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심군하가 비틀거렸다.
단전이 훼손되어 내공이 없는 심군하다. 도객의 목을 찌르긴 했으나 반탄강기에 내상을 입었다.
“아버지!”
원봉이 놀라 심군하를 부축하였다. 진소향과 무한도 황급히 다가갔다.
심군하가 손을 들어 저었다.
“나는 괜찮다.”
그러면서 사방에 쓰러진 도객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내가 걸어온 길이었구나.”
탄식하듯 내뱉는 음성에 회한이 어려 있었다.
“우선 내상부터 다스리셔야 합니다.”
무한이 품에서 요상환을 꺼내려는데 남궁우가 한발 빨랐다.
“두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남궁세가의 지낭 남궁우입니다.”
그러면서 작은 목합에 든 요상환을 심군하에게 바쳤다.
“이건 남궁세가의 구급요상환입니다.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남장을 하였는데 목소리는 여성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심군하와 진소향이 남궁우를 보다 뭔가 깨달은 듯 무한을 보았다.
그러자 남궁우가 얼굴이 벌게져서는 손사래를 쳤다.
“아하하.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제가 지금 특임감찰 호위로… 에, 또… 그런데 어찌 두 분께 신분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남궁우가 횡설수설하자 심군하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요상환을 받았다.
“고맙네.”
심군하가 요상환을 삼키고 자리에 앉자 진소향이 다가가 심군하의 등에 손을 대었다. 따듯한 기운이 흘러 심군하의 내장을 보호하였다.
무한과 남궁우, 월아가 사방을 지키는데 허공에서 뭔가 날아와 툭, 떨어졌다.
잘린 사람의 머리가 마당에 굴렀다.
“으헉!”
무심코 쳐다본 원봉이 짧게 숨을 들이켜며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무한이 보니 도주한 십이도객 중 한 사람이다.
뒤이어 전음성이 들려왔다.
- 흑천 사람들이 오고 있네.
운객의 전음이었다.
‘……?’
무한은 성밖마을에서 운객을 만났을 때 아버지의 호위를 의뢰하였다. 그러나 운객이 말없이 사라져 거절한 줄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의뢰비조차 건네지 않았는데 와서 호위를 하고 있을 줄이야.
‘특이한 사람이야.’
운객의 행보는 무한으로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무한이 운객이 있을 곳으로 짐작하는 쪽을 향해 말없이 포권을 하였다.
머리가 떨어지는 소동에 진소향이 내공을 거두고 일어섰다. 다가오는 흑천도들의 기세를 느낀 듯 밖을 쳐다보고는 외쳤다.
“누구냐?”
그러자 바깥에서 흑선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월주를 모시러 왔습니다.”
“나는 흑천을 떠난 사람이다.”
“흑월은 한 번도 월주를 잊지 않았습니다.”
삐걱.
대문이 열리고 흑선수사와 흑천 흑월도들이 나타나더니 부복하였다.
“월주!”
“흑천과 나의 인연은…….”
진소향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데 심군하가 손을 들어 막았다.
“갑시다.”
심군하의 말에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이번에 세상에 나오며 몇 가지 할 일을 생각해두었소. 그중에 하나가 무한의 외조부를 뵙는 것이었소.”
“예?”
진소향이 의아해하였으나 심군하는 담담히 웃기만 했다.
무한은 아버지가 어머니와 흑천노조를 화해시키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하시죠. 어머니.”
무한이 거들자 진소향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시겠습니다.”
흑선수사가 기쁜 목소리로 외치며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마차를 대기시켜라. 월주께서 나가신다.”
그러면서 무한을 향해 살짝 눈짓을 했다.
같이 가자는 뜻이다.
무한이 고개를 젓고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저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감숙으로 가봐야 합니다.”
소소와 형소를 보내긴 했으나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남궁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천하방에서 귀주까지, 귀주에서 서안까지 연일 강행군을 하였는데 다시 감숙으로 간다니 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월주의 집이다. 사악한 무리들의 시신을 치워라.”
흑선수사의 말에 흑월 사람들이 재빨리 시신을 수습하고 피를 닦는 등 수선을 떨었다.
