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남궁우의 말은 크지 않았으나 조충경의 귀에도 들어갔다. 남궁우를 보고는 의아해했다.
“넌, 뭐냐?”
남궁우의 말대로 조충경은 원래 장강에서 소금을 밀매하고, 수적질을 하던 자였다.
온갖 악행을 저지르자 남궁세가가 추살령을 내렸는데 도주하다 우연히 탄 왜국선에서 도법서를 얻었다.
중원의 도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왜국의 도법을 익힌 후 그는 스스로를 혈륜도라 부르며 흑천 사사천에 의탁했다.
이번 출정은 그가 선봉에 선 첫 출전이다. 반드시 적을 궤멸시키리라 마음먹고 왔으니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무한이 차가운 눈초리로 조충경을 보았다.
“내 목을 원한다 했나?”
무한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조충경이 자신의 왜도를 뽑아 두 손으로 쥐었다. 가늘고 긴 도는 칼자루도 길었다.
“흐흐. 순순히 내준다니 고맙군.”
조충경이 한 발 내디디나 싶더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무척이나 빠른 보법이었다. 오로지 일직선으로 파고드는 보법에 긴 장도까지 더하니 순식간에 칼날이 무한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순간, 무한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조충경의 뒤에 나타났다.
조충경은 일격을 내리친 그대로 멈춰 섰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만큼 조충경의 칼과 무한의 움직임이 빨랐다. 그러니 칼을 내리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조충경의 모습에 의아해하였다.
끄르륵!
기괴한 소리와 함께 조충경의 머리가 굴러 떨어졌다.
그제야 피분수가 터졌다.
“…….”
협곡에 정적이 흘렀다.
선봉장이 일 초도 겨루지 못하고 죽어버리자 흑천도들의 사기가 뚝 떨어졌다.
이미 나타날 때부터 절대고수임을 과시하듯 엄청난 기파를 터뜨린 무한이다.
조충경이 자신의 기이한 도법을 과신하고, 무한이 아직 어리니 요행수를 바라고 덤볐다가 바로 죽는 걸 보자 전의를 상실하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흑천 사사천의 무력대. 누군가 퇴각을 지시해야만 물러날 수 있었다.
그때.
“사사천주께서 오셨다!”
멀리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한이 흠칫하여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고강후는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었겠군.’
피전격이 와 있었다면 자신이 오사를 막더라도 고강후는 결국 죽었을 것이다.
피전격은 우사로부터 무한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심무한! 죽을 구덩이로 기어들어 온 것이냐?”
협곡을 울리는 목소리에 이어 피전격이 날아와 섰다.
그 뒤로 사뇌 납득과 오사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피전격이 협곡 전장을 둘러보더니 인상을 썼다.
언뜻 봐도 기습을 받은 천하방도보다 흑천도들이 훨씬 많이 죽었다.
적의 수장 고강후를 잡기는 했으나 흑천도의 피해도 컸다. 아끼는 혈사대주까지 잃었다.
피전격이 무한과 천하방도들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무한이 포권을 하였다.
“오랜만이오. 피 천주가 당가에 제의한 바를 전하기는 했는데, 당가의 변고로 무산되어 버렸소.”
“흥! 옛일을 들추자고 온 게 아니야.”
피전격이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당가에 제의할 때는 자신이 한 수 위에서 아량을 베풀 듯 휴전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독왕이 나타나더니, 태상가주의 신분으로 빠르게 당가를 규합하였다.
독왕은 죽은 당가주보다 훨씬 호전적이었다. 곧바로 사천 여러 문파를 규합하여 전선을 구축하였다.
여기에 사천의 천하방 지부 무력대가 선봉대가 되어 사천에 진출한 사사천 세력과 접전을 벌이는 중이다.
이제 당가에서 휴전을 제의하면 받아들여야 할 처지다.
“그보다 네가 여기는 웬일인가? 난주에서 생모와 해후를 했다고 들었는데… 백발이 된 노모를 모셔야지, 위험한 전장을 누비고 다니면 되겠나?”
피전격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때,
“사사천주! 목을 내놔라!”
고강후와 친분이 깊었던 구중문주 관격후가 검을 앞세워 나서며 호통을 쳤다.
