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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75화 (175/250)

175화

남쪽은 마천의 선발대가 향한 곳이다. 상대적으로 북쪽 진영이 허술했다.

저 멀리 난주성이 보인다.

다소 무리하게 마천 본진에 잠입한 이유가 마천 수뇌부의 면면과 진군로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십이지마 도마를 상대해본 무한이다. 게다가 수는 많지만 무력대가 아니라 일반 마천도들이다.

운객과 혈랑과 공조하면 어렵지 않게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그런데 마천주가 있을 줄이야. 설마 이렇게 바로 마천주와 맞닥뜨릴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허공에서 방향을 정한 무한은 내려서자마자 도를 휘두르며 길을 뚫었다.

손에 익은 검이 아니지만 일반 마천도들이 막을 수 있는 도가 아니었다.

텅! 쨍!

폭풍처럼 몰아치는 도기에 암기가 힘을 잃었고, 막아서는 병기가 부러졌다.

그러나 소마의 안위까지 챙기려니 나아가는 속도가 확실히 더디었다. 게다가 위치가 노출되며 마천도들이 꾸역꾸역 몰려왔다.

“내려달라니까. 천주가 오면 너도 죽는다. 그럼 네 모친이 나를 두고두고 원망할 거다. 지옥에서 그 원망 받을 일 없다.”

“그럴 일은 없을 거요.”

무한은 자신을 믿었다. 마천주가 아니라 그 누가 와도 뚫고 나갈 자신이 있었다.

“이거 참. 내 처지가 정말 말이 아니군…….”

소마가 죽을 지경에 처한 걸 구할 줄은 몰랐다.

그와의 인연이 있긴 하지만 모른 척하고 간다 해서 누가 뭐라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너는 정말 이상한 놈이야.”

소마가 중얼거렸다. 내공을 잃었지만 목소리는 명료했다.

“마천 십이호교가문이 모두 나왔다. 각기 일천 명을 징발하였고, 본산 무력대 십이대도 출정했다.”

소마는 무한의 등 뒤에서 상황을 일러주었다.

“십이호교가문의 일천 명, 도합 만이천 명은 그리 큰 위협이 아니다. 본산 무력대가 진짜라고 할 수 있지. 선발대로 간 놈들이 그놈들이다.”

파팟!

챙!

무한은 길을 뚫으며 소마의 말을 들었다.

“극악한 놈들은 마천 사대절지(四大絶地)에 있는 놈들이야. 너도 지옥곡 놈들을 봤지. 그놈들까지 다 데려왔다더라고. 천주가 미친 거야. 크윽!”

무한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격렬하게 움직이자 소마가 신음성을 터뜨렸다.

“말하지 마시오.”

“아니. 나는 괜찮아. 아직은 죽지 않는다. 이렇게 차라리 말하는 게 나아. 어디까지 했더라. 아, 사대절지는 극악하지만, 그래도 네 상대는 아니지.”

소마가 쿨럭, 하고 피를 토하는 게 느껴진다.

‘이대로는 안 돼.’

혈랑과 천주가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천주는 혈랑이나 소마가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할 거라 자신하는 듯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앞을 가로막을 수 있을 것이다.

무한이 전력을 다해 도를 그대로 땅에 내리찍었다.

쿠웅!

기파가 터지며 가까이 있는 마천도들이 휩쓸려 나뒹굴고, 뒷열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 운객! 이 사람을 부탁해. 세 번째 의뢰다!

- 나는 사람을 죽이는 살수라니까. 자꾸만 살리는 의뢰를 하면 어쩌란 거냐.

운객이 투덜투덜거렸다.

- 이목을 끌어줘. 시선을 가려야 해.

순간, 무한의 앞쪽 마천도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크윽!”

사방에서 횃불이 일렁이고 있어 오히려 눈이 현란하니 어떻게 당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운객이 다가오자 무한이 소마를 내려놓고 바로 수혈을 짚었다. 동시에 경천신검을 뽑아 허공을 찔렀다.

콰앙!

뇌전기가 폭사하며 벼락같은 섬광이 터졌다.

“아앗!”

갑작스레 눈을 찌르는 환한 빛에 모두 시선을 돌리거나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사이 구름 같은 기운이 스륵, 밀려오더니 소마의 신형이 사라졌다.

