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71화 (171/250)

171화

“아! 심 부주 아니시오?”

목책 너머에서 누군가 외쳤다.

섬서 승룡대 일조장 조약평이다. 그와는 천무행 때 인연을 맺은 바 있었다.

“어서 문을 열어라!”

목책 문이 열리고 무한과 남궁우가 들어섰다. 조약평이 직접 문 앞에서 맞았다.

“심 부주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시오?”

조약평은 얼굴에 피딱지가 굳어 있으나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환히 웃었다.

“조 형, 전황이 어떻습니까?”

무한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가벼운 부상을 입은 이들이 막사 주위에서 병장기를 손보며 무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형형한 눈빛들에서 비장함을 느낄 수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사기가 떨어진 분위기였다.

조약평의 얼굴에 분기가 스쳤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토끼몰이를 당했소. 전력만 잃고 사기가 떨어진 상황이오.”

“마천이 난주 이남으로 내려왔다는 말입니까?”

고원의 맹약에 따라 천하방이 내준 영역은 난주 북부까지다.

지금 와서 마천이 맹약을 지킬 리는 없지만, 그래도 확인을 해야 했다.

조약평이 고개를 저었다.

“전투는 난주 외곽에서 벌어졌소. 마천은 지금 난주 북부에 주둔하고 있을 것이오.”

난주를 가운데 두고 남북에서 대치중이라는 뜻이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익숙한 얼굴들이 다가왔다.

“무한아!”

귀왕갑을 입은 형소와 소소였다. 두 사람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조약평이 형소와 소소를 보고는 무한에게 포권하였다.

“나는 근무 중이니 이만 가보겠소.”

그는 옆에 있는 조원에게 무한과 남궁우를 군장 막사까지 안내하라 이르고는 다시 목책 정문 쪽으로 갔다.

무한이 형소에게 물었다.

“어찌된 일이야?”

“그렇게 말렸는데도 진군하다가 당했어.”

소소의 얼굴은 창백했다.

“혈랑이 아니었다면 다 죽었을 거야.”

연합 무력대의 군장은 현무대주 문우승이었다.

천무행 작전에서 현무대가 전멸한 후 새로이 편성하여 첫 출전을 하는 만큼 문우승도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리 신속하고 은밀하게 움직여도 가는 곳마다 적이 매복하고 있으니 속수무책이었다.

마지막에는 적에게 포위되어 군장이 사로잡힐 위기에 처하기까지 했다. 마침 달려온 혈랑과 난주 무림인들 덕분에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고 대주는 마천 땅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가 직접 설득을 했는데… 듣지 않더라고.”

소소가 면목 없어 하였다.

“네 잘못이 아니야.”

무한은 그렇게 말하고 소소 등과 함께 군장 막사로 갔다.

“지금 작전회의 중이오.”

막사를 지키고 있던 무사가 가로막았다. 정문서부터 안내한 무사가 무한을 가리켰다.

“검천부주를 모시고 왔네.”

“기다리시오.”

무사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무한을 향해 말했다.

“부주만 들어오시오.”

“쳇!”

남궁우가 기분이 나쁜지 들으란 듯 혀를 찼다. 남궁세가 출신으로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게.”

형소와 소소는 뒤로 빠졌다.

널찍한 군장 막사 가운데는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 여러 사람이 서서 지도를 보는 중이었다.

상석에 한 팔에 붕대를 감은 기골이 장대한 이가 군장 문우승으로 보였다.

무한이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검천부주?”

승룡대주 전경목은 무한을 보고 반가워하였으나, 문우승은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볼 뿐이었다.

무한이 다가가 문우승과 대주들에게 예를 취했다.

“검천부 심무한입니다.”

문우승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검천부주가 전장에는 무슨 일로 온 게요?”

“진영에 들어왔으니 군장께 보고하고 예를 올리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무한은 문우승이 자신을 경계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대주로서의 첫 출전에 부담을 느끼고 있구나.’

무표정한 얼굴 이면으로 초조와 불안, 분노 등이 읽혔다.

나머지 대주들을 살펴봐도 비슷했다.

무력대주들 사이에 얼굴이 갸름하고 눈이 족제비 같은 문사 차림의 사내가 보였다.

군사부에서 나온 연합 무력대 군사인 듯했다.