피전격이 어이없다는 듯 보다 손가락을 까닥였다.
“너, 이리 와라. 네 목까지 따가야겠다.”
십여 장 거리였건만 관격후가 움찔하였다.
“크하하. 미친놈 아닌가?”
마침 뒤따라와 옆에 선 사뇌 납득과 오사를 돌아보며 피전격이 크게 웃었다.
“납득, 저놈 기억해놔. 반드시 머리를 가져갈 놈이야.”
납득이 문서를 펼쳐 적었다.
“인상착의를 보니 구중문 문주 관격후란 놈이군요. 아들이 백호대주인 걸 믿고 방자하게 구는 걸까요? 부자 두 사람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어놓겠습니다.”
관격후가 크게 당황하였다.
“이, 이놈들이?”
“귀찮게 현상금까지 걸 게 뭐 있어. 지금 잘라버리지.”
피전격의 신형이 휙, 하고 사라졌다.
무한 일행보다 몇 발 앞에 섰던 관격후가 황급히 주위를 돌아보며 방어태세를 하였다.
무한의 신형 또한 사라졌다.
콰앙!
관격후의 일장 거리에서 피전격과 무한이 격돌하였다가 떨어졌다.
두 사람이 워낙 빠르니 다른 이들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관격후는 스스로를 진경의 고수라 자처했는데 피전격의 신형조차 쫓지 못하자 크게 당황했다. 하마터면 어찌 죽는지도 모르고 죽을 뻔했으니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피전격이 인상을 팍, 썼다.
“네가 대신 죽겠다는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소. 다만, 수장을 잃은 분노를 천주께서 헤아려 주시길 바랄 뿐이오.”
“오지랖은…….”
피전격이 못마땅한 듯 한마디 흘리고 훌쩍, 뒤로 날아갔다. 그러면서 말했다.
“심무한! 이번에는 내가 한 수 양보하지. 대신 사천 쪽 천하방도들도 물려야 할 것이야!”
“이 전쟁은 내가 지휘하는 게 아니오.”
무한이 선을 그었다.
흑천 정벌대는 엄밀히 말하자면 천하방에서 공식적으로 발족한 부대다. 부대의 지휘관이 죽었으나 절차에 따라 권한을 승계할 자가 있을 것이고, 진퇴 등 무력대의 운용 또한 그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무한은 더 개입할 의사가 없었다.
“후후. 그렇다면 고강후의 시신을 가져갈 수 없다.”
피전격이 손을 들자 협곡 위쪽으로 수많은 흑천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추 일천을 헤아리는 병력이다.
“감히 사사천의 영역을 유린한 자들을 살려 보낼 수는 없지.”
흑천 정벌대의 수장들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대체 뭘 믿고 겨우 오백 명을 데려와서 흑수애를 넘본 것이냐? 이해할 수가 없네.”
피전격이 조롱하듯 말했다.
하지만 옆에서 전장을 살피는 사뇌 납득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골치가 아팠다.
‘으음, 저놈들이 물러갈 명분을 주어야 하는데…… 천주께서 너무 몰아붙이네.’
전장이 이곳만이라면 그도 끝장을 볼 텐데, 사천 쪽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고강후를 잡았으니 이쯤에서 소강상태로 접어들면 수장을 잃은 천하방이 퇴각할 텐데, 피전격이 모두 몰살하겠다니 당황하였다.
하지만 적이 있는 앞에서 피전격에게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도 없었다.
피전격과 오사가 직접 나선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사사천 역시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납득이 남은 천하방 무력대 인원을 대충 헤아렸다. 이백은 되어 보였다.
그가 파악하기로 뒤에 두고 온 부상자를 제외하고 고강후가 끌고 온 병력은 사백오십 명이었다.
이를 잡고자 협곡으로 유인하고 기습한 흑천의 병력은 일천.
좁은 협곡에서 기습을 받았으나 과연 천하방 무력대였다.
열 명이 일조로 움직이는 천하방 무력대는 두 명이 선봉에서 적을 갈라치고, 두 명이 후방에서 활과 쇠뇌, 암기 등으로 지원을 했다.
나머지 여섯 명이 본대를 형성하며 삼재진이나 사상진 등 다양한 진세를 운용하며 공격과 방어를 하였다.
