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달이 떴다. 반달보다는 조금 더 통통한 달이 은은한 빛을 뿌리자 밤그늘이 더욱 깊어졌다.
운객은 교묘하게 밤그늘 사이를 지나갔다.
빛이 있기에 오히려 어둠이 깊었고, 운객은 이를 잘 활용했다.
무한과 혈랑은 뒤를 따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운객은 너무나 대범하고 자연스럽게 적진을 뚫었다. 때로는 경계병 지척을 태연히 지나기도 했다.
-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중요하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은 사람의 주의를 끌게 되거든.
마천도들은 십 리에 걸쳐 무리지어 야영 막사를 세우고 서로 교차경계를 하고 있었다.
기운을 감추고 건물에 잠입하는 건 무한이나 혈랑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편평한 지형에 펼쳐진 적진에 잠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 기가 막히군.
혈랑이 앞서 가는 운객의 뒷모습을 보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외부 야영지를 뚫자 안쪽의 경계는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 흩어지자.
너른 고원에 수많은 막사가 펼쳐져 있었기에 어느 곳이 본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랑과 운객을 데려온 이유도 혼자서 다 뒤질 수 없기 때문이다.
혈랑과 운객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무한은 진영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기운을 감추고 신법을 펼쳤지만 확실히 운객과 함께 들어올 때보다 나아가는 속도가 떨어졌다.
고만고만한 막사를 헤치고 가던 무한의 눈에 멀리 다른 막사보다 서너 배는 큰 막사가 들어왔다.
큰 막사 주위는 다른 막사가 없이 탁 트여 있었고, 경계병이 둘씩 짝지어 삼 장 거리를 빙 두르고 있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퍼엉!
혈랑이 사라진 쪽에서 기파가 터졌다. 그새 발각된 모양이다.
“자객이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호각소리가 울려 퍼졌다.
곳곳에서 횃불이 밝혀지고 막사에서 마천도들이 무기를 들고 뛰쳐나왔다.
그 통에 무한도 가만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주위를 살피다 마천도들이 뛰쳐나간 빈 막사로 들어갔다.
“뭐야? 왜 다시 들어오는…….”
침상에 앉아 뒤늦게 신을 신고 있던 마천도가 흘깃 무한 쪽을 보다 눈이 크게 벌어졌다.
“여기…….”
마천도가 고함을 지르려는데 무한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손날로 마천도의 목을 가격하자 그대로 푹, 고꾸라지며 엎어졌다.
무한이 바깥을 살피고는 쓰러진 마천도에게 다가가 겉옷을 벗겨 야행복 위로 걸쳐 입었다.
마천도의 머리 두건까지 덮어쓰고 모래바람을 막는 목도리를 칭칭 감아 얼굴 아랫부분을 가렸다.
경천신검은 등 뒤로 매고 피풍의를 걸친 후 마천도의 칼을 옆에 찼다.
변복을 마친 무한은 막사를 나와 큰 막사 쪽으로 갔다.
소동이 일어났건만 큰 막사를 지키는 경계병들은 동요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기다, 저쪽으로 도주한다!”
“이쪽으로 몰아!”
혈랑이 있는 쪽에서 연신 고함이 터졌다.
어둠 속에서 잠시 상황을 살피던 무한이 품에서 죽통을 꺼내 불을 붙였다.
피유웅!
퍼엉!
하늘로 올라간 폭죽이 터지며 붉은 연기가 퍼졌다.
“동요하지 마라.”
경계병들이 잠시 동요했으나 경계조장이 외치자 이내 가라앉았다.
“저쪽에서 폭죽이 올라왔다. 너희 둘이 가서 살펴봐라.”
잠시 후, 두 사람이 도를 앞세워 왔으나 무한은 이미 큰 막사 뒤쪽으로 자리를 옮긴 후였다.
“아무도 없습니다.”
수색하던 경계병이 외치는데 멀리서 붉은 그림자가 빠르게 날아왔다.
무한이 올린 폭죽 신호를 보고 혈랑이 달려오는 중이다.
“쫓아라!”
아우성 소리가 뒤를 따랐다.
침투한 자객이 자신들 쪽으로 오자 경계조장이 칼을 뽑고 외쳤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를 지켜라!”
경계병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혈랑이 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날아온 혈랑은 무한은 보이지 않고 큰 막사를 지키는 경계병들만 있자 획, 하고 혈랑아를 후려쳐 강기를 날리곤 다시 날아갔다.
