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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68화 (168/250)

168화

피전격을 쫓아가며 무한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정말 갈피를 잡을 수 없군.’

방금까지 어이없다고 코웃음을 치더니 순식간에 마음이 바뀌어 무한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피전격은 협곡을 벗어나 작은 봉우리에서 무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한이 봉우리에 올라서자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표정은 아래 협곡에 있을 때와 달리 착잡하게 굳어 있었다.

“네 어미가 서안에 나타났다. 무슨 속셈이지?”

뜬금없이 피전격의 입에서 어머니의 동향이 나왔다.

애초에 피전격이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달았다.

무한은 어머니 진소향에게 아버지의 생존 소식을 알리고 서안에서 만나자는 말을 전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서안으로 왔을 것이다.

“집안 개인사까지 일일이 알려줄 이유는 없소.”

“개인사? 개인사라고? 전 흑월주가 나타났는데 개인사라고? 지금 나를 아무 생각 없는 천치로 여기는 건가?”

피전격의 눈에 노기가 어렸다.

무한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어머니는…… 흑월에 관심이 없소.”

“나 몰래 난주지부를 꿰차고 있었다. 그런데 관심이 없다고?”

“왜 그랬는지는 당신도 알고 있지 않소.”

진소향이 난주에 머문 건 심군하의 행방을 찾기 위함이다. 피전격 역시 이를 알고 있다.

“흥! 나를, 흑천을 배신한 여자라고! 그러니 그 속을 누가 알아? 또다시 뒤통수를 칠지.”

무한이 흥분한 피전격을 보며 말했다.

“배신이라는 말이 거북하구려. 당신은 흑천을 얻기 위해 정략결혼을 제의했고, 어머니는 거절했소. 천하의 사사천주가 설마 거절당하여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오?”

“뭐라고?”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소? 맨주먹으로 사사천을 일궜다고! 굳이 마다하는 사람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할 만큼 자신이 없소?”

피전격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전신에서 검은 기운이 회오리치듯 뿜어져 나왔다.

“어린놈이 터진 주둥이라고 함부로 지껄여!”

번쩍!

피전격이 주먹을 내질렀다.

콰르르르!

흑도제일기공 묵혼공의 기류가 맹렬하게 무한을 덮쳐왔다. 제대로 맞으면 육신이 남아나지 않을 기세였다.

채앵!

무한이 경천신검을 하늘로 올리더니 기운을 퍼뜨렸다.

경천신검에서 무수한 강기의 검이 쏟아져 나오며 검벽을 이뤘다. 소마의 마왕검벽을 완벽하게 재현한 것이다.

놀랍게도 피전격이 이를 알아보았다.

“마왕검벽! 너, 너… 소마와 무슨 사이냐?”

“피 천주와 마찬가지로 오다가다 스친 사이일 뿐이오.”

무한이 한 발 나서며 양손을 밀었다.

그러자 허공에 있던 경천신검이 강기의 벽을 통과하여 앞으로 쏘아나갔다. 그 뒤를 무수한 강기의 검이 무리지어 따랐다.

“……!”

피전격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기어검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는데 그로서도 처음 보는 수법이었다.

이는 무한이 소마의 마왕검벽을 공격으로 전환시킬 수 없을까 궁리하다 나온 검식이다.

파파팟!

검벽이 마치 강기의 검을 발사하는 듯했다.

“흥! 장난치지 마라!”

피전격이 고함을 지르더니 양 팔을 확 벌렸다가 일권을 내질렀다.

묵혼공의 기운이 짙어지며 강기의 검과 부딪혔다.

콰콰콰직!

기운이 부딪히며 허공이 흔들렸다.

경천신검이 힘을 잃고 허공을 튕겨져 나가다 빨리듯 무한의 검집에 꽂혔다. 동시에 무한이 강기의 검을 깨뜨렸다.

파파팟!

강기의 파편이 피전격을 노렸으나 묵혼공이 이룬 벽을 뚫지 못했다.

“크흐흐. 아직 멀었다.”