이렇게 열 명으로 이뤄진 일조가 다른 아홉 개의 조와 유기적으로 연대하여 싸운다.
열 개의 조가 진세를 갖춘 무력대는 그야말로 서너 배의 위력을 발휘한다.
조와 조 사이에 낀 적은 그야말로 맷돌에 갈리듯 갈려 버린다.
그렇기에 무력대끼리 싸울 때는 상대가 진세를 갖추기 전에 기습을 하는 쪽이 유리하다.
이를 감안하여 기습을 했는데 천하방 무력대는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분전하였다.
적을 절반 정도 해치우는 동안 피해는 기습한 흑천이 더 커서 칠백여 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납득은 고강후가 오백 무력대를 이끌고 귀주 쪽으로 진군할 거라는 첩보를 듣자마자 사사천과 흑천 일반 무인까지 이천 명을 끌어 모았다.
그중에는 혈사대를 비롯한 무력대도 일곱이나 되었지만 천하방 무력대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그동안 꽤 혹독하게 훈련시켰다고 여겼는데 혈사대를 제외하고는 말이 무력대이지 무인을 모아놓은 패거리였다.
그나마 믿었던 혈사대가 고강후를 잡는 데 투입되어 전멸하다시피하고, 대주마저 죽었다.
그러니 납득의 심정은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백도와 흑도의 차이일까?’
무력대의 차이는 자유분방하고 자기가 제일인 줄 아는 흑천도의 성향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더 큰 힘을 위해 자신이 일부분이 되어야 하는데 흑도들에게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다.
‘천기자… 정말 무림의 역사를 바꿨구나.’
무림은 천기자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을 실감했다.
오랜 무림 역사에서 수십, 수백 명이 난전을 벌이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군대의 전술을 도입하고, 진법을 이용한 무력대 개념은 천기자가 처음이었다.
정마대전이 중반에 이르러 가장 치열할 때 등장한 무력대에 의해 그 흉악하다는 마천의 괴물들도 중원에 뼈를 묻어야 했다.
천기자는 연일 마천에 밀리면서도 사천방의 정예를 모아 무력대 사대를 조련하였다.
그들이 바로 후일 청룡과 현무, 주작, 백호로 불리는 천하방의 정예 무력대였다.
정마대전의 분기점을 마천 혁련가주가 돌연 실종된 시점으로 꼽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들 무력대의 등장으로 이미 전세가 바뀌었다고 봐야 했다.
이후 마천은 물론이고 대파와 세가, 심지어 흑천까지 무력대를 편성하고 조련해왔다.
그러나 천하방 무력대에 비견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팔이 날아가고, 다리가 끊어져도 자리를 지켜 열 사람이 열 배에 이르는 백 인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
‘저들을 섬멸하려면 적어도 또다시 칠팔백 명은 희생될 것이다.’
이쪽에 피전격과 오사가 있지만 저쪽에는 무한과 수뇌부로 보이는 고수들이 있다. 저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사사천도 피해가 클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사천 전선도 남아 있고, 흑월주가 다시 나타났으니 세력을 보존해야 해.
흑월주가 사라진 후 위축된 흑월이지만 흑선수사가 있는 한 무시 못 한다.
납득이 아무래도 피전격을 말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무한이 입을 열었다.
“시신을 두고 천주와 내가 겨뤄보는 게 어떻겠소?”
피전격이 어이가 없다는 듯 양팔을 벌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왜?
그런 표정이었다.
다소 경망스러운 행동이었으나 피전격의 괴팍한 성격을 아는 오사는 그러려니 했다. 몽사는 크게 웃기까지 하며 말했다.
“독 안에 든 쥐가 고양이에게 한판 붙자고 하는군요.”
그러자 우사가 몽사의 등짝을 쳤다.
“뭐야? 왜 쳐?”
“천주께서 말씀하시는데 왜 끼어들어 망발이냐!”
몽사가 구시렁거리면서도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피전격이 잠시 무한을 노려보다 말했다.
“건방진 녀석, 따라 와라.”
피전격이 갑자기 몸을 솟구쳐 협곡 절벽을 타고 날아올랐다.
무한이 발을 굴러 땅을 박차고 뒤를 따랐다.