“어, 어…….”
경계병들은 본능적으로 일제히 옆으로 피했다.
쾅!
대충 뿌린 것 같았지만 세 줄기 강기가 땅바닥을 뒤집고 흙먼지를 날렸다.
무한은 그 틈을 타서 막사로 들어갔다.
막사 안에는 또 다른 막사가 있었다.
무한이 들어서자 어둠 속에서 검이 찔러왔다. 들어서기 전에 이미 두 사람이 매복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무한이 비도를 날렸다.
퍽!
두 사람이 소리 없이 무너졌다.
그때, 천막 안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천주, 아무래도 당신을 구하러 누가 온 것 같소. 하지만 이미 늦었소.”
무척이나 음산한 목소리였다.
“입을 열지 않으면 죽여도 된다는 명이오. 누군가 구하려 들어도 역시 마찬가지로 소천주부터 죽이라고 했소.”
“크크. 내가 그리 중요한 사람이라니 정말 과분한 대접이군.”
‘소마?’
낯익은 목소리에 무한이 흠칫 놀랐다. 슬며시 휘장을 밀고 안을 살폈다.
막사 한가운데 의자에 소마가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모진 고문을 받았는지 전신이 피투성이다.
소마의 앞에는 작달막한 노인이 비수를 들고 서 있었다.
노인이 비수를 들이대고 소마에게 물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소. 마천검 말고 검마가 건네준 게 무엇이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하는 수 없군.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고통 없이…….”
노인이 비수를 치켜드는데 소마가 무한 쪽을 보며 웃었다.
“여기는 웬일이냐?”
노인이 소마의 시선을 따라 보다 무한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쉬쉭!
두 자루의 비도가 날아갔다.
“적이다! 경계병은 대체 뭐하는 것이냐!”
노인이 고함을 지르며 손에 든 비수로 무한의 비도 하나를 쳐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쌔애액!
두 번째 비도가 갑자기 속도를 더해 노인의 목을 노렸으나 노인이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순식간에 소마의 뒤로 돌아간 노인이 왼손 소매를 흔들자 한줄기 검은 연기가 무한을 향해 쏘아갔다.
“조심해라, 그가 독마다!”
무한은 이미 비릿한 냄새로 독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기에 호흡을 멈추고 옆으로 피했다.
독마는 무한에게 독연을 쏘아 보냄과 동시에 비수로 소마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순간, 소마가 의자에 앉은 채 앞으로 몸을 숙여 엎어졌다.
콰직!
독마의 비수가 의자 등받이를 찍음과 동시에 무한의 비도가 날아왔다.
비도가 유난히 천천히 날아오고 무한의 손에 다시 두 자루가 들려 있는 걸 본 독마의 안색이 홱, 굳었다.
난주에 기이하게도 비도를 잘 써 생사비도라고 불리는 놈이 있다는 걸 들은 지 얼마 안 됐다.
‘이놈이었구나!’
독마가 뒤로 피하려는데 엎어진 소마가 발을 뻗어 쇠사슬로 발을 감아버렸다.
“흥!”
독마가 소마의 발을 걷어차자 빠직, 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사이 비도가 다가왔다.
독마가 경시하지 못하고 비수로 비도를 쳐내고, 뒤이어 날아온 두 번째 비도를 피했다.
그러다 세 번째 비도의 궤적을 놓치고 말았다.
독마가 체면을 생각지 않고 그대로 뒤로 몸을 굴렸다. 체구가 작았기에 마치 어린애가 구르는 것만 같았다.
“헉!”
뒤로 구른 반탄력으로 막사를 빠져 나가려던 독마가 흠칫 멈췄다.
무한이 어느새 옆에 다가와 비도를 독마의 옆구리에 박아 넣은 것이다.
“크으으…….”
그제야 세 번째 비도는 허초였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늦었다.
무한은 비도를 찔러 넣고는 바로 일 장이나 물러났다. 독마가 무슨 독을 쓸지 몰랐다.
무한이 들어오고 독마가 죽기까지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막사를 포위해라! 지원을 요청해!”
독마의 고함을 들은 경계병들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무한은 곧바로 소마에게 다가가 쇠사슬을 끊고 부축하려 하다 눈살을 찌푸렸다.
소마의 다리뼈가 모두 부러졌고, 내공 또한 느낄 수가 없었다.