족제비 군사는 한창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던 듯, 말이 끊기자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지금 작전회의 중이오. 인사를 했으면 됐으니 외인은 이만 나가시오.”

족제비 군사가 무한을 외인이라고 콕 집어 말하자 전경목이 말했다.

“천하사패 검천부주가 외인이라면 대체 여기 외인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소.”

“검천부주이니 그런 것 아니오.”

족제비 군사의 말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번뜩이는 눈빛에는 무한을 향한 적대감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문우승이 말했다.

“검천부주가 적의 매복에 대해 일러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미 전멸했을 걸세.”

무한은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소와 형소가 간곡하게 진언한 덕분에 원래의 계획을 수정하여 진군하였고, 그 덕분에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족제비 군사는 이를 수긍하지 않고, 오히려 작전을 변경하는 바람에 대패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무한이 문우승을 향해 예를 취하고 말했다.

“지인들을 만나야 하니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문우승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무한은 막사를 나섰다.

대주들보다 무력대 전반의 상황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무한이 나오자 형소와 소소, 남궁우가 다가왔다.

“백상인은?”

“현무대 진영은 저쪽이야.”

백상인은 장로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천하방 요직을 택하는 대신 새로 편성된 현무대에 지원하였다.

“그래도 조장이더라고. 열 번째 말석이기는 하지만.”

현무대 진영.

조원들과 함께 진세 훈련을 하고 있던 백상인이 무한을 보자 반가워하며 달려왔다.

“무한 아닌가!”

“현무대 조장을 뵈러 왔지.”

“하하, 검천부주께서 직접 찾아주다니 영광이야.”

백상인은 조장으로 자신의 막사를 가지고 있었다.

무한과 백상인, 형소와 소소, 남궁우가 둘러앉았다.

백상인이 말했다.

“소소에게 들었어. 작전 계획이 적에게 다 넘어갔다며? 미리 경고해준 덕분에 우리 조는 모두 살았어.”

“적이 얼마나 돼?”

“정확히는 모르지만 매복한 규모를 합하면 일천 명은 되는 것 같아.”

“일천?”

남궁우가 숨을 들이켰다.

“정말 다 죽을 뻔했구나!”

“다행스러운 건 무력대 훈련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는 거였어. 난전을 벌인 걸 보면 마적이나 다를 바 없더라고.”

무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일반 마천도였다고?”

“일류라고 할 수는 없는 자들이었어.”

백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막사 휘장을 걷고는 누군가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현무대 백상인 조의 조원인 듯했다.

“조장, 식사 해야지?”

백상인이 무한에게 말했다.

“저녁 배식 시간이야. 여기서 다 같이 먹자.”

다섯 사람은 저녁을 타 와서 백상인의 막사에서 먹으며 지난 이야기를 꽃피웠다.

밤이 깊어갈 무렵, 전경목과 조약평이 술과 고기를 가지고 찾아왔다.

“하하, 그날의 영웅들이 다 모여 있었군. 함께 하고자 찾아왔네.”

막사가 비좁았기에 앞에 화톳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가며 밤늦게까지 전황을 논하며 술을 마셨다.

다음 날.

무한은 홀로 진영을 떠나 난주로 향했다.

난주 외곽에 이르렀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접전을 벌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난주표국?’

공교롭게도 무한과 인연이 있는 난주표국의 표행이 습격을 받고 있었다.

난주표국 사람 십여 명을 공격하는 이들은 오십여 명에 이르렀는데, 마적이 아니라 마천도들이었다.

“표마차를 버려라!”

국주 동사철이 큰 도를 휘두르며 표사와 쟁자수들을 도피시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무한은 말에서 튀어 올라 거의 삼십여 장을 날아갔다.

스르릉!

무한의 등 뒤에서 검이 뽑히며 손에 잡혔다.

파파팟!

거대한 검강이 난전장을 휩쓸었다.

“아앗!”

“피해라!”

혼전의 와중에도 거대한 기운이 다가오는 걸 느낀 마천도들이 일제히 몸을 뒹굴어 검강을 피했다.

하지만 검강은 애초에 마천도들을 노린 게 아니었다.

콰지지직!