피전격이 크게 소리치며 다가와 권장을 후려쳤다.

무한은 미처 검을 뽑을 새가 없어, 강기의 검을 대신하여 맞받아쳤다.

이어, 두 사람은 바람보다 빠르게 얽혀 들었다.

일전 봉우리에서의 싸움에서 무한은 확실히 피전격 아래였으나 오늘은 그럭저럭 맞상대 할 수 있었다.

콰앙!

순식간에 수십 차례 접전을 벌이다 두 사람의 권이 맞부딪힌 후 떨어졌다.

무한이 솟구쳐 오르는 울혈을 삼키며 피전격을 바라보았다.

피전격의 안색이 약간 하얗게 질렸으나 큰 손해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과연 사사천주로구나.’

무한이 손을 내밀자 등 뒤의 경천신검이 다시 날아올라 손에 잡혔다.

경천십이식이 아니고서는 피전격을 이기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경천신검을 뽑은 것이다.

그런데.

“그만 하자.”

피전격이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진경을 타통한 놈이……. 됐다, 가라. 너 같은 괴물과는 더 상종하고 싶지도 않다.”

지겹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무한이 경천신검을 등 뒤의 검집에 꽂았다.

“손에 사정을 두어주어 감사하오.”

무한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피전격이 고수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도왕이나 권왕과 맞먹을 만한 화후였다.

동시에 피전격이 최후에 기운을 어느 정도 거두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흥! 네놈을 죽이면 노조가 나를 죽일 텐데……. 정말 지긋지긋한 악연이군. 죽일 수도 없는 놈이라니…….”

피전격이 퉁명스레 말했다.

무한은 피전격이 본심을 들킬까봐 흑천노조의 핑계를 대는 것임을 알았다.

사실, 방법이 거칠었을 뿐 피전격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다.

‘어머니 때문일까?’

이유라면 그것뿐이다. 아니면 정말 흑천노조를 의식한 행동이던가.

피전격이 말했다.

“고강후를 신악강이 죽였다고 들었다. 우리가 잡지도 않은 놈 머리를 잘라 걸어둘 이유가 없지.”

고강후의 시신도 양보했다.

“천주의 배려, 감사하오.”

“단, 정벌군은 오백 리 밖으로 퇴각해야 한다.”

“알겠소.”

피전격은 묵묵히 봉우리 아래 산들을 바라보다 문득 물었다.

“네 어미가 백발이 되었다는 게 사실이냐?”

뜬금없는 질문에 무한이 바라보자 피전격이 시선을 피했다.

“그러게, 내게 왔으면 한평생 호의호식 했을 텐데…… 정말 어리석은 여자다.”

그러더니 발밑에 있는 바위를 걷어차고는 휙, 몸을 날려 사라졌다.

무한은 잠시 멍하니 피전격이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흑월과 사사천의 병합을 위한 정략결혼이라고만 여겼는데 피전격은 나름 진심이었던 것이다.

무한이 돌아오자 정벌군 수뇌부들이 모여 있다가 초조한 얼굴로 맞았다.

정벌군 부군장 화극문주 하후량이 나서서 물었다.

“어찌 되었소?”

“그가 손에 사정을 두었습니다.”

창백한 무한의 얼굴을 본 하후량은 어찌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하기는 상대는 사사천주요. 살아 돌아온 것만도 용하오.”

그러자 관격후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면 고 부주의 시신을 정녕 내줘야 한단 말이오?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소! 이러고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소!”

무한이 그를 향해 말했다.

“사사천주가 고 부주의 시신을 내주는 대신 오백 리 밖 퇴각을 요구했소.”

“……?”

“내가 받아온 제의는 여기까지요. 이에 동의하든 말든 나머지는 여러분이 알아서 결정하시오.”

오백여 명이 와서 이백 명이 채 남지 않았다. 더 싸우라고 해도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사천 쪽 정벌군이 아직 남아 있는데 이쪽만 무단으로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한이 상황을 상기시켰다.

“고 부주가 흑수애를 쓸어버릴 것이라고 선언을 하고 출정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보니 흑천도 단단히 대비를 하였습니다. 병력의 규모가 이천에 이릅니다.”