무한이 들쳐 업으려는데 소마가 손을 저었다.
“둘 다 빠져나가기 힘들 거야.”
소마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천주가 올 거야. 그놈… 천마지경에 올랐더라고. 죽어라 달려야 살 수 있어.”
소마의 말에 무한이 흠칫 놀랐다.
천마지경.
마천도들에게 전설로 내려오는 마신의 경지다.
“수하들에게 살아가겠다고 했는데 체면이 말이 아니군.”
“체면을 잃을 수야 없지 않겠소.”
무한이 소마를 들쳐 업었다. 이번에는 소마도 막지 않았다.
무한은 도를 그어 막사 뒤쪽을 찢고 빠져나왔다.
“이쪽이다! 여기다!”
막사를 포위하고 있던 경계병이 무한을 발견하고 고함을 쳤다.
우르르 마천도들이 몰려오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무한이 몸을 날리는데 머지않은 곳에서 콰앙, 하고 기파가 터졌다.
혈랑이 간 곳이다. 뒤이어 붉은 그림자가 황급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담담한 음성이었으나 마치 하늘에서 울리는 듯 마천 진영에 선명하게 퍼졌다.
뒤이어 한 사람이 혈랑의 뒤쪽에서 쑤욱, 떠오르는 게 보였다.
흑의장포를 입은 중년 사내였는데 멀어서 얼굴 생김까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혈랑이 달리다 말고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서 있던 땅이 쿠쿵, 하고는 뒤집어졌다.
‘천주구나!’
천마지경에 이르렀다니 정말 놀라운 무위였다.
손 한 번 휘젓는 걸로 십여 장밖에 있는 혈랑을 위협하다니.
“천마신장(天魔神掌)이다. 맞는 순간 내력이 흩어지고 경맥이 굳어버리지.”
소마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 내 꼴이 되는 거야.”
용케도 천마신장을 피한 혈랑이 몰려오는 마천도에 쫓겨 방향을 틀었다.
공교롭게도 무한이 소마를 업고 도주하는 방향이다.
천주의 시선이 혈랑을 쫓다 무한과 소마를 발견했다.
“소마? 아직 안 죽었느냐?”
무척이나 먼 거리였음에도 천주의 시선이 느껴졌다.
“크흐흐. 천주가 아직 살아 있는데 소천주가 먼저 가면 되겠소?”
소마가 웃으며 말했다.
순간, 천주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허공에 나타났다. 거의 오십여 장을 한 번에 날아온 것이다.
“에이 씨…….”
혈랑은 기껏 벌린 거리가 단숨에 좁혀들자 나지막이 욕을 하고는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쉬이익!
쌔액!
온갖 암기와 화살이 혈랑을 향해 날아가는 게 보였다.
혈랑이 뚝, 하고 땅에 떨어지더니 막사 사이로 요리조리 피해 달려왔다.
무한의 주위에도 마천도들이 몰려왔다.
“순순히 항복해라. 이미 포위됐으니 빠져나갈 수 없다.”
경계조장이 무한을 향해 엄포를 놓았다.
무한은 대답 대신 도를 휘둘렀다.
내력을 주입한 도에서 새하얀 도강이 빛났다.
“강기다! 이놈도 고수다. 뒤로 물러나 포위망을 유지해라.”
경계조장이 외치자 포위망이 넓어졌다.
무한은 경계조장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자신들의 능력을 알고 마천의 고수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무한은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소마를 잠시 내려놓고 걸치고 있던 피풍의를 벗었다. 이어 소마를 업고 목을 두른 목도리를 풀어 자신의 몸에 단단히 묶었다.
그러고는 벗어놓은 피풍의를 들고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쉬쉭!
예상대로 쇠뇌와 암기가 무한을 노렸다.
무한이 피풍의에 내력을 주입하며 휘둘렀다.
파악!
피풍의가 활짝 펼쳐지며 암기와 쇠뇌를 막았다.
강기의 벽으로 막을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내력을 아끼는 게 중요했다.
무형강기를 쓰는 것보다 검이나 도와 같은 매개체를 이용하면 내력의 소모가 훨씬 적다.
허공에서 보니 이미 주위로 일천여 마천도들이 운집해 있었다.
게다가.
“소마, 여기가 네 무덤이라는 걸 잊은 게냐?”
뒤에서 울리는 천주의 목소리.
‘긴 밤이 되겠구나.’
무한의 눈이 서늘하게 고원을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