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오랫동안 비어 있던 집에 사람이 들었다.
기둥에 기름칠을 하고 창틀에 새로 색을 입혔다. 제멋대로 자란 정원도 다듬었다.
새로 지은 듯 깔끔한 집 대청에 진소향이 앉아 있었다.
지난 세월이 남기고 간 백발은 비단으로 짠 모자 속으로 감췄다.
그를 기다리고 있다.
눈을 감은 채 가만 조식을 하고 있지만 가슴이 설레는 건 어쩔 수 없다.
월아는 늘 냉랭했던 사부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보면서 심군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월아가 다구와 차를 탁자에 놓고 옆에 있는 화로에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그만 가 보거라.”
진소향이 제자에게 일렀다.
심군하는 기억을 잃었다고 했다.
어떤 만남일지 알 수가 없으니 제자가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월아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대청을 나갔다.
진소향이 정원을 내다보았다.
심군하와 함께 지낸 세월이 십년. 그는 일 년에 한두 차례 들렀고 그녀는 늘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그때는 희망이 있었다. 심군하가 모든 걸 매듭짓고 돌아오면 남들처럼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며 살았다.
그러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모든 게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어린 아들을 천하방으로 보내고 고원을 헤맸던 지난날이 마치 꿈같다.
딱, 딱!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진소향의 숨이 가빠졌다.
월아가 나가 문을 열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 너머 그가 있다.
익숙한 체형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소매가 헐렁했지만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문을 열어준 월아가 후원 쪽으로 사라졌다.
대문으로 들어서는 사내를 뒤따르는 작은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진소향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한에게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는 순간 미묘한 감정이 일었다.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켜주는 존재.
심군하는 대청에 앉아 있는 진소향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다가왔다.
낯선 이를 보는 심군하의 눈빛에 진소향의 가슴이 다시 한 번 철렁하였다.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만 내심 기대했다.
어찌 나를 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심군하의 눈빛은 생경스러웠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거라.”
심군하가 뒤따라온 원봉에게 이르고 대청에 올랐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심군하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
짤막한 한마디에 진소향은 맥이 탁, 풀렸다.
십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무한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소. 이렇게 보자고 한 건…….”
“그만!”
진소향이 심군하의 말을 막았다.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웠다.
진소향은 화로에서 주전자를 들어 찻주전자에 부었다. 말없이 차를 우려낸 진소향이 찻잔을 심군하에게 밀었다.
그리고 대청 아래 마당에 아직 서 있는 원봉을 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무한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진소향이 손짓을 하자 원봉이 올라오더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원봉이 인사드려요. 큰어머니.”
큰어머니라는 소리에 진소향은 가슴이 뭉클했다.
심군하도 약간 놀란 듯 원봉을 보았다.
원봉이 아버지를 향해 해명하듯 말했다.
“어머니가 큰어머니를 만나면 꼭 그렇게 부르라고 했어요.”
진소향은 차를 따라 원봉에게 내주었다.
세 사람은 묵묵히 차를 마셨다.
심군하는 자신을 찾아 헤매다 백발이 된 진소향의 머리를 보며 탄식을 하였다.
깊은 한숨소리를 들으며 진소향이 심군하를 바라보았다.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립기도 했던 얼굴이다.
진소향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심군하의 얼굴을 만지려는데, 갑자기 싸늘한 호통소리가 들렸다.
“웬 놈이냐?”
월아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소향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들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는데 갑작스레 나타난 걸 보면 은신술이 뛰어난 놈들이 분명했다.
“흐흐… 심군하가 살아 있었다니, 놀랍군.”
음침한 목소리와 함께 대청 아래 마당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흑의장포를 입은 장년인은 기다란 환도를 등에 매고 있었다.
장년인이 심군하와 진소향을 번갈아보며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흑월주를 잡으러 왔다가 대어를 낚았군.”
장년인이 심군하를 향해 말했다.
“그동안 어디 숨어 있었나? 죽은 줄만 알았지 뭐냐?”
“우리가 안면이 있는 사이였소?”
심군하의 말에 장년인이 고개를 갸웃하였다.
“나를 잊었나? 기가 막히군.”
“도마(刀魔)?”
진소향이 장년인의 환도를 보고는 정체를 알아보았다.
“마천의 주구가 서안까지 나타나다니, 죽고 싶은 겐가?”
도마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흑월에 버릇없는 년이 있다더니… 네년이야말로 죽고 싶은 게로구나.”
도마가 진소향을 노려보는데 후원 쪽에서 월아가 달려와 대청을 가로막고 섰다.
“사부, 적의 수가 많습니다.”
어둠 속에서 흑의인이 하나둘 나타나 섰다. 도마의 그림자라는 십이도객이다.
열두 명의 흑의인은 대청의 앞과 뒤 그리고 지붕에까지 포진했다.
‘두 연놈을 잡을 수 있을까?’
지옥곡의 고수가 죽은 뒤 월야루주의 신분이 밝혀졌다. 도마는 마천주의 명을 받아 십이도객을 이끌고 진소향을 추적해왔다.
진소향 혼자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전력인데… 뜻밖에도 죽은 줄만 알았던 심군하가 나타났다.
일단 동정을 살피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월아가 십이도객의 기척을 알아채는 바람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마의 시선은 심군하를 살피고 있었다. 왠지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이상해하는 중이다.
한쪽 소매가 헐렁한 걸 보니 불구가 된 걸 알 수 있었으나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심군하의 무위는 그도 잘 안다.
“계집과 싸우고 싶지 않다. 심군하, 네가 나서라.”
도마가 은근히 심군하를 떠보았다.
심군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무공은 잃었지만 기세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진중한 움직임에 도마가 환도를 들어 올려 스르릉, 뽑았다.