굳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대로 싸우면 전멸당할 것이라는 뜻임을 듣는 이들이 모를 리 없었다.

부군장 하후량이 탄식하였다.

“전황이 우리가 예측한 바와 달랐소. 연전연승을 하기는 했지만 본방에 합류하는 문파가 예상외로 극소수였소.”

이들은 천하방 본방 무력대들이다. 정도 무림의 패자로 군림하며 출정을 갈 때는 그 지역 문파들의 환대를 받고 동조세력을 쉽게 얻어 활용해왔다.

그러나 귀주와 호남, 광서 등 흑천의 세가 강한 곳은 양상이 다르다는 걸 미처 몰랐다. 천하방이 봉기하면 정도문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무한이 하후량 등을 보며 속으로 개탄하였다.

‘이들은 세상이 천하방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기는구나.’

그동안 이 지역을 담당해왔던 무력대가 검천부 신검대였다. 신검대가 귀환한 뒤로는 거의 손을 떼다시피 하였기에 이곳 민심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고강후는 오백 무력대를 이끌고 오면서 호남과 귀주의 흑도문파를 궤멸시키면, 억눌렸던 정파가 합세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심지어 그 대상이 되는 문파들 명단도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문파가 외면했다.

“그 이유가 흑천노조가 건재하기 때문이었소. 그들은 우리가 흑수애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합류를 거부한 것이오.”

하후량이 무한을 쳐다봤다. 그 눈빛이 묘했다. 무한이 흑천노조의 외손자이니 말을 잇기가 껄끄러운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소. 일단 호남으로 물러나서 전력을 정비하고, 정도 무림의 세를 규합할 것이오.”

거창하게 출정식까지 치르고 나왔는데 연전연승하다 한 번의 패배로 비 맞은 개마냥 돌아갈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벌군에게는 그들의 입장과 체면이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한이 예를 표하고 돌아서려는데 하후량이 잡았다.

“잠시만!”

하후량이 무한을 보며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정벌군은 군장을 잃었소. 누군가 뒤를 이어 지휘를 해야 하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눈으로 무한을 보았다.

정도 문파들은 연배와 나이를 따지지만 최후에는 결국 힘이 서열을 결정한다.

무한이 피전격과 일대일로 겨뤄 손색을 보았다 하나 멀쩡하다.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감히 피전격과 맞대결을 벌여 살아 돌아올 자는 없다.

“노부는 나이가 들어 무력대를지휘하기에는 힘이 부치오. 검천부주께서 정벌군을 맡아주지 않겠소?”

무한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제게는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관격후가 소리쳤다.

“검천부주는 천하사패의 일원이면서도 어찌 강 건너 불 보듯 하시오! 흑천노조의 외손자이기에 흑천과 싸울 생각이 없는 것이오?”

무한이 관격후를 향해 말했다. 진중하면서도 싸늘한 어조였다.

“본 부주가 흑천노조와 혈연이라서가 아니오. 애초에 이 전쟁을 반대해왔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소.”

“이 정벌은 방주의 명이오. 검천부는 방주의 명을 무시할 작정이오?”

분위기가 과열되자 하후량이 나서서 중재하였다.

“관 문주, 이 싸움의 명을 받은 건 우리네. 검천부주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은 없네.”

그러면서 무한에게 말했다.

“이 늙은이가 이리 부탁하겠소. 공적 때문이 아니오. 여기 수많은 목숨을 건사하려면 부주가 있어야 하오.”

하후량의 말에 무한이 말했다.

“만일 본 부주가 군장을 맡으면 바로 퇴각 명령을 내릴 것이오. 그러면 여러분은 따르겠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무한이 하후량을 향해 말했다.

“서로 뜻이 다르니 제가 지휘를 맡을 이유가 없습니다.”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무한은 말없이 예를 취하고 무리를 빠져나왔다.

남궁우가 말을 가져와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

“서안.”

무한이 짤막하게 대답하고 말고삐를 채어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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