강기가 난전장을 갈라버렸다. 사람 허리 깊이로 땅이 주욱, 패이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갑작스레 나타난 무한을 본 동사철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흘렀다.

마지막 표행을 가는 길에 마적떼들을 만나 몰살당할 뻔했는데 무한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표행을 완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난주 지척에서 마천도들에게 습격을 받았다.

이제는 죽었구나, 절망하고 있을 때 거짓말처럼 무한이 다시 나타났으니.

동사철로서는 믿기지 않을 따름이었다. 인연도 이 정도면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

마천도들은 길게 패인 땅바닥을 보고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무한이 경천신검을 까닥였다.

가라는 뜻이다.

그러자 마천 진영에서 누군가 튀어 나왔다.

“흥! 어린놈이 건방지게!”

무척이나 빠른 움직임이었으나 무한에게는 모든 동작이 다 보였다.

무한이 경천신검을 스윽, 그어 내렸다.

콰콰콰콰!

엄청난 기파와 함께 달려들던 이가 육편이 되어 튕겨나갔다.

“허억!”

“조장이 한 칼에 죽었다!”

마천도들 사이에서는 제법 고수였나 보다. 그런데 일검도 감당하지 못하고 죽자 마천도들이 경악하였다.

무한이 다시 한 번 경천신검을 까닥였다.

“퇴, 퇴각한다!”

무한이 절대고수라는 걸 깨달은 마천도들이 황급히 도주하였다.

‘정말 일반 마천도들이구나.’

무력대는 퇴각을 하면서도 질서정연하게 방어를 하며 물러난다. 그런데 저들은 그냥 죽자 사자 달릴 뿐이다.

동사철이 다가와 무한에게 포권을 하였다.

“번번이 도움을 받다니… 대체 이 은혜를 뭘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구려.”

“제가 받은 게 더 큽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동사철 덕분에 아버지를 만날 수 있지 않았나.

“그럼 정말 그분이…….”

“그렇습니다.”

무한이 동사철을 말을 잘랐다. 아버지의 생환 소식을 널리 알리고 싶지 않았다.

동사철이 눈치채고 입을 닫고는 착잡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도주하던 마천도들 쪽에서 비명성이 들려왔다.

마천도들 앞에 한 무리의 기마대가 나타나더니 사정없이 칼을 휘둘렀다.

선두에 선 인영은 피처럼 붉은 옷을 입고 있는 혈랑이었다.

순식간에 오십여 마천도들이 전멸하였다.

이어, 혈랑이 달려오더니 엉망진창이 된 표행을 슬쩍 보고는 동사철과 무한 앞에 말을 멈췄다.

“좀 늦었군.”

혈랑의 눈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자신이 동사철을 구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기색이었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잖아도 찾아가던 참이었소. 천하방 무력대를 도와주어 감사드리오.”

무한이 정중하게 예를 표하자 옆에 있던 동사철이 흠칫 놀랐다.

마적떼가 천하방 무력대를 돕다니.

무한은 동사철을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난주 흑도가 일통되었다기에 수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장본인이 나타났군요.”

동사철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챘다.

“아니, 그새 난주 흑도를 일통했다는 것이오?”

“그깟 놈들 잡아다 꿇리는 게 뭐 어렵다고.”

강하보가 멸문당하고, 월야루 진소향이 떠난 뒤, 난주 흑도는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였다.

혈랑이 한 쌍의 월아도를 뽑을 필요도 없었다. 혈랑대가 한 차례 방문하여 난리를 치면 흑도방파의 수장들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나를 왜 찾은 거지?”

“고원에 대해서 혈랑만큼 아는 자가 없잖소.”

“그건 그렇지. 여기서 싸움을 벌이려면 내 허락을 받아야 해.”

혈랑이 으스댔다.

그때, 멀리서 작은 먼지구름이 일더니 누군가 황급히 말을 달려오는 게 보였다.

“급보! 급보입니다!”

미친 듯이 달려온 전령이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말했다.

“마천도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놈들이 나타난 게 어제오늘 일이냐?”

혈랑이 코웃음을 쳤다.

“그게 아닙니다.”

전령의 얼굴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일만 명이 넘을 거랍니다!”

순간, 장내가 얼어붙었다.

일만 명?

무한이 침음성을 흘렸다.

‘천주가 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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