그러자 원봉도 일어나 아버지 옆에 서더니 허리춤의 목검을 뽑아 도마를 향해 겨눴다.
“흐흐…….”
도마가 기가 막히는지 헛웃음을 흘리곤 말했다.
“심군하, 애를 내세울 참이냐?”
그러나 심군하의 시선은 도마를 보는 대신 대문 쪽을 향했다.
“여기서 피를 보고 싶지 않구나.”
뜬금없는 심군하의 말에 도마가 뒤를 돌아봤다.
대문 아래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
도마가 내심 놀랐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그조차 몰랐다니.
심지어 십이도객 중 몇몇은 아직도 눈치채지 못하고 심군하와 진소향만 경계하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무한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싸늘한 표정 아래 차가운 분노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사람만의 시간을 위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한이다.
무한이 들어와 어머니 진소향에게 예를 취하고는 도마에게 시선을 주었다.
부모의 재회를 망친 도마 일행이었으나 그 역시 이 자리에서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여기는… 그가 태어나 자란 집이다.
“가라.”
무한이 짤막하게 한마디 하였다.
도마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심무한?’
무한의 정체를 알아챈 도마의 심기가 뒤틀렸다.
그는 마천 십이지마의 일원으로 존귀한 신분이다. 심군하와 진소향이라면 몰라도 아직 어린놈이 축객령을 내리니 체면이 상했다.
도마가 입꼬리를 비틀며 나직이 말했다.
“쓸어버려라. 진소향과 심군하만 남기고 다 죽여!”
순간, 마당에 포진하고 있던 네 명이 빛살처럼 대청으로 날아들었다.
월아가 검을 비스듬히 그어가며 한 명을 상대하였다.
진소향이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튀어 오르며 손을 뻗었다. 대청 벽에 걸린 검이 날아와 손에 잡혔다.
그러나 네 명의 도객은 대청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했다.
“크윽!”
날아들던 도객들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도마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어느새 무한이 대청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
무한은 싸늘한 시선으로 도마를 보며 말했다.
“두 번 말해야 하나?”
“어린놈이 감히!”
순간 도마의 신형이 사라졌다.
샤샤샥!
사람은 사라지고 하얀 도만 겹겹이 무한을 에워쌌다.
동시에 남은 도객들이 대청으로 뛰어들었다.
콰지직!
진소향은 지붕을 뚫고 들어온 도객을 쳐냈다.
월아는 심군하의 전면에 서서 달려드는 도객의 칼을 맞받아쳤다.
무한을 뒤따라온 남궁우가 마당을 통해 들어가는 도객 하나를 막아섰다.
심군하가 남은 한 팔로 원봉을 잡아채 자신의 뒤로 보냈다.
세 사람이 막기에는 도객의 수가 많았다.
“아앗!”
원봉은 유령처럼 나타나 달려드는 흑의인을 보고 놀라 소리치며 목검을 들어올렸다.
흑의인은 가장 약한 원봉을 노렸다.
순간, 심군하의 손이 원봉의 목검을 잡아챘다.
스윽!
목검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어지더니 흑의인의 목을 찔렀다.
경천십이식의 공공격.
무공은 잃었으나 위기의 순간이 되자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밴 검초가 나온 것이다.
“컥!”
내력이 실리지 않은 공격이었으나 그래도 잘 단련된 육신의 힘이 실린 가격에 흑의인은 목뼈가 부러져 쓰러졌다.
그러나 곧바로 다음 흑의인의 도가 심군하와 원봉을 동시에 쓸어버릴 듯 횡으로 날아왔다.
쉬이익!
어느새 진소향이 심군하의 앞을 가로막고 검을 내리그었다.
“커흑!”
도객은 피를 뿌리며 튕겨나갔다.
그와 동시에 마당에서도 비명이 터졌다.
“크으으윽!”
도마가 허둥지둥 뒤로 물러나며 팔이 잘려나간 오른쪽 어깨를 지혈하였다.
“마왕검벽? 이럴 수가…….”
도마는 믿을 수가 없었다.
환도에서 일어난 도강이 무한을 덮치는 순간, 해치운 줄 알았다.
그런데 순식간에 검강이 겹겹이 쌓이더니 벽을 형성하고, 그 사이에서 날카로운 검강이 튀어나와 자신의 오른팔을 잘라버린 것이다.
서걱!
도마는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재차 쏘아져 나온 검강이 도마의 호신강기를 부서뜨리며 가슴을 관통했다.
무한은 피전격과의 일전 이후 깨달은 바가 있었다. 기의 운용을 완전히 터득하며 현경을 향해 한 걸음 올라섰다.
도마 역시 화경의 고수였으나 내심 방심한 면이 있었다. 무한을 상대하면서도 은연중 심군하와 진소향을 경계하였던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도마가 자신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며 비틀거렸다. 십 년여 만에 중원에 나왔다가 허무하게 당했다.
“소, 소마가 배신했구나…… 크으윽!”
무한은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도마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청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도마가 당하자 남은 도객들이 크게 당황해하였다.
오늘만을 기다리며 공들여 집을 단장했던 진소향의 분노가 도객들을 향해 쏟아졌다.
샤샤샥!
월녀검이 제대로 펼쳐지며 환영처럼 달이 떠올랐다.
도객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마천에서도 손꼽히는 전력, 도마와 십이도객의 어이없는 최후였다.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섰던 도마가 무너지듯 쓰러지며 싸움이 끝났다.
도마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천, 천주께…… 알려라……”
무한의 시선이 담 밖을 향했다.
쓰러진 도객을 보니 열한 명이다. 하나가 빠져 나간 것이다.
무한이 몸을 날리려는데 심군하가 막았다.
“그냥 두거라.”
심군하의 입가에 핏줄기가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