 이르지도 못한 놈이 천지분간을 못하니 가당치도 않아 분노는커녕 웃음만 나올 뿐이다. 이어 정색을 하고는 말했다.

“네 머리는 잘라서 천하방으로 보내주마!”

순간 마천주의 신형이 휙, 사라졌다.

무한은 이미 전신 모공을 열고 천지의 기운까지 끌어들여 대비하고 있었다.

여기서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예상치 못한 일초가 필요했다.

‘처음부터 천마신장을 펼치지는 않겠지?’

마천주가 자신을 경시하고 있다는 게 기회라면 기회였다.

소마를 저 지경으로 만든 천마신장의 위력을 가늠할 수 없었다. 천마신장을 펼치기 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비기로 모험을 걸기로 했다.

마천주가 다시 한 발을 내디뎠다.

순간 무한은 물론 혈랑과 운객조차 땅이 꿀렁거리는 느낌을 받고 비틀거렸다.

소마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조심해라! 천마신장이다!”

무한의 기대와 달리 마천주는 마천도들이 보는 앞에서 천마신장을 유감없이 발휘할 모양이다.

다시 한 번 내딛는 마천주.

그와 동시에 공간이 휘어지는 듯 전신을 비트는 압력이 몰아쳐왔다.

‘세 번째 걸음을 내줘선 안 돼!’

퍼뜩 스치는 생각에 무한이 검을 세우곤 끌어모았던 기운을 일시에 방출하였다.

파아아악!

무한의 기운은 마치 봄날 아지랑이와도 같이 은은하게 퍼져갔다.

세 번째 걸음을 옮기려던 마천주가 잠시 멈추고 흥미롭다는 듯 무한을 보았다.

무한이 그런 마천주에게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어째서 하늘마저 놀라게 한다며 경천신공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생각하오?”

“……?”

느닷없는 물음에 마천주의 머릿속이 잠시, 정말 순간적으로 대답을 찾는 찰나.

쩌적, 쩌저적!

아지랑이와도 같은 기운이 찢어지며 살을 저미는 예리한 검기가 허공을 채웠다. 움직이는 순간 저절로 베일 듯 중첩된 무형검이었다.

무한이 세웠던 검을 그대로 올려 하늘을 찔렀다.

콰지직!

허공이 부서지는 듯한 기음과 함께 중첩된 무형검이 일제히 폭발하였다.

보는 이에게는 정말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천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걸음을 걷자, 무한이 검을 세웠다가 마천주에게 한마디 묻고 그대로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갑자기 쩌적 소리에 이어 콰지직 하는 기음이 터지더니 주위가 온통 하얀 빛으로 덮였다.

무한과 마천주의 거리는 십 장 여. 새하얀 빛이 두 사람을 덮었다.

새하얀 빛을 보는 운객의 눈에 감격의 빛이 어렸다. 무의 끝을 보는 듯한 느낌에 죽을 지경에 처했지만 아쉽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살수의 삶이 아니라 무의 극의였음을.

그럼에도 사부의 뜻을 저버리지 못하고 살수로서의 삶을 살아왔는데…….

‘사부, 이제 이 마음을 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운객의 눈에서 끝내 눈물이 흘렀다.

새하얀 빛이 터진 건 순간적이었고, 바로 사라졌다.

그리고 무한과 마천주의 신형이 드러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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