이윽고 마차가 당도하자 심군하와 원봉, 진소향과 월아가 타고 떠났다.
남궁우와 둘만 남은 무한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의뢰비를 지불하겠소.”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기운을 펼쳐봐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궁우가 물었다.
“운객?”
“모습을 보이기 싫은 모양이야.”
무한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을 한 번 더 둘러보고 길을 나섰다.
***
“누구냐!”
호통소리가 밤의 고원에 울려 퍼졌다.
한때 천하방 감숙지부였던 성채는 마천 소마의 본거지가 됐다.
높이 쌓아올린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던 광풍대원이 고원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그림자를 향해 활시위를 겨눴다.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쏘겠다!”
그러나 그가 쏘기도 전에 그림자가 비틀거렸다. 부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광풍대원이 활을 내리고 다가오는 인영을 주시했다.
부상을 입었으나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더니 그대로 성벽을 뛰어 넘었다.
“허억!”
광풍대원이 있는 힘껏 호각을 불었다.
삐익!
곳곳에서 횃불이 밝혀졌다.
그림자는 그대로 외성을 통과해 내성을 뛰어넘어 소마의 거처로 향했다.
“소천주의 거처로 갔다!”
경계를 맡은 광풍대원들이 우르르 내성 소마의 거처로 달려갔다. 소마의 거처를 지키던 무사들도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림자가 멈추고 신형을 드러냈다.
“검마, 어르신?”
무사들이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머리카락을 산발한 검마는 입가에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때, 소마의 음성이 들렸다.
“소란 떨 것 없다. 모두 물러가서 경계하라.”
마침 달려온 광포가 소마와 검마를 번갈아보다 외쳤다.
“외성 경계를 강화한다. 대기조를 깨워라.”
광풍대가 물러가자 소마가 검마를 향해 말했다.
“어찌된 일이오? 말년에 너무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것 아니오?”
검마가 창백한 얼굴로 자신이 들고 온 검을 소마에게 던졌다.
“받아라!”
소마가 검을 받아 뽑았다.
스르릉!
“마천검? 이걸 왜 내게 주시는 거요?”
검마가 마천을 배반했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고 찾아온 검이다.
검마는 전대가주 혁련무의 죽음을 밝히고자 마천검을 들고 혁련가로 향했다.
“실패한 거요?”
마천검은 혁련가를 지휘할 수 있는 신물이다. 검마가 쥐고 있다면 그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을 텐데…….
소마가 웃으며 묻는데 검마가 비틀하더니, 푸아악 피를 뿜었다. 지금까지 내상을 억지로 버티며 달려온 것이다.
소마의 안색이 홱, 변했다. 검마가 이 정도 중상을 입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황급히 다가가 부축하려 하는데 검마가 손을 저었다.
“가까이 오지 마라. 독마의 독이다. 피 한 방울이라도 닿으면 중독될 것이다.”
검마가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천주가 오고 있다. 피하는 게 좋을 것이다.”
“벌써 천마동을 나왔다는 말이오? 그럴 리가!”
“흥! 천마신공을 완성했는지 실패했는지 누가 알겠나? 어찌 됐던 놈은 탈마의 경지를 넘어섰어.”
소마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었다.
독마의 독만으로 검마를 이렇게 만들 수는 없다. 분명 천주와 붙었을 것이다.
“배반자는 역시 천주, 아니 혁련후 그놈이었어. 이게 그 증거다.”
검마가 품에서 비단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향아가 직접 쓴 당시 상황이다.”
소마가 비단주머니를 받았다.
혁련향은 간신히 살아남은 뒤 마천검을 감추면서 당시 상황을 적어 함께 묻었다.
검마는 감숙으로 돌아온 뒤 소마를 만났을 때 이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혁련가 내부에서 벌어진 일로 외부로 알려지면 가문 전체의 수치이기 때문이다.
또한 혁련후가 이미 천주의 자리에 올랐으니, 소마가 안다 해도 어찌할 방도가 없으리라 보았다.
검마는 마천검으로 혁련후에게 직접 책임을 묻고자 했다.