무한의 눈에는 반투명한 은형막(隱形幕)에 가려진 운객과 소마가 보였으나, 마천도들에게는 마치 사람이 사라진 걸로 보여 혼비백산하였다.

확실히 무력대와 일반 마천도는 차이가 있었다.

“귀, 귀신이다!”

“정신 차려! 은신술이다. 은신술의 고수가 있다. 주위를 잘 살펴라!”

놀랍게도 운객은 그런 마천도들 틈으로 스며들어 나아가고 있었다.

정면으로 맞닥뜨려 눈치챈 자는 여지없이 쇠꼬챙이 같은 운객의 검에 찔러 쓰러졌다. 마치 저절로 쓰러지는 것만 같았다.

운객은 상대를 해치우는 즉시 자리를 이동했다. 이형환위처럼 순간적으로 이삼 장을 움직였다.

소마를 허리춤에 끼고 저렇게 움직일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한은 마천도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위장한 옷을 벗고, 등에 맨 경천신검을 뽑았다.

스르릉!

이어 운객이 간 방향으로 몸을 날리며 검초를 펼쳤다.

파파팟!

예리한 검기가 그물처럼 퍼져나가자 마천도들의 팔다리가 튀어 올랐다.

끔찍한 살육전이었다. 상대가 되지도 않는 하수들을 일방적으로 도륙하는 셈이니 무한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운객과 혈랑은 자신이 데려왔으니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 때로는 독하게 손을 써야 한다고요. 그래야 적들이 지레 겁먹고 물러나죠.

어디선가 귀영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만독곡 혈전을 복기하며 귀영이 자신에게 한 말이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에게는 감히 항거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다.

“어린놈이 독하구나!”

하늘에서 호통소리가 들리더니 휙, 하고 쌍극을 든 사내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주위 마천도들이 우르르 물러나 원형으로 사람의 벽을 쌓았다.

중년 사내는 잘 단련된 몸을 지녔는데 무척이나 냉혹해 보이는 자였다.

“나는 마천장가(魔天張家) 가주 장교석이다. 네놈의 정체를 밝혀라!”

마천도들의 희생이 커지자 드디어 수뇌부들이 나서는 모양이다.

“검천부 심무한!”

무한이 자신이 이름을 밝혔다.

그러자 장교석이 크게 놀라 외쳤다.

“천하방 검천부?”

그러더니 눈에서 차가운 한광이 쏟아졌다.

“미친놈! 마천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단신으로 본진까지 들어와? 네놈이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말이 길군.”

무한이 휙, 검을 뒤로 그었다.

기습을 하려던 자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장교석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순순히 항복하면 이 자리에서 죽이지는 않겠다.”

무한의 신분을 듣자 사로잡을 욕심이 생긴 모양이다.

“싸울 생각이 없으면 가보겠소.”

“흥! 그럼 죽어랏!”

무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교석이 쌍극을 교차하여 휘둘렀다.

무척이나 빠른 속도였는데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세찬 폭풍이 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놀랍게도 무형이어야 할 소리가 마치 칼날처럼 무한을 베어왔다.

무한이 검을 흔들어 소리의 칼날을 쳐냈다.

콰앙!

소리가 터지며 그 자리에 새하얀 극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반 장 크기의 극은 실제가 아니라 강기였다.

소리에 감춰진 칼날이 옆구리를 밀고 들어올 찰나, 무한이 왼손에 뇌전의 기운을 담아 그대로 내리쳤다.

파지직!

순간적으로 번갯불이 치는 듯 섬광이 터지며 강기가 터져나갔다.

파파팍!

강기의 파편이 무한을 덮쳤으나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 일수오검 삼십육방을 찔렀다.

장교석은 쌍극을 회전시켜 검초를 막으면서도 내심 당황했다.

부딪힐 때마다 묵중한 충격이 전해오는데 이는 단순한 내공이 아니었다.

찌르기 한 번으로 철인형을 우그러뜨리는 무한이다. 그의 일수오검에는 수십만 번을 가르고 찌르는 사이에 생긴 극의가 담겨 있었다.

장교석은 쌍극을 동시에 놀리며 간신히 일수오검을 막아냈으나 안색은 이미 침중하게 굳어 있었다.

여기서 무한을 죽이려면 자신 또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무한의 무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먼저 나선 자신의 경솔함을 탓했다.

사실, 십이가주와 장로들은 무한이 독마의 막사에서 나오는 순간 당도해 있었다.

다만 무한이 소마를 업고 나오니 공격할 수가 없었다.

마천주는 소마가 배반을 했다고 하나, 사실 확실하지가 않다.

소마는 전대 천마의 직계다. 마천 내에는 소마를 따르는 이들도 상당수 있다. 그래서 십이가주나 장로들은 누가 먼저 나서주기를 바랬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무한이 뇌전기를 터뜨리며 시야를 가리는 사이 은신술의 고수가 소마를 데려갔다.

가주들과 장로들은 차라리 잘됐다고 여기며, 소마는 못 본 척 하고 무한을 잡으려 했다. 다만, 뇌전기까지 터뜨리는 걸 보고 무한의 무공 수위를 파악하고자 했다.

마천장가는 몰락한 소가의 뒤를 이어 십이호교가문에 올랐다. 그렇기에 이번 원정에서 공을 세울 기회를 찾고 있었다.

무한이 설치자 장교석은 기회라고 여기고 바로 나섰다. 그리고 지금 후회하는 중이다.

“이놈이 천하방 검천부주라잖소. 사로잡으면 공을 세울 수 있으니 합세합시다!”

장교석이 소리쳤으나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장충! 장궁!”

장교석이 다급한 나머지 자신의 심복들을 찾았으나 이미 늦었다.

무한의 검이 물처럼 흐르더니 장교석의 옆을 스쳤다.

서걱!

왼팔이 뚝, 떨어졌다.

“크윽!”

장교석이 황급히 옆으로 물러나며 남은 손에 든 극으로 무한을 경계하였다.

“죽일 생각은 없소.”

무한이 몸을 돌리는데 두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안 돼!”

장교석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졌고, 무한의 검이 횡으로 흘렀다.

“컥!”

역시 쌍극을 든 두 사람이 목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충아, 궁아!”

장교석이 위기에 몰렸을 때 부른 심복들이었다. 가주의 팔이 잘리자 기습을 하려다 죽고 말았다.

“으……!”

장교석이 독기를 풀풀 날리며 무한을 노려보았으나 달려들지 않았다.

만일 여기서 무한과 결전을 보다 자신이 죽는다면…… 마천장가 일천 마천도는 다른 가주들에 의해 칼받이로 소모되고 말 것이다.

그 이후 전개는 뻔하다. 장가는 십이호교가문에서 탈락하고 다른 가문이 이를 대신할 것이다. 가문의 흥망성쇠에 따라 십이호교가문이 바뀌는 일은 수시로 있었다.

소가를 대신하여 십이호교가문이 된 지 이십여 년. 자신이 물려받는 지는 고작 삼 년 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이 여기서 죽는다면 마천장가는 앞날은 보나마나다.

장교석은 무한을 노려보다 수하들에게 죽은 심복들의 시신을 수습하라 이르고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중원정벌에 나서자고 결의를 다지던 때가 엊그제인데 이렇게 가문의 안위만 챙기다니 놀랍소. 마천장가는 이번 원정에서 빠지겠소.”

그때 하늘이 우렁우렁하며 마천주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쓸모없는 것들…… 아직도 가문의 이익이 마천의 사명에 앞선 것이냐…….”

이어 피투성이가 된 혈랑이 무한의 옆에 뚝, 떨어졌다. 혈랑이 불평을 터뜨렸다.

“크으으. 너, 너는 왜 이리 멀쩡한 거냐.”

무한이 보니 혈랑 역시 큰 상처는 없다. 대부분이 혈랑아에 의해 죽은 마천도들의 것인 모양이다.

그때, 원형 포위망의 한쪽이 좌악 갈라지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마천주는 검은 장포에 흑관을 쓰고 있었다. 얼굴만 보자면 약간 삭막하다는 것만 빼면 청수한 중년인이었다.

그의 뒤로 네 명의 흑의인이 따라왔다. 각기 자신의 병장기 외에 검과 도, 창과 간을 들고 있었다.

“대막혈사의 제자에 검천부주라…… 저놈은 은잠화(隱潛花)의 제자인가?”

마천주가 허공을 향해 손짓을 하였다.

멀리서 신음성이 터졌다.

“크읍.”

포위망이 다시 한차례 벌어지며 삼십여 장 거리에 은형막이 벗겨진 운객이 소마를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한이 내심 미간을 찌푸렸다.

‘십이가주와 장로들이 하는 양을 보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온 것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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