그러나 천주는 독마와 시마 등을 풀어 기습을 하곤, 이후 직접 나타나 손을 썼다.
검마는 가까스로 도주하여 남은 진원지기까지 소모하며 경공을 펼쳐 소마를 찾아온 것이다.
“으음. 나이도 든 분이 왜 이리 순진하신 거요. 배신자가 순순히 목을 늘여 죽여 달라고 했을 것 같소?”
소마가 웃는 낯으로 질책하였다.
“방금, 그 웃음은 정말 기분 나쁘군.”
소마가 화가 날 때 더 웃는다는 걸 알면서도 검마가 투덜거렸다.
“나는…… 크으읍!”
검마에게 혁련가는 그의 전부였다.
머나먼 방계로 태어나 부단히 수련한 끝에 형은 가주가 되고, 자신은 혁련가의 원로로 존경을 받았다.
혁련가는 당대 천마를 배출한 가문으로 십이호교 가문의 수좌를 차지하였다.
검마가 피를 한 덩이나 토하고는 말했다.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니 미련은 없다. 다만… 배신자를 처단하지 못하고 죽는 게 한이로군.”
“당신이 직접 하시오. 나는 천주가 두렵소.”
소마가 퉁명스레 되받아쳤다.
검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소마가 다가가니 앉은 자세 그대로 죽어 있었다.
소마는 착잡한 얼굴로 검마를 보다 손을 휙, 저었다.
화르륵!
강렬한 화기가 검마의 시신을 덮치자 불이 붙었다.
그때, 어두운 하늘 어디선가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형(黔兄)! 고작 여기까지 오려고 그 안간힘을 쓴 것이오?”
검마의 본명 혁련검을 부르는 소리에 소마의 안색이 굳었다.
“천주?”
소마의 신형이 휙, 사라지더니 성벽에 나타났다.
멀리 밤의 고원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여덟 명의 가마꾼이 팔인교를 메고 왔는데 그 위에 천주 혁련후가 앉아 있었다.
혁련후의 뒤로는 무수한 마천도들이 따르고 있었다.
“제기랄!”
소마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욕설을 뱉고는 마침 달려온 광포와 사추선에게 말했다.
“성채를 버린다!”
“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세운 성채인데, 죽음으로 사수하겠습니다!”
사추선이 반문하고 광포가 반발하였다.
퍽!
소마의 주먹이 광포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저게 안 보여? 수하들을 다 죽일 작정이냐?”
광포의 눈에도 천주의 뒤를 따르는 마천도 무리가 보였다.
밤의 고원을 까맣게 물들인 마천도들은 마치 검은 물결처럼 보였다.
“공동을 이용해서 소리 없이 빠져나간다.”
무한과 고벽후가 비무하던 공동을 발견한 소마는 뚫린 위 공간에 밧줄을 감춰 비상시 탈출로를 만들었다.
“어서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수하들에게 탈출을 지시하고 돌아온 사추선이 말하자 소마가 고개를 저었다. 대신, 보자기에 둘둘 만 마천검과 검마가 준 비단주머니를 사추선에게 건넸다.
“이걸 가지고 먼저 가라.”
“예? 주군께서는?”
“나보고 쥐새끼처럼 도망치라는 말이냐?”
수하들에게는 도주하라고 해놓고 자신은 남겠다니.
사추선이 침중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안 됩니다. 먼저 가셔야 합니다!”
“걱정 마라. 적당히 상대하다 따라갈 것이다. 이건 명령이다.”
***
천하방 산서와 섬서 그리고 본방이 연합한 칠백 무력대는 난주 남쪽 외곽에 진을 치고 있었다.
무한과 남궁우가 당도했을 때는 어둠이 내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
목책을 두른 진영에서는 부상자의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경계를 서는 이들도 온통 피투성이다.
“그새 접전을 벌였나봐.”
진영 가까이 이르렀을 때 남궁우가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한눈에 봐도 패잔병과 같아 보였다.
“멈춰라!”
목책 위로 수십 명이 순식간에 나타나더니 활시위를 겨눴다.
무한이 멈춰 서서 포권을 하였다.
“검천